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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이런 문제들이 정리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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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도법 1997년 01월 179호
조실스님께 올립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옵니다.
겨울안거 하신 뒤 법체法體 청안하신지, 또 대중 스님께서는 정진여일 하신지 멀리에서 큰절 올리옵고 문안 여쭙니다.
도법道法은 부끄럽게도 중생의 답답한 심사를 끌어 안은 채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그렇게 세월을 죽이고 있습니다. 사실 정직하게 말씀 드리면 조실 스님께 푸념이라도 털어놓아야 답답한 심사가 풀릴 것 같아서 두서 없는 글월을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 실상사엔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흰 눈이 수북하게 쌓인 지리산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천왕문 앞 텅빈 들판에 새찬 바람이 휘몰아 칠 뿐 산새들의 자취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보라가 날리는 넓다란 들판길을 홀로 걷노라니 정체를 알수 없는 외로움이 가슴 속을 서늘하게 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온 출가삼십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알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돌아본 출가삼십 년의 살림살이는 마치 수십 년 묵은 창고를 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곳엔 잊혀지지 않는 아픔, 이물지 않는 상처, 덜 떨어진 중생의 업력과 집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조실 스님.
제 인생의 살림살이가 이러한데 어찌 답답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가 수행자란 언제 어디에서나 활발한 본래 면목의 살림을 살아도 허물이 많은 법인데 범속한 중생의 살림살이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저의 안타까움을 큰 가슴으로 감싸 안아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은 조실 스님의 큰 가슴에 기대어 어찌보면 범속한 일이지만 저희들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이고도 절실한 문제들을 스스럼 없이 털어놓고자 하오니 너그럽게 헤아려 주십시오.
첫째, 오늘날 한국불교의 사상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쪽에선 임제법맥 중심으로 종파주의적인 입장에서 한국불교의 사상적 정체성을 말하고 저쪽에선 통불교적인 입장에서 한국불교의 사상적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느 입장에서 한국불교의 사상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수행정진과 전법교화에 유익하고 바람직한 도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풍족한 왕실의 삶을 버리고 중생과 고락을 함께 하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터전인 묘지나 동굴에서 수행정진, 전법교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웅장하고 화려하고 편리하고 풍족하게 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떤 자세로 도량을 가꾸어 가야 좋을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셋째, 수행정진과 전법교화의 길에 바람직한 수행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청빈하고 소박한 소욕지족의 삶,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자비의 삶을 수행자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수행자들은 돈 없어서 불교가 안된다고 하며 더 편리하고 풍족한 살림을 위하여 곳곳에서 돈타령입니다. 사람들마다 수행자의 교육, 전법교화, 중생구제, 경전번역, 사회적 역할이 돈 없어서 안된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고급 승용차, 호화 해외여행, 토굴용 아파트, 거액의 개인통장 등 사유재산을 갖고 풍족하게 사는 스님이 많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과연 오늘의 수행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넷째, 수행자가 계율을 지켜야 되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우리 종단에서는 현실적으로 지킬 수도 없고 지켜지지 않는 보살계, 비구계를 주고 받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은 계를 받는 즉시 위선자 또는 파계한 죄인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당혹스럽습니다.
다섯째, 종단 최고 지도자이신 종정예하와 행정 책임자이신 총무원장 스님의 뜻을 존중해야 되는 것인지 편리한대로 처리해도 무방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종정예하께서는 일배만 하라 하시고 계단 또는 여러 스님들은 율장대로 삼 배씩히라고 합니다.
또 종정예하와 원장 스님께서는 승풍확립을 위해 은처승과 도박숭 문제를 근본적으로 정리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 뒤 임시총회에서 비공개로 이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었는데 집행부로부터 은처승과 도박승이 현재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추함을 보도하도록 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따졌을 뿐 대책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다고 합니다.
총무원과 종회의 의도가 은처와 도박은 해도 괜찮다는 것인지, 종단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종정예하와 원장스님의 뜻을 이처럼 유야무야해도 좋은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조실 스님.
이 밖에도 문제들이 수없이 많지만 우선 예를 들어 봤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정리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종단 내적으로는 위계질서의 혼란이 깊어지고, 후학들은 갈등과 대립과 방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종단의 안과 밖으로는 불신과 의혹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조실 스님께서 나서셔서 청년 납자들을 경책하고 총무원, 종회의원, 본사 주지 스님들께 강력히 촉구하셔서 예를 든 문제들을 정리함으로써 후학들이 갈등과 방황을 끝내고 일반 대중들이 불신과 실망감을 청산하여 젊은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부와 긍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길 간절히 간청하고 또 간청합니다.
삼가 청안청락淸安淸樂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새해 아침 지리산 실상사에서 도법 삼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