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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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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7년 01월 179호
많은 반야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것은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이고, 그 다음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금강반야경」또는「금강경」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은 공사상을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소승’에 대한 ‘대승’이라는 의식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에서 「금강경」은 아직 ‘공’ 이라는 술어가 확립되기 이 전에 성립된 것으로서, 대체로 서기 l50년에서 200년 사이에, 반야 계통 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전의 형식도 원시불교경전의 문체처럼 매우 간결하고, 에두른 표현도 없다.
「금강경」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 무아無我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설하는데, 설법의 전형은 이렇다. “중생들이 만일 마음에 상이 있으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니라. 만일 법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며, 만약 비법에 집착한다 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 집칙하지 말것이며,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치가 이러하므로 여래께서는 늘 ‘너희 비구들은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차려, 법마저도 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랴’ 하고 설하느니라.”
이것이「금강경」의 독특한 표현이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이런 표현은 뒤에 반야즉비般若卽非의 논리로 전개하는데, ‘즉卽’은 다르지 않다(不二,不異)를, 비非는 같지 않다(不一)를 뜻하는 것으로 반야의 지혜는 주객主客이 불이일체不二一體일 때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뗏목이란 어디까지나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더 이상 필요없다. 이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도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므로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지금까지 의지해 온 불교의 가르침은 물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하나의 집착이므로 최종적으로 이 욕망마저도 버려야 진정한 자유인,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기존 개념이나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가짐을「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선종의 제6조 혜능이 이 말을 듣고 발심해서 출가했다고 할 만큼 이 구절은 「금강경」의 명구名句 가운데서도 특히 잘 알려진 명구이다. ‘마땅히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하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은 무주심無住心 곧 어디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해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볼 수 없게 된다. 사물에 대한 고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게 될 때 존재의 진실한 본연의 자세를 볼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공의 실천이며,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에서 특히 중시하여, 마음은 본래 청정(自性淸淨心, 佛心, 佛性)해서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본래 청정한 불심이 나타난다고 한다.
옛날 일본에 한 유명한 거사가 있었다. 어느 날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한 노파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빌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노파는 “쌀보리 두 되반, 쌀보리 두 되 반”이라 외우고 있었다. 거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노파에게 다가가 “할머니, 불교에는 팔만사천 법문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쌀보리 두되 반’ 이라는 경문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잘못 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 노파는 유명한 거사가 하는 말이라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음부터는 ‘응무소주 이생기삼’이라 고치기로 했다. 그런데 ‘쌀보리 두되 반’ 이라고 몇 십 년을 외워왔기 때문에 ‘웅무소주 이생기삼’이라는 말이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틀려서는 안 된다, 틀려서는 안된다는 것만을 열심히 생각하면서 외운 결과 드디어 ‘응무소주 이생기삼’ 을 바르게 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쌀보리 두되 반’하고 외워 병을 고칠 수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올바른 경문을 외웠으니 더 많은 공덕과 영험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병조차 낫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절대 경지에 들어가 오로지 무심無心이 되면 거기에는 미신도 거짓도 참말도 없이, 노파와 부처가 동체同體가 되어 길가에 핀 풀꽃 한송이에서도 부처님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는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경지가 된다. 쌀보리 두 되 반을 외웠을 때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무심이 되었지만,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외웠을 때는 틀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에 집착해서 무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 경문輕文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병도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마음은 사려 분별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선승 덕산은 ‘주금강周金剛’이라 소문이 날 만큼 「금강경」의 강의을 잘했다. 그는 남방에 선禪이 일어나 적지인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내 마음이 곧부처임을 아는 것-이라 부르짖는 것에 화가나서 이것을 논파하려고「금강경」주석서를 등에 지고 남으로 갔다. 호남의 풍양까지 와서, 상점에서 떡을 사서 점심點心으로 하려고 하니 노파가 지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 물었다.「금강경 주석서」라고 대답하자 노파는 “내 질문에 답하면 상점의 떡을 전부 공짜로 주겠지만 대답을 못하면 다른 곳으로 가시게”하였다. 노파는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점심點心 한다고 하는데 이 얻을 수 없는 마음 어디에 점點할 생각입니까?”덕신은 음- 하고 신음만 할 뿐 한마디도 못하고 결국 상점에서 쫓겨나 버렸다. 그로부터 덕산은 마음을 고쳐, 부근의 용담龍潭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드디어 덕산의 선禪이라 불리는 대선사가 되었다.
이것은 마음은 본래 무형, 무상이고, 유무의 대립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생각이나 분별심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불교는 머리로 이해하거나 오성悟性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수행에 의해 체인體認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좋은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