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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회의 총무원장 탄성스님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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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 편집실 1994년 12월 154호
종단의 안정과 개혁, 이 물음은 오십 년대 정화 때부터 끊이지 않고 종단 안팎에서 제기되어 왔다. 개혁회의는 밖으로는 정권과의 먹이사슬 관계를 청산하고 안으로는 수행자로서의 위상 확립과 자질 향상 그리고 재가자들의 이기적 신행을 이타행으로 끌어올리는 것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출발하였다. 이제 개혁회의가 과도 소임을 끝내고 28대 총무원장 월주스님에게 집행부를 이임했다. 개혁회의는 사부대중들로부터 소임을 이임 받아 불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갈등과 정부의 회유와 지략에 많은 힘을 쏟았으리라 짐작된다. 이백 사십여 일 동안 개혁회의 실적과 실책에 대해 총무원장 탄성스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일시/1994년11월8일 오전10시 장소/총무원 총무원장실 대담자/월간 ⌜해인⌟편집장 진각 개혁. 지난 일년, 불교 집안에 조금이라도 눈이 열려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저리게, 혹은 희망으로 끌어안은 이름이다. “개혁”이라는 이름 하나를 끌어내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천신만고 끝에 얻은 개혁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 그 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땀을 흘렸는지. 어쨌든 이젠 한국 불교 최대의 격랑기였던 올 한해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개혁 불사가 원만하게 회향될 시간, 엄청난 소용돌이 속의 불교 역사의 현장에서 산승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계신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개혁의 산고를 치룬 조계사 총무원에서 만나 뵈었다. 스님을 뵈러 간 날이 마침 중앙종회의원과 교구종회의원 선거를 치룬 다음 날이어서 인터뷰의 첫 질문은 자연스럽게 선거 애기로 시작되었다. 이번 선거는 종단 개혁의 성공 여부와 앞으로의 종단 방향이 가름되는 선거여서 매우 중요한 선거로 보아집니다. 선거가 순조롭게, 문중이나 파벌보다는 종책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시는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잘 이뤄졌습니다. 전에도 선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여법하게 실시되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각 사찰이 문벌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문벌 중심의 선거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요. 절 집안에서의 문중이라 함은 독특한 가풍이 형성되어 있는데 요즈음엔 그러한 좋은 가풍이 많이 퇴색되었지요 어떤 곳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다른 곳은 수행자 중심이고, 또 다른 어떤 곳은 사부 대중적이고 하는 특색 있는 가풍이 오늘에는 이해 관계에 얽힌 문중 중심의 색채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염려도 있습니다. 다만 선거 뒤에 당선된 분들이 얼마만큼 공심을 가지고 종단을 운영할 것인지가 관건이 되겠지요. 앞으로 탄생될 새로운 종단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이번 선거 결과에서, 만일 종단 개혁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들어오면 개혁이 희석되지 않을까 염려를 했는데,이번 종회의원이 개혁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이 나와 앞으로 개혁 불사가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종단의 앞날이 순탄하다는 생각이신지요. 그 동안 종단이 시끄러웠던 것은 해방 이후의 정화 후유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종단에 들어와 총무원장도 하고 주지도 해야 하지만,우리는 수행하려고 절에 들어온 것이지 살림이나 하고 감투나 쓰려고 들어온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화 당시에는 거의 대처승이었지 비구승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정화 바로 뒤에는 사람도 없었고 살기도 어려워 참 비참한 일이 많았어요. 정화가 시작되어 비구, 대처가 가려졌는데 정화를 하고 나니 절은 많고 스님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중노릇 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모두 머리 깎기고 계를 주어 바로 총무나 재무 등의 살림을 맡겼어요. 이런 실정이었으니 본디 출가할 때는 큰 뜻을 가지고 왔던 사람도 소임 보는 것이 중노릇인 줄 안 겁니다. 그 때 올바른 교육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도를 닦으러 온 사람들이 도는 등지고 감투에 신경을 쓰다 보니까 지금 이런 결과가 온 거죠. 그런데 이번에 여기 와 있으면서 일을 해 보니 젊은 스님들 생각이 예전보다 좋아졌어요. 모든 일을 공심 공심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 수행 종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단의 앞날이 밝다고 봅니다. 그 동안 종단이 권력의 입김에 좌지우지 당했던 지극히 비불교적인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회의가 출범하면서 “종단의 자주 회복”과 “종단의 내적 민주화”를 내세웠는데 얼마만큼 걸음을 했다고 보시는지요. 우리 종단이 지금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도 권력과 밀착되어 결과가 좋았던 예는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서원장이 들어와 권력과 밀착되다 보니 그 세력을 믿고 삼선을 강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화 애기를 하는데, 각자의 노선을 지키면서 상부상조해 나가는 것이 자주이지 정부를 등지고 가는 것이 자주가 아닙니다. 우리 문화재의 팔 할 이상이 사찰 것 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문화체육부와 교류가 되어야하듯,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질서도 정부와 호흡이 맞아야 해요. 새 집행부가 들어서면 그 동안의 것을 경험 삼아 자주적으로 잘 해나갈 것으로 봅니다. 개혁회의가 출범되면서 법난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대중은 큰 기대를 걸었다. 권력에 예속되었던 과거 종단의 구태로부터 벗어나야 개혁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회의가 대통령의 사과와 내무장관의 퇴진을 실현시키겠으며 그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산문 폐쇄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을 때, 대중은 한국 불교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졌다. 개혁회의의 특별기구로 법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법난 규탄 현수막, 시민 고발운동, 백만인 서명운동 등이 있었다. 그러나 법난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고, 이에 대중은 종단의 자주성이 이미 뒷전으로 물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개혁회의가 법난 처벌에 너무 미온적이지 않았나 하는 지적이 있습니다. 내무부장관이 총무원에 와서 사과를 한 뒤 남북정상회담문제로 종정 스님을 모시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대통령 얘기가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깡패인데 그 무렵 중국에 있어서 수습을 잘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산문 폐쇄를 결의했던 것은 나름대로 실리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지, 꼭 사과나 퇴진을 바래서 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선 때 약속한 승가대학 이전 문제, 불교병원 설립 문제, 지방 방송국 설립 문제 등의 추진을 약속 받았습니다. 개신교 측에서 물고 늘어지는 지방 방송국 문제 말고는 잘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무장관 사퇴하라는 플래카드를 내리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젊은 스님들이 사과도 받지 않고 떼어냈다고 항의하더군요. 해 종 행위자를 징계하다 보니 주지를 새로운 사람으로 임명해야 하는데 전 주지들이 깡패를 동원해 못 비키겠다고 합니다. 같이 깡패로 맞설 수 없는 일이고 법적으로 해결하려니 경찰밖에 도움 청할 곳이 없었지요. 그러니 내무장관 사퇴 플래카드를 내걸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것인데 젊은 스님들이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고 왜 사과를 받지 않고 떼어 내었냐고 항의하더군요. 그래, 내가 그랬습니다. 국가끼리 전쟁을 할 때도 실리를 거두려고 전쟁을 하는 것이지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관 퇴진이나 산문 폐쇄도 그런 실리를 거두려는 것이지 그것만을 성취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항의했던 사람들이 이해를 했습니까.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여기서 우리가 일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해를 했겠죠. 지난9월1일, 전국기관차협의회 소속 노동자들이 총무원 요청에 의해 연행된 일이 있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딛고 일어서 불교 자주화를 외쳤던 개혁 종단이 또다시 전 총무원과 같이 공권력 투입을 요청 하는 것에 많은 대중이 납득 할 수 없어 했다. 대정부 투쟁에서 기술적인 미숙함이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개혁회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일이 기술적으로 잘 처리되었더라면 “불교 자주화”를 좀 더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전기협 소속 노동자들의 경찰연행으로 개혁종단에 회의를 느낀 사람이 많습니다. 그 분들이 육십오 일 동안 천막을 치고 조계사 안에 있었습니다. 올해처럼 더운 여름에는 징역 생활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들을 보호하고 있는 스님에게 여기 붙잡아 놓는 것만이 저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니, 연관되는 기관과 연결해 그들을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일을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그 자리였습니다. 마침 그 때 황진경 스님이 서른네 명의 명의로 현 집행부가 불법 집단 이라하여 원장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책 내용 시비 문제로 개혁회의 의원 법타 스님이 구속되고, 경상도 어느 곳의 스님이 우리를 주사파라 하여 신문에 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맞물려 전기협 문제를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재판에 절대적으로 손해를 본다고 해요. 그래 할 수 없이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여덟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번 사건으로 부당하게 지방으로 근무하는 동료들을 원대 복귀되게 하는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사회국장이 철도청에 들어가 얘기하니 당장은 어렵고 차츰 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동지를 배신하는 결과가 되어 자수를 하지 못하겠다고 해요. 강제로 끌려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을 하고 가겠다고 해서 좋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 일이 다 처리된 줄 알았더니 이틀 뒤에도 그들이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그 사람들을 담당한 스님들이 그들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이 재판 일이었습니다. 재판의 가처분이 결정되면 우리가 개혁하려 했던 것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중요한 재판이었어요. 할 수 없이 경찰서에 얘기해 이 사람들과 다 타협된 것이니 데려가라고 했지요. 문을 잠그고 있어 경찰이 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그 곳을 지키고 있던 스님 두어 분이 다쳤어요. 그 뒤로 젊은 스님들이 와서 공권력에 짓밟힌 게 얼마나 되었는데 또 공권력을 불러들였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부장 물러가라고 해서 나도 같이 물러가겠다고 했지요. 전기협 사건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오랫동안 자세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잔잔하고 담담했던 스님의 표정이 할 말씀이 많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많은 오해와 아쉬움을 남긴 문제이기도하여 스님 자신 또한 꼭 밝히고 싶은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 동안 남 모르는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에 개혁하시면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종도가 바랬던 개혁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마음에 부담이 된 것은 황진경 스님의 소송 제기였습니다.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그 분이 직접 앞장서서 소송을 제기한 적은 없다고 하는데 직접 나선 것을 보면 무언가 자신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 부담이 되었어요. 큰 재판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도 따지지만 정책적으로 되는 것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아무리 우리가 애써서 이루어 놓은 것도 소용없게 되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부담이 되었던 것은, 세 번을 연장해 가며 어렵게 종헌을 통과시켰는데 원로회의에서 거부한 일이었습니다. 그래 한 달이 연장되었는데 하다 보니 그것도 큰 어려움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셈입니다. 개혁의 성과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우리가 개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기 때문에 이 불사가 마무리되면 틀림없이 실망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이라고 하니까 불교가 확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달라질 게 없잖아요. 머리 깎은 수행자가 머리 기를 것도 아니고 양복을 입을 것도 아니고, 다만 종헌 종법을 조금 고치고 그 동안 잘못되었던 관행을 바로 잡는 것이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실망을 하겠다 생각 한 일이 있습니다. 종헌 종법을 애써 고치면서 여러 번 얘기한 것인데 아무리 법을 잘 만들어 놓아도 뒤에서 쓰는 사람이 잘 써야지 안 써버리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관철되지 않은 것이 몇 건 있지만 어느 정도는 의도대로 손질이 되었다고 봅니다. 새 집행부가 법대로 잘 이행만 해 준다면 우리가 처음 개혁하려 했던 것들과 크게 어긋나지 않고 잘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절 집안에서의 문중 이라함은 독특한 가풍이 형성되어 있는데 요즈음엔 그러한 좋은 가풍이 많이 퇴색되었자요. 어떤 곳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다른 곳은 수행자 중심이고, 또 다른 곳은 사부 대중적이고 하는 특색 있는 가풍이 오늘에는 이해 관계에 얽힌 문중 중심의 색채로 옯겨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염려도 있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나 참여 문제가 산중에서의 수도와 맞물려 늘 제기되어 오고 있습니다. 선승의 입장과 현실 참여를 두루 겪으신 스님께선 이 문제가 어떠한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스님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인 1944년 충남 갑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55년 범어사에소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구례 화엄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 수덕사에서 하안거 뒤로 십오 안거를 성만했으며, 화엄사 재무, 동화사 재무, 법주사 주지를 지냈으나 선승으로 이름이 더 높은, 평생을 수행으로 일관해 온 분이다. 생활 모든 면에서도 “자율”을 강조했고, 예순이 넘어서도 대중들과 함께 선방에서 정진하며 후학에게 모범을 보여 울력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요즘도 새벽 예불에 어김없이 참석하며 참선을 하는 것으로 아침을 여는 습관이 산중에서의 생활과 똑같다고 한다. 일을 함에도 성을 내 관철하는 일은 없으며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에겐 끊임없이 설득하는 온건 합리적인 분으로,“성품이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게 스님에 대한 중평이다. 근면, 검소함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승용차도 공적인 일에만 이용할 뿐 지금도 사적인 출타엔 전철, 고속버스 등을 이용해 시자 없이 혼자 다닌다고 한다. 이번 개혁에도 “이판과 사판을 두루 여법하게 치를 수 있는 능력”이 평가되어 총무원장에 선출되었다. 새삼스러운 질문입니다만, 이번 조계사 사태를 바라보면서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이런 일이 자주 생겨 여러 종도들이나 국민들 보기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승려대회 뒤로 조계사에 며칠 있을 때 경찰 천오백 명이 겹겹이 두르고 있는 가운데 스님들이 법당과 뒤뜰에 꽉 들어차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우리 불교가 썩지만은 않았구나, 살아 있는 곳도 있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젊은 스님들과 같이 있어 보니까 우리 불교가 발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산 공림사 선원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 어려운 시기에 총무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지요. 동참하지 못한 적이 미안해 다친 스님들 문병도 하고 상의도 해야 겠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스님 한 분이 내려와 4월11일 승려대회 대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무엇을 하냐고 했더니 대회사를 읽기만 하면 된다고 해요. 그래서 승려대회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상임위원장으로 뽑고 선포를 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총무원장까지 하게 되었어요. 나 자신이 이런 일을 전혀 모르는데, 같이 있어 주면 도움이 되겠다고 해서 있다 보니 지금까지 있었는데, 사실 이름만 원장이지 원장 구실을 한 적이 없습니다. 원장이 일을 알아서 지시해야 하는데 내가 잘 모르니까 부장, 국장 스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분들이 공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여러 종도들이 도와 마무리가 잘된 것 같습니다. 10.27법난 때인 80년에 중흥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내셨지요. 그 때는 문경 봉암사에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박기종 스님이 올라와 수습대책위원장을 하라고 해 올라와 있다가 우연히 붙들려 조금 있다가 내려갔습니다. 그 때에도 스님은 종헌, 종법을 손질했고 지금의 원로회의가 그 당시 구성되었다고 한다. 조계종의 종조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지금은 누가 어떻게 얘기를 해도 허물이 됩니다. 종조 문제는 불교 정화 때부터 거론되고 찬반이 있었는데 그 당시 큰 스님 네들이 보조스님을 종조라고 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얘기하다 보니 시시비비가 생겨나는데, 이삼십 년이 지나 그 당시의 스님들이 가신 뒤에 평가해도 되겠지요. 은사 스님이 금오스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분은 생긴 상호가 산 달마 같다고 했어요. 자그마하고 살집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섭다고 했어요. 경우 틀어진 꼴을 보지 못해 한곳에서 한철을 제대로 산 적이 없었습니다. 힘이 좋아 수 틀리면 두들겨 팼는데, 누구보다도 정의감이 투철했던 분입니다. 불교 정화의 시작이 그 분의 주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나 참여 문제가 늘 제기되어 오고 있습니다. 선승의 입장과 현실 참여를 두루 겪으신 스님께선 이 문제가 어떠한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옛 스님들 말씀에 “용과 뱀이 섞여 살고 성현과 범부가 섞여 사는 곳이 종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을 하나 지으려면 지붕, 기둥, 서까래, 모래, 자갈까지 섰여야 되듯이 종단이 형성되려면 수행, 포교, 살림하는 사람이 두루 갖추어져야지요. 수행자는 열심히 수행하고, 살림 맡은 사람은 공심으로 열심히 살림하고 포교할 때 종단이 발전되리라 봅니다. 불교계의 현실이 어떻든 오늘도 출가를 꿈꾸는 이들이 있고, 이미 산문에 들어와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출가 정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불교는 수행을 하는 것이지 살림이나 포교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경전을 잘 보고 말씀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중입니다. 열심히 수행해야지요. 담력을 키우려고 인육을 먹는 사람이 있는 세상 입니다. 한강 다리가 무너져 무고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얼굴 내밀고 다니기가 두렵다고 하는데요, 가치관이 전도된 혼란한 세상에서 저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해 주시지요. 해방이 되던 해 저는 열일곱이었습니다. 그 때 계룡산 신도 안에서 살았는데 그 해 봄 일본 소나무 해송이 모두 빨갛게 죽어 갔습니다. 노인들이 얼어 죽었다고들 했어요. 그런데 그 빨간 일본 솔 가운데 우리 한국 솔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났어요. 그렇게 빨갛던 솔이 4월이 되면서 전부 새파랗게 살아났어요. 그리고 그해 8월에 해방이 되었는데, 나무가 어떻게 국운을 알까 참 희 안하게 생각했어요. 근년에 보니 일본송이나 잣나무 등은 모두 푸른데 한국 솔만 빨갛게 죽어요. 호규 리란 벌레가 한국 솔만 먹는 답니다. 일본에 가니까 거기도 한국 솔만 다 죽어요. 굉장히 염려스러웠습니다. 내가 느끼기엔 우리가 외국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사람은 멀쩡한데 정신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부터 충효사상이 투철했는데 지금은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십니까, 국가를 생각합니까. 만물 가운데에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을 알기 때문인데, 지금은 부모는 모시려 하지 않고 자식만 기가 막히게 위합니다. 소나 돼지, 개를 길러 보면 그 놈들도 부모나 형제는 몰라도 새끼는 목숨을 걸고 지킵니다. 그 동안 인륜을 모르는 것이 개, 돼지와 다를 것이 없어 참 한심스러웠습니다. 외국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우리 생각이 병들고 있는 것과 솔 잎 혹파리가 한국 솔을 먹는 것이 비유가 되었는데 금년부터 어디를 가도 한국 솔이 새파랗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운이 온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충효의 얘기가 더러 나오더군요.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 있고 화목하고, 여유가 있으면 이웃도 도와주고 사회사업도 하는 것이 사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몰라 보고 자기만 벌어 잘살려고 하는데, 국운이 오면 그런 생각이 바뀌리라고 봅니다. 이제 곧 공림사로 내려가실 텐데 어떻게 지내시려는지요. 수행자 본디 모습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평생 지내겠지요.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인터뷰 시간, 스님과 오갔던 따뜻한 교감, 많은 분들이 스님의 소매를 붙잡았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사란 뒤에 남은 자들의 기록이라 했던가. 한국 불교 최대 격랑기의 현장에서 총대를 메고 섰던, “개혁”이란 이름 앞에 결코 과격하지 않고 온건하고 따듯했던 한 노스님을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할 것인지. 바쁜 틈에도 짬을 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두서없이 이야기를 해 미안하다”던, 조계사 후원 맨 끝자리에서 홀로 상을 받아 점심 공양을 들고 계시다 인사를 하고 먼저 훌훌히 떠나는 대담자에게 몸을 일으켜 답례하던 스님, 그 분의 하심의 깊이를 뒤에 오는 자들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