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지리산 화엄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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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4년 12월 154호
연기緣起법사 효행 설화를 담은 사자탑과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종 대가람 이태호 지리산 단풍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번 절집 순례는 구례求禮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잡았다. 화엄사에는 네 마리 사자와 연기 법사의 아버지상이 삼층석탑을 받치고 있으며 연기 법사의 공양 상이 맞은편 석등 간주 석에 조각되어 연기緣起 법사 효행 설화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화엄경을 돌에 새겨 장육전(각황전은 화재 뒤의 이름임)벽면에 두른 그야말로 화엄종 대가람이다. 지리산은 경남과 전남, 북의 접경 지역을 온통 덮어 버린 그런 웅장한 산이다. 말하자면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와 경남 산청, 하동, 함양을 비롯한 세 군데의 도道와 다섯 군데의 군郡에 산자락은 드리운 둘레만도 팔백여 리에 달한다. 지리산은 어머니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산자락이 좌우로 딱 벌어진 게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그 산라락은 시골집 인심 좋은 아줌마의 넓은 오지랖처럼 이 고을 저 고을 다 간섭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화엄사, 절 이름처럼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서의 풍모가 여기저기에 깊게 배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주존 으로 하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협시로 하는 비로자나 삼신불三身佛을 모신 대웅전 -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을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이라 해야 옳으나 어째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는 대웅전이라 이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법당들 가운데 이렇게 법당 이름과 모신 불상이 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절집도 유행에 민감한 모양이다-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인 이층집 각황전, 더구나 대웅전과 각황전 앞에 탑을 세우고 석축을 사람 키보다 높게 쌓아 법당과 만세루를 계단으로 구분한다. 이 점은 평면으로 배치한 평지 가람과는 달리 공간 효율성이 높은 공간 구성을 보여 주어 산지 가람의 터 닦는 지혜가 엿보인다. 신라 경덕 왕대인 팔세기 중엽 무렵 연기 법사에 의해 창건된 내력 화엄사는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지금까지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들이 많았지만 대체로 팔세기 중엽 통일 신라 경덕 왕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인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여겨진다.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스님은 매우 전설적인 인물이어서 그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신승동국여지승람神僧東國與地勝覽⌟에는 연기라는 스님이 화엄사를 세웠고 그 시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인조 십사 년(1636)에 쓰여 진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을 비롯한 다른 사적기 들은 신라 진흥왕 오년(544)인도 승녀 연기가 화엄사를 세웠다고 했다. 심지어 연기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연을 타고 인도로부터 와서 화엄사를 지었기 때문에 연기라고 한다는 설화까지도 전해진다. 또 한술 더 떠서 선덕 왕 십일 년(642)에 자장慈臧이 중창하고, 장육전丈六殿 및 화엄석경華嚴石經은 의상義傷이 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삼국 시대에 백제의 영역에 속했던 화엄사가 어떻게 신라 승려에 의해 창건되고 중창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전북 정읍 아래로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백제 시대의 불교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단순히 사격을 높이려는 후대인의 소박한 염원을 담은 것이리라. 또한 의상 이후에 번역된 ⌜80권본 화엄경⌟을 의상이 장육전에 돌로 새겨 둘렀다고 하는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오류도 생긴다. 더구나 지금까지 전해진 석조물이 양식상 모두 팔세기 중반으로부터 구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화엄사 사적⌟등의 문헌 기록에 대한 사료로서의 신빙성 문제는 일찍부터 논란거리가 되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과 문제점은 1978년에 발견된 ⌜신라新羅화엄경華嚴經사경寫經⌟(호암미술관 소장)에 의해 얼마쯤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화엄사의 창건 조사로 전해지는 연기는 경덕왕대의 실존 인물이라는 점과 그가 화엄경 사경(80권본)을 발원 제작했다는 것이다. 천의의⌜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 연기의 저서로 ⌜대승기신론주강大乘起信論珠綱⌟3권(혹은 4권),⌜대승기신론사번취요大乘起信論捨繁取要⌟1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저서는 오늘날 하나도 전해 지는 것이 없지만, 그가 당시 뛰어난 화엄종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 화엄경 사경의 발문에 따르면 황룡사의 연기스님이 경덕왕 십삼년(754)8월1일에 화엄경을 베끼기 시작하여 여섯 달 십사 일 만인 그 이듬해 2월14일(부처님 열반 전일)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연기가 사경을 한 주된 이유는 은혜를 주신 아버님의 원(父願)을 위한 것이고 일체의 중생을 모두 성불케 하고자 하는 대의 명분도 내세웠다. 또한 사경의 발문 끝에는 사경 조성에 관하여 인물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경 조성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무를 담당한 지작인紙作人, 경필사經筆師의 거주지가 전라도 지역인 무진주와 완산주이고 경심장經心匠,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 경제필사經題筆師는 왕경王京(경주) 사람이다. 이것으로 보아 실제적인 사경은 무진주, 왕산 주 지역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좀더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은 왕 경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 신라 화엄경은 여러 정황으로 므루어 연기가 창건한 화엄사에서 조성되어 화엄사의 탑 속에 사리 대용품으로 봉안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편 화엄사에는 각황전이라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법당이 있다. 이것의 본디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부처님의 몸을 장육금신이라 하는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장육의 금색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절에서 전하기를 문무왕 십년(670)의상대사가 삼층으로 된 일곱 칸의 장육전을 건립하여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긴 돌판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세 화엄사의 대강백이었던 진진응陣震應 스님의 조사에 따르면, 이 석경은 정강왕定康王(886~887)에서 경순왕 의희본敬順王(927~935)에 이르는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이와 같은 의문을 갖게 한다. 도한 석경의 내용은 경순왕義熙本 화엄경(60권본)과 정원본貞元本 화엄경(40권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복원을 시도해 보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같이 화엄사는 화엄경을 베끼거나 (사경) 돌판에 새기는(석경) 불사를 통해 화엄불국세계를 이루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며 또 포괄된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개성을 갖게 하는 원융무애한 경지에 화엄의 세계를 이상으로한 화엄의 대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신라 말 헌강왕대에 도선道詵이 도량을 넓혀 총림 대도량을 열렀다고 하나, 선종 승려인 그가 화엄종 사찰인 화엄사를 중창하였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다만 동리산문 대안사- 지금의 고성 태안사이며 동리산문의 방계인 도선의 옥룡사파가 왕건과 연결되기 이전에는 후백제 견훤과 밀착되었다는 김두진 교수의 탁견이 이미 학계에 소개된 적이 있다-와 거리상으로 지척이며 명종 이년(1172)도선의 비를 세우는 일에 화엄사 대중들이 동원되는 일도 있어 전혀 무관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화엄사는 네 차례의 중창 불사를 하였다.⌜화엄사지華嚴寺誌⌟에⌜고려호법외가高麗護法外記⌟를 인용하여 이 시기의 중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광종(949-975)의 어명을 받은 홍경洪慶 선사禪師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다. 도 문종 (1047-1083)은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해마다 화엄사에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때 이 곡물을 저장하려고 거대한 두 채의 사고를 일주문 밖에 지었을 정도였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 곳에 머문 것도 이 때였다. 인종(1122-1146)이 왕사 정인에게 화엄사를 중수케 하였다. 충숙왕(1313-1330)이 왕사 조형에게 명산대천의 사찰을 중수하고 불보살의 가호를 빌게 하였는데, 가람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 시대의 화엄사는 세종 육년(1424)에 선종 대본산으로 승격된 가람팔원伽藍八阮 속암팔십일屬庵八十一-의 거찰이었다. 조선 시대의 배불종승유 정책에서도 화엄사는 선종의 대본산으로서 고승들이 주관하는 법석의 요람이었다. 각종 법석이 열렸는데 성종 때(1469-1494)설응雪凝 법사法師가 선교를, 중종 십오년(1520)숭인崇仁 장노長老가 청연암에서 선회를, 선조 십칠년(1584) 부휴孚休 선수善修대사大師가 대장경大藏經을 강하였다. 또 선조 이십년(1587) 중관 해안海眼선사禪師가 대장경을, 선조 이십사년(1591)무염無染, 계훈戒訓, 양사兩師가 선교를 강하였다. 이와 같은 법회는 연대와 강주가 확실한 것으로 이해되며 실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법석이 펼쳐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란 때 승병으로 활약한 화엄사 승려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엄사의 승려들은 승병을 조직하여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특히 윤놀潤訥, 해안海眼, 설홍雪泓 등 고승들의 활약은 임진왜란 승병사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윤놀은 화엄대선겸선교판華嚴大選兼禪敎判 직책에 있었는데, 임란이 일어나자 수군에 가담하여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이어서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해안도 역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였다. 설홍은 방처인房處仁 등 삼백의 화엄사 승려를 이끌고 군량 삼백 석으로 석주진(구례의 관문)을 고수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는 임란이 평정된 뒤 화엄사 승군의 활동을 위로하고 그 공로를 치하하면서 어필서책御筆書冊을 하사하는 등 화엄사 복구에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 - 전라도 지역의 피해는 정유재란 때임 - 으로 말미암아 전각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화엄석경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과 그 문도들이 인조 팔년(1630)에 중건을 시작하여 칠 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당우와 요사체를 세웠다. 전란의 참혹한 상처는 마물지 않았지만 듯있는 승려들은 법석을 열어 전대前代의 화엄도량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인조 이십사년(1646)백곡白谷 처능처능이 화엄을 강했고,이십육년(1648) 취징翠徵 수초守初가 이를 계승하여 교장을 강했다. 이러한 사승들의 진지한 노력과 더불어 사찰 당우에 대한 보수도 차츰 이루어져 인조 이십사년에는 드디어 경찬법회慶讚法會를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사는 효종 원년(1649)에 선종 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벽암碧巖 각성覺性의 뜻을 이어받은 문도 계파桂坡 성능性能이 스승의 숙원이었던 장육전 중건을 숙종숙종 이십오년(1699)에 시작하여, 이십팔년(1702)에 완공하였다. 그 이듬해인 1703년에 삼존불과 네 보살상을 완성하여 일 주일에 걸쳐 성대한 경찬대법회를 열었다. 숙종은 장육전을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화엄사의 사격을 한 격 더 높혀 선교양종 대가람이라 하였다. 숙종삼십이년(1706) 대선사 명곡당 현근이 선고를 강했고 같은 왕 삼십 사년(1708)화엄종주 설암 추봉이 대장을 강했다. 훗날 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때 화엄사는 김개남金開南 부대部隊의 군수미 창고로도 이용되었다. 1894년8월25일 다시 남원으로 들어간 김개남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무력의 거점으로 삼고 농민 집회를 열면서 무력 항쟁 준비해 나갔다. 이즈음 김개남은 그의 영향 아래 있던 남원의 산동방- 지금의 산동면- 과 구례에서 군수미로 일 결당 칠 두씩 거두어 들여 삼백섬을 화엄사에 쌓아 두도록 하였다. 관리는 종질되는 접주가 맡았다. 사찰이 역사적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 일본 통감부가 한국 사원 관리 규칙이 발표한 뒤로 화엄사의 사격寺格은 크게 위축되었고 마침내는 승주 선암사의 말사가 되는 처지까지 이르게 되었다(1913).이로인해 오랫동안 선암사와 본말사本末寺의 분규를 겪어 오다가 1924년 사찰령 시행 규칙의 일부가 개정됨에 따라 일단락 지어졌다. 곧 규칙 제2조에 열거된 사찰 가운데에 구례 화엄사를 추가한 것이다. 이로써 종래의 삼십 본산이 삼십일 본산으로 늘어나 화엄사는 선암사로부터 독립되어 명실공히 본산으로 옛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삼층석탑을 머리에 인 네 마리 사자 우리는 화엄사를 참배할 때면 일주문과 인왕문 그리고 천왕문은 그냥 지나치고 만세루와 오층탑과 대웅전 각황전은 얼핏 눈길만 주고 곧바로 사자탑이 있는 효대로 올라간다. 화엄사에서 가장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사자탑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 탑은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특이한 형태의 탑으로 손꼽힌다.현재 화엄사 가람 중심에서 볼 때 서북족의 높은 대지에 석등 한 기와 함께 건립되었다. 이 곳이 “효대孝臺”라고 불리는 것은 대각 국사 의천이 읊은 시 때문이다. 높이는 6.7미터에 달하며 국보 제 3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이층 기단 위에 삼층탑신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놓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나 상층 기단에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이색적인 모습이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각지고 둘글며 또 각지는 순서로 높직한 삼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하층 기단을 받치고 면마다 큼직한 안상을 세 구씩 새기고 그 안에 천인상을 일 좌씩 십이 구를 돌출하였다. 보관과 영락으로 몸체를 장식하고 천의를 공중에 휘날리며 모두 앉은 법석과 지물은 다르다. 어떤 좌상은 악기를 들어 연주하고 또는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는가 하면 어떤 천인은 꽃을 바치는 공양상 모습이다. 이 여러 천인상들이 모두 불천을 찬미하고 있는 자세로 보인다. 상층기단은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 싸의 사자를 한 마리씩 기둥을 삼아 네 모서리에 배치하고 그 중앙에는 연화대 위에 합장한 승려가 손에 연꽃 봉우리를 든 채로 서있다. 승려상의 머리 위에 돌출된 연꽃 무늬는 통일 신라 전성기의 양식이다. 초층 옥신석 네 면에 문비를 마련하고 그 좌우로 여러 가지 존상을 조각하였다. 곧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그리고 뒷면에는 보살상을 돌출시켜 장엄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이 얇고 네 귀의 들린 맛이 예리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통일 신라 시대 전성기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탑은 두 세 차례의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고 그 위로는 고려 이후에 보수한 부재로 생각되며 옥개석 여기저기에 파손된 흔적도 보인다. 이것은 주변의 석축들에서 예 기단 석재들이 보이는 점과 동시에 오층석탑도 옥개석이 보수한 부재이기 때문이다. 이 석탑의 건립 연대는 각 부의 조가 수법이나 건조 양식으로 보아 앞의 석등과 함께 통일 신라 전성기인 팔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지금 하층기단 일부가 벌어져 위태로우나 ⌜조선고적도보⌟(1920-1930년대 촬영)의 사진에서도 이 정도의 틈이 벌어져 있어 진행되는 균열은 아니듯 싶다. 이 석탑의 맞은편에는 석탑과 한짝으로 보이는 석등이 자리한다. 길쭉한 네모의 배례석도 놓았고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 안에 한쪽 무릎은 꿇고 다른 한쪽 무릎은 세운 승려상을 배치하였다. 이 승려상은 손바닥으로 무엇을 받쳤는데 다도를 하시는 분들은 다완다완이라고도 하나 자세히 보면 안쪽은 둥그렇게 닳았고 바깥은 문양 같은 줄이 나 있어 넓은 굽 청자 완과는 그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절에서 말하기를 상층 기단의 기둥 구실을 하는 네 마리의 사자는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그 중앙에 인물상은 연기 조사의 어머니라 하며, 그 아래 석등을 이고 끓어앉아 차그릇을 들고 공양 올리는 모습의 승려상은 연기조사라 부른다. 비록 전설에는 어머니로 되어 있으나, 사경의 원문에 비추어 아버지의 평소 소원을 위해 사경하고 석탑에 봉안한 것으로 볼 때 이 석탑의 승려상이 과연 어머니상일까?옷 주름의 유려한 맛에서는 여성적인 면모도 없니 않으나 딱 벌어진 어깨와 투박한 얼굴 모습은 가히 남성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