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윤리 우리 사회는 갑술년 한해에 워낙 커다란 사건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해인 지난해에는 열차 사고를 비롯하여 여객기, 여객선 사고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데, 올해도 역시 그러한 ‘인재’가 거듭 되풀이 되어 일어났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다리 붕괴 사고가 일어났고 유람선이 불에 타 고귀한 생명이 졸지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올해 국민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한 사건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저버리는 ‘패륜적 범죄’였다.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살인 조직을 구성한 지존파 사건이나 자신의 나이만큼 살인을 하려했다는 택시 기사 사건 등 참으로 가공할 일이 현실에서 있었다. 이런 끔직한 사건이 터지자 너 나 없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사회의 윤리 의식에 대한 문제를 주요한 과제로 지목하였다. 사회 문제 전문가들은 물론 이고 각 언론마다 특집으로 반인륜적 사건을 다루면서 하나같이 큰 비중을 둔 대안으로 윤리 교육의 올바른 정립을 들었다. 물질의 풍요와는 역비례로 황폐해져 가는 윤리의 빈곤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공황이 어느덧 불교계에도 횡행하고 있음이다. 불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는 기본적으로 불법승 삼보에 대한 지극하면서도 의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실천으로 보이신 행동과 말씀으로 남기신 가르침에 대해 궁구하되 그 근본에 대해 추호의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그와 함께 승가에 대한 공경이 있어야 하며 이교도나 반불교적 침탈에는 정법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 불교계에 언젠가부터 삼보에 대한 공경이 희박해지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저마다의 다른 의식으로 교단의 질서를 교란하고 있음은 매우 통탄할 일이다. 특히나 최근에 와서는 승가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가 대중 사이에 잦아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이다. 사회의 도덕성 타락만큼이나 교계 내의 신심身心 퇴락은 종단의 통합과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몇 가지 사례 지난 시월 삼십일일 종립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술에 취한 채 학교 안에서 불상에 불경스러운 짓을 했고 이를 말리던 스님 교수를 집단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 사회적으로 윤리 교육에 대한 문제 제기가 높던 때라 언론마다 대서특필하여 종립학교의 인성 교육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사건의 속내가 과연 언론이 보도처럼 종립 학교의 교육 실태가 그렇듯 엉망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삼보에 대한 공경심이 우려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경책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계에 알려진 또 하나의 예로는 삼보 공경 가운데에서도 스님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불련 법회 의식의 삼귀의례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의적 해석으로 승가의 권위를 손상하는 일이다. 물론 스님들을 승가라 함이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는 속뜻은 스님들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승가 공동체에 대한 귀의를 뜻하는 것이고 좀더 솔직한 표현은 사부 대중으로 구성된 승가 공동체에 대한 귀의를 뜻하는 것이고 좀더 솔직한 표현은 사부 대중으로 구성된 승가 공동체에 대한 귀의를 지칭하는 것일 게다. 곧 삼귀의례를 자의적으로 고쳐 승가로 부르는 저의는 스님들이 귀의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종단을 지도하는 위치보다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재가자와 함께 수행하고 불법을 닦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분명 정법안장의 계율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제멋대로의 해석과 적용이 아닐 수 없다. 종단의 상징이며 대중의 정신적 지도자인 종정 스님이 지난 시월 육일 조계종 개혁회의 주관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열린 개혁 불사 보고 법회에 참여한 대중일동(이들 가운데에는 일간지 기자도 상당수 있었다 한다)에게도 “아무리 큰스님일지라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삼배를 하는 것은 불경이나 불교의 전통 의례 등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며 부처님에 대한 예배 외에는 일 배만 하라고 하였다. 아울러 “개혁은 종헌과 종법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란 일로 보이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종정스님의 말씀은 곧바로 교계 안팎에 보도되었고 법보신문은 모신문사 논설위원인 공종원 선생의 시평까지 실어 대중에게 전해졌다.
“절은 받기만 하고 응대가 없는 것은 결코 예禮라고 할 수 없다. 모욕을 당한 꼴이라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어린 스님에게 구태어 삼배를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더 가관인 것은 참배를 받는 스님이 그걸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절을 받고 마는 것이다.” 따위가 공선생의 지적이다. 자타가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러한 재가 불자들의 수행자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라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깊은 숲 속에서 자기의 삶을 털어 내는 인고의 수행자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도심에서 포교하는 스님 그리고 묵묵히 종단의 지원도 없이 사회 복지에 열정을 쏟는 재가자들의 정서와도 대치되는 언행이다.
종정 스님들의 참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자칫 이 말씀이 그렇잖아도 재가자 사이에 만연하고 있는 승가에 대한 폄훼를 더욱 조장할 우려가 있다. 삼배는 특정한 스님 개인에 대한 예의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삼보에 대한 귀의심의 발로이며 여기서 승가는 분명 재가 신도가 귀의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출가 수행자, 곧 스님인 것이다. 모든 경전이 이를 가르치고 있으며 서분 율 에도 이 점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으므로 만일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함은 마치 이교도가 부처님에 대한 공경에 대해 ‘우상숭배’운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올바른 풍토의 조성
우리 종단에 알게 모르게 번지고 있는 삼보에 대한 공경. 그 가운데에서도 승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데에는 출가 수행자 스스로 언행을 진중하게 하지 못한 탓도 있다. 이를테면 대중들 앞에서 법문이나 혹은 축사 따위를 할 때 “중노릇”이라는 표현이나 “절밥을 먹는 사는 처지”라는 말을 함으로써 겸손의 차원을 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분명히 종단의 지침으로 정해진 복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지 않고 저마다 다른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도 사소한 일일지 모르나 그것 역시 승단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다.
예전과 같지 않아서 재가 신도들의 경전과 습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당히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불교방송의 신앙상담 시간인 ‘자비의 전화’에 문의하는 불자들의 많은 수는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시간 경전을 공부하고 있으며 기도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냥 무작정 외우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구절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열의가 높고 심지어 한글로 해석된 부분에서 잘못된 해석을 꼬집는 경우도 많다가 한다. 교계 언론 매체의 양적인 증대로 말미암아 대중이 교리나 신행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와 같이 대중의 인식이 변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처럼 승가가 결코 권위주의 적인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수행자의 본분 사를 충실히 실천하여 재가 신도들이 모든 면에서 공경하도록 정진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도리이다.
아울러 재가자들이 일부스님들의 잘못된 언행을 빗대어 승보에 대한 공경심을 훼하는 일 역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사회의 정치 경제적 구조가 변화하였다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지켜온 전통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리하게 바꾸려는 자세는 바른 신행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교단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이 법도와 제도는 사회가 혼란할수록 더욱 잘 지켜야 할 지고의 도덕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지금의 우리 사회의 타락을 맞아 정신적 지도의 대안으로 제기되는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종단 개혁 과정에서 재가자들은 자신들의 종단 운영참여 문제가 ‘개혁’의 중심 과제라고 제기했으나, 불조의 말씀을 바로 지키는 계율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분명 그릇된 문제의식이다. 재가자의 종단 운영 참여를 제기하기 이전에 우리 교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삼보 공경의 마음 자세부터 확고하게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기본을 떠난 문제 인식으로 인해 승보에 대한 소홀함이 있었다면 지금이라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다사 다나 했던 한해를 보내고 이제 해방 오십년, 분단 오십년이 되는 새해를 맞는다.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사호의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하듯이 이 사회를 밝히는 정법의 심부름꾼이 되려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윤리부터 지켜 가는 풍토가 정착되도록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