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짐승
개과에서 가장 야생 동물인 이리는 일본에서는 이미 멸종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이리를 모르는 어린이가 없는 것은 우의가 깃들인 만화나 동화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주로 브리카라는 산스크리트어 이름으로 알려진 맹수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에도 “암컷 이리를 멀리하라, 암컷 이리를, 도둑을 멀리하라, 밤의 여신이여. 그리고서 우리를 위하여 쉽게 넘어가다오” 하는 이야기가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이리는 사람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여 꺼리는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 같다.
현대 언어 학자들을 경탄시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법서로 빠니니가 쓴「팔장편八章篇」의 2, 1, 37에는 공포라는 낱말에 의한 복합어의 조어법에 대해 규정한 것이 있다. 권위있는 주석가 바탄자리가 「육주해서六注解書」의 맨앞에 “이리에 대한 공포(vrka-bhaya)라는 복합어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보아도, 이리가 옛날 인도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증명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무서움을 주는 이리가 소, 말, 양, 산양 따위의 가축들도 떨게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리에 대한 연민의 동정과 예나제나 유행하는 에코러지를 굳이 말할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리는 사람에게도 무서운 존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시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사정을「야타르바 베다」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원“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숲 속의 야수가 사람이 무서워 떠는 것처럼 정말이지 그대는 싸움터의 큰북, 적을향해 울리거라. 두려움에 빠지게 하든지 저들의 생각을 어지럽게 하라. 산양과 양이 아주 두려워하고 이리에게서 달아나는 것처럼 정말이지 이렇게 그대는 싸움터의 큰북이어라. 적을 향해 울려라. 공포에 빠지게 하든지, 저들의 생각을 어지럽게 하라.”
쓰지 나오시로 옮김
또 홉스의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이다”고 잠언을 곰곰히 생각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 몸이 죽어 자빠지면, 붓고 검푸르게 되어 묘지에 버려서 친족도 돌보지 않는다. 개나 여우나 이리나 벌레가 이것을 먹고, 까마귀나 독수리나 그 밖의 것들이 이것은 쫀다.”(숫다니파다, 나까무라 하지메 번역「붓다의 말씀」)등과 닮은 기술이 문헌 가운데에 여기 저기 보인다. 같은 맹수인 사자나 호랑이와는 달리 이리만이 옛부터 철저히 악역을 맡아온 것은 왜일까. 인도에서는 “사자 사람” 또는 “호랑이 사람” 이라는 말이 있어 용맹스럽고 과감하고 잘생긴 영웅을 부를 때 쓰곤 한다. 곧 “사자 같은 사람” “호랑이 같은 사람” 이라는 말이다. 그에 견주어 이리는 풍채도 없고 존경심도 들지 않기 때문일까. 이리는 역시 캄캄한 어둠에 어울린다. 게다가 다음에 쓴 것처럼 그 성질도 탐탁치 못하다고 한다면, 그 이상 무얼 말하겠는가. 이리에게는 좋은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하다.
“쁘라라바즈여, 죽지 말지어다. 떠나지 말지어다. 불길한 이리로 하여금 그대를 먹지 못하게 하라. 여자와의 우정은 있을 수 없다. 그 마음은 승냥이와 다를 게 없다.”
쯔지 나오시로 옮김「리그베다」
여기서 승냥이라는 것은 사라브라카로 이리의 한 종류이다. 게다가 이 한 구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 고전에 여자를 가볍게 보는 가장 초기의 뚜렸한 견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자의 마음씨와 같은 것으로 그려 놓은 이리의 ‘마음 변함’을 더욱 멋지게 살려 놓은 것이「쟈카타」300의 ‘이리의 전생 이야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율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고행을 시작했는데, 외도의 말에 넘어가 빨리 계율을 버린 수행승들을 표현하기를 “... 이 수행승들이 계율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실천하는 것은 이리들이 포살(uposatha)하는 것처럼 길게 가지는 못하리라” 하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제석이던 과거세에 이리의 포살인 단식행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다른 생명을 죽여 생고기와 피를 먹는 이리가 계율 지키기로 서원을 세워 포살하기로 마음 먹었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알고 양의 모습을 하고 다가갔다. 피를 마시는 자는 고행을 버리는 것이 되어 고행을 깨고 만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결심이 야무지지 못하고 쉽게 변절한다. 이리가 양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마에다 전가쿠 옮김
이리가 없어진 우리의 현 사회에서도 이런 이리와 “바래다 준다면서 응큼한 마음을 먹는 이리”라든지, “몰래 숨었다가 덮치는 이리” 등 신종 이리가 쓸어 버릴 만큼 많다. 영화나 픽션의 세계에서는 조금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이리도 있지만, 그러나 “어차피 이리는 이리” 라는 것으로 “이리여 잘가” 라고 말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