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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달마산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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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4년 09월 151호
우리나라 절 가운데에서 가장 절집다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우리는 승주 조계산 선암사라 답하길 주저하지 않고,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정이 들고 애착이 가는 절집을 소개해 달라면 땅끝과 달마산 자락에 자리한 미황사를 한 번 들러 보길 권한다. 이름난 절 아랫동네의 시장 바닥 같은 번잡스러움에 정이 가지 않고 보탬도 되지 않았던 분들은 달마산 미황사를 찾으십시오. 운무에 가린 달마산의 모습은 가히 신선의 경지인 듯 하고 아얀 눈에 덮인 산사의 겨울 풍경은 세상의 번뇌를 씻어 주는 피안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에서부터 내리 달려온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용틀임을 한 뒤 지리산을 정점으로 그 기운을 다할 때 그래도 다 말못한 사연 있는지 그 한 자락을 내어 무등산과 월출산을 지나 땅끝 부근에 와서 만덕산, 두륜산, 달마산, 사자봉 같은 명산을 다듬었다. 월출산이 금강산의 축소판이라면 달마산은 금강산의 한 봉우리를 따로 떼어 내어 땅 끝에 옮겨 놓은 듯 절묘하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집이다. 몇 해 전 만해도 비포장도로가 많은 탓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그야말로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고고한 자태를 물씬 풍기고 여행에 지친 나그네를 반기는 인심 푸진 곳이었다. 지금은 땅끝 관광권의 개발사업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포장되어 편리함을 주는 만큼 옛정취도 사라지고 절집도 여기저기를 손봐 안타깝기만 하다. 대흥사를 답사하고 해남읍을 지나 완도로 빠지는 길을 타고 가다가 월송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드는 길과 강진읍에서 백련사와 다산초당에 들렀다가 북평면 남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해남읍 쪽으로 조금만 가면 월송에서 왼편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도 있다. 월송에서 미황사까지는 승용차로 십여 분 쯤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다.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불적이 직접 전해졌다는 창건 실화
미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로 의조義照 화상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팔년(749)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사적비에 적혀있으나 이를 고증할 만한 아무런 유물들도 남아 있지 않고 의조 화상이라는 인물의 행적도 알 수 없다. 더욱이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들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692년(숙종 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ꡐ미황사 사적비ꡑ에 자못 신비롭게도 불적이 바닷가에 닿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적혀 있어 참고가 될 뿐이다. ꡒ때는 신라 삼십오대 경덕왕 팔년(749) 팔월에 사자포 앞바다에 한 척의 돌배가 홀연히 나타났다. 배에서 아름다운 범패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이 오기를 며칠 동안 계속하였다. 의조 화상이 두 사미승과 향도 백여 명을 데리고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뱃사공과 금함 그리고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을 열어 보니 금물로 쓴 화엄경, 팔십 묶음의 법화경, 일곱 묶음의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사십성중, 오십삼선지식, 십육나한, 탱화 따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것을 내려 임시로 봉안하고 검은 바위를 깨뜨리자 검은 소 한 마리가 뛰쳐 나오더니 삽시간에 큰 소가 되었다. 이 날 밤 의조 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ꡐ나는 우전국(인도)의 국왕인데, 이 곳 산세가 일만불을 모실 만하다 하여 인연의 땅으로 삼았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우라ꡑ고 일렀다. 다음날 스님이 그 말대로 했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 이르러 한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한참 가다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 화상은 처음 소가 넘어졌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다음 넘어진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美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黃자를 택해 지었다고 한다.ꡓ사찰 창건 설화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미황사의 창건 설화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의조 화상의 행적도 분명치 않고 당나라 개원 삼십년 을축이 신라 경덕왕 팔년이라는 것도 고증하기 어려웠으며 더구나 구 세기의 불적 전래를 입증할 만한 아무런 유형의 문화 유산이 현재 미황사에 남아 있지 않아서 더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창건 설화의 일반적인 속성상 사찰의 역사를 오래된 이야기로 꾸미려 하고 그 내용 가운데 신비롭게 미화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경전이나 불상, 탱화들을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미 알려진 사 세기 말경에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북방전래설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일연스님조차도「삼국유사」탑상 금관성의 파사석탑조에서 파사석탑을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타 국에서 배를 싣고 온 것이라고「가락국본기」를 인용하면서 기록하듯이 한반도의 지형적인 여건상 북방의 육로만 불교가 전해졌을 거라는 통설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어왔다. 이렇듯 미황사의 창건 설화는 불적이 해류를 따라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왔다는 불적도해 설화佛蹟渡海 說話 가운데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된 유형으로 주목된다. 불적이 전개된 유형으로 주목된다. 불적이 바다를 건너 일정한 지점에 도착하면서 절이 창건된 이야기는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불적도해 설화는 미황사를 비롯해서 황룡사 장육상, 진불암, 백율사 중수기, 심복사, 보문사, 목우암, 오대산 문수암 석탑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황사는 불적도해 설화 가운데에서도 인도에서 직접 불적을 전해 주는 유형에 속해 우리나라 불교의 일부분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말해 주는 창건 설화를 간직한 보물같은 절이다. 사적비명을 지은 민암은 1692년에도 ꡒ돌소와 금사람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로는 의심이 갈 만하나 연대를 따져 고증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성상등이 완연히 있다ꡓ고 확신에 찬 기록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미황사 아랫마을을 불경을 지고 쓰러졌던 소를 묻었다고 하여 우분동牛墳洞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창건 설화를 증명해 줄 그 어떤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창건 설화를 설명해 주는 쾌불과 부도에 새겨진 거북과 바닷게를 비롯한 여러 바다 생물들을 보면 미황사가 바닷가와의 어떤 인연을 말하려는 듯하다.
미황사의 중창
고증할 길이 없는 미황사의 창건기에 대한 검토는 여기서 그만두고 중창에 관련된 내용을 더듬어 보자. 미황사는 전라도 사찰들이 그러하듯이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왜적의 방화로 불에 타자 1598년에 만선이 중건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성간이 3창하였으며, 여고女古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 들어서는 응진전을 1971년에 주지 이하덕이 일부 수리하였고 1982년에 대웅전과 응진당 등의 보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나한전(응진당)은 건륭 십육년(1751) 3월 26일에, 대웅전과 응진당은 모두 십팔 세기 중기에 건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황사의 폐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정리 발말수가 고조 할아버지 형제 가운데에 미황사에 출가한 스님이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 때를 백오십 년 전쯤으로 어림잡는다. 당시 이 곳 치소 마을 출신의 혼호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절에는 사십여 명의 스님들이 있었다. 그 때 더 큰 중창 불사를 위해 스님들이 궁고(군고軍鼓)를 차려 해안 지방을 돌면서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군고는 해남 지방의 농약을 이르는 말로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전투를 하기 전에 진을 치고 사기를 높이려고 하던 군악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 미황사 스님들이 열두 채 가락으로 정리하여 남사당패들처럼 순회 공연을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루는 설쇠를 맡은 스님이 어여뿐 여인이 유혹하는 꿈을 꾸고 불길하니 공연을 쉬자고 하였으나 주지스님이 강행을 하였고 완도, 청산도로 공연을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여 떼죽음을 당하였고 늙은 스님 몇 분만이 남아 군고를 차릴 때 투자한 부채더미만 남아 절은 일시에 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부도밭에 십팔 세기 중반을 넘는 부도와 탑비가 발견되지 않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며 산정이 마을에 군고 진법에 쓰던 깃발에 삿갓을 쓴 스님이 바다 거북이 등에 올라탄 모습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대웅전 초석에 바닷게를 새겨
미황사 앞마당에서 대웅전과 달마산을 한꺼번에 바라다보면 어찌 그리도 중심 법당이 달마산의 산 모양을 거스르지 않고서 꼭 안기고, 팔작지붕은 막 하늘을 날으려는 학의 날개짓처럼 경쾌한지 절 뒷편의 동백나무 숲과 어울린 절집의 모습을 보면 건축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요사이 사용할 때보다 비어있을 때가 많은 건물을 왜 굳이 크게만 지으려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대웅전 마당 축대 아래에는 당시 건물들이 들어섰던 곳임을 알려 주는 많은 초석들이 흩어져 있다. 초석들의 배열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면 한 칸의 문과 정면 아홉 칸 측면 두 칸의 만세루터의 초석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보물 947호로 지정되었다. 막돌로 허튼층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바닷게나 거북이를 새긴 연화문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을 한 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과 주두를 놓아 공포를 짜얹었다. 1983년 대웅전을 수리할 때 상량에서 발견된 묵서에도 1754년에 증수한 사실이 밝혀있다. 법당 뒷편에 법당중수상량문이 묵서로 된 상량목이 있다. 1982년 대웅전 복원 공사시에 썩어 새로운 상량목으로 교체한 것이다. 1754년에 소응천이 지은 이 상량문은 원형통나무의 한쪽을 편평하게 깎은 것인데, 미황사 사적비(1692)가 건립된 육십이 년 뒤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미황사 중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창건 설화를 새긴 괘불
대웅전의 오른편 측면벽 뒤쪽에 괘불이 들고 날 수 있도록 문이 마련되었고 후불벽 뒤편 괘불함 속에 괘불이 들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이 괘불을 걸기 위한 괘불지주가 땅에 박혀 있다. 괘불 지주의 크기는 높이 백사십 센티미터, 너비 사십오 센티미터, 두께 이십삼 센티미터, 구멍 지름 팔 센티미터, 괘불지주 간격 삼백삼십 센티미터이다. 괘불지주의 윗면이 한쪽은 사각이고, 다른 한쪽은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어 적어도 같은 시기의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절 입구 길가에 정랑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의 윗면이 둥그런 모습이고 한짝의 상단부가 깨져 있어 둥그런 것이 파손되자 사각진 것을 후대에 만들어 새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괘불의 크기는 가로 사백사십삼 센티미터, 세로 천육십오 센티미터로 법당 앞의 괘불지주에 세울 수 있는 규모이다. 이 괘불은 이십삼 년 전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기우제를 지내는 도중에 비가 와서 배접과 삼베가 떨어졌다. 다행히 괘불 채색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작년에 주지 현공스님은 손상된 괘불의 배접 불사를 마치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삼베 바탕에 비단으로 채색한 이 괘불은 독존도 형식으로 상호 좌우에 합장한 세 분의 부처님이 앉아 있고 무릎 좌우에는 향로를 든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상은 사적기의 설화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기에 따르면 옹정 오년(영조 3, 1727)에 괘불탱을 조서하여 미황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증사는 옥내玉內 비구이고 화사畵師는 탁행琢行, 설심雪心, 희심喜心, 임한任閑, 민휘敏輝, 취상就詳, 명현明現 비구이다. 대웅전과 응진당에는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십팔 세기 중반 경의 벽화가 보기 좋게 탈색된 상태로 남아있다. 대웅전에는 천장화는 물론 많은 부처님을 그린 그림 등이 천장이나 벽면에, 응진당에는 먹으로 그린 나한도가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부도밭
미황사에는 두 지역에 부도밭이 나뉘어져 있다. 남부도밭에는 부도 스물한 기, 서부도밭에는 여섯 기, 입구에는 한 기가 남아 있어 부도는 모두 스물여덟 기이며 탑비는 여섯 기이다. 대웅전에서 남쪽으로 약 오백 미터쯤 오솔길을 따라가면 사적비와 통교사터라고 하는 옛 절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산길을 따라 몇 발자국 더 가면 한 무더기의 부도밭이 있다. 만든 연대는 모두 조선후기로 18~19세기에 해당된다. 부도의 주인은 연담당, 벽하당, 설봉당, 정연당, 미봉당, 완해당, 정암당, 송암당, 영월당(1808), 오봉당(1778), 소월당, 백월당(1842), 죽암당(1821), 붕명당, 사봉당, 응0당, 00당, 응화탑, 담허당, 영허당, 이봉당이다. 미황사 남부도군에서 서쪽으로 약이백 미터쯤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가로 이십 미터, 세로 십 미터의 부도전이 나온다. 여기에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부도 여섯 기가 있다. 부도의 주인은 원0당, 창암당, 고압당, 감파당(1737년에 건립. 1768년에 복원), 천연당, 은곡당이다.
또 하나의 부도는 절 입구 주차장 부근에 본디 두 기가 있었으나 한 기는 도난당하였다. 미황사에는 모두 여섯 기의 탑비가 있는데 이중 사적비는 남부도밭을 향해 약 오백 미터쯤 가면 통교사 옛 터 축대밑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나머지 다섯 기의 탑비는 남부도밭 주변에 있으며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탑비의 이름은 벽하대사사리탑비(1764), 설봉당대사비(1739), 송파대사비(1764), 낭암대사비, 금하대선사비(1764)이다. 특히 미황사사적비는 높이 삼 미터 오십 센티미터로 자연석 비좌에 비신과 용잉 반결하는 옥개석을 갖추었다. 비 앞면 상당에 ‘미황사비명美黃寺碑名’이라 전액하고 측면으로 ‘유명조선국전라도영암군달마산미황사사적비명병서’란 제목을 썼다. 건립연대는 ‘승정기원후 65년 임신 9월 일입’이란 명문으로 보아 1692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미황사에는 이 밖에도 괘불지주 한쌍, 석조 세 개, 맷돌 등이 옛 절터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므로 더욱 정밀한 지표조사가 요망된다.

달마산 금샘의 신비
요즈음 미황사는 달마산 금샘을 보려는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달마산 금샘은 달마산 팔부 능선쯤의 암반에서 솟아나는 석간수인데 햇빛이 물표면에 반사되면 물은 황금빛으로 변한다고 하여 신비스러운 금샘으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모양이다. 정확한 성분 분석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물 표면에 떠 있는 황금빛 물질은 표주박으로 물을 뜨려고 하면 샘 가장자리로 퍼져 버려 금샘 주변 암석이 유황 성분을 함유하여 이러한 현상을 유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 육지의 맨 끝에 이런 조화를 부려 놓았나. 바다를 통해서 부처님의 인연을 전해 받았던 사실을 웅변하려는 듯 이런 땅끝 구석진 곳에 부처님의 도량을 베풀었는가? 때로는 바닷가에 인접한 탓으로 왜난의 병화를 입기도 하고 중창 불사의 재원을 마련하려다 해상 사고를 당하여 거주하던 승려 태반이 수장되는 그런 참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금샘의 신비에 현혹되지 않고 달마산에 오르거나 대웅전 지붕과 달마산 능선을 한꺼번에 바라본다면, 괘불님을 펼쳐 보거나 옛 절터 주변의 부도나 탑비밭에 귀를 기울이면 범패가락인지 군고 치는 소리인지 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