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주인 혜암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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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09월 151호
내가 혜암 큰스님의 법호를 처음 들은 것은 범어사 강원(승가대학)에 있을 때였다. 갓 스님이 되어 학인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지대방 같은 곳에 앉으면 으레 어느 스님이 제일 큰스님이다. 어느 스님이 도가 더 높다고 하더라. 하는 것을 화제로 오르내렸다. 그 때 우리 학인 가운데 혜암스님의 시봉되는 스님이 있었는데 곧잘 혜암스님을 자랑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혜암스님은 한국 불교 수좌계의 대표라고 했다. 오직 일생을 바랑 하나로 운수객으로만 살아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선원 수좌는 으레 체격이 우람하고 떨어진 누더기를 걸쳤으며, 법거량을 할 때는 비록 조실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할을 하고 주장자를 내려치며 멱살을 잡고ꡒ한소식 일러 보시오ꡓ하는 활달자제한 영웅호걸들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행자 시절부터 스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모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무애행이며 무용담 같은 법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뒤에 해인사에서 처음 만나 뵙게 된 혜암스님은 그 동안 내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먼저 얼굴이 우락부락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체격이 우람하게 큰 장수형도 아니었다. 당시 스님은 세납이 오십대였는데 눈빛이 유난히도 맑고 피부도 어린아이처럼 깨끗했다. 오랫동안의 일종식(하루 한 끼 식사만을 하는 것)으로 몸은 살점 하나 없이 깡말라 있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스님을 모시고 해인사 조사전에서 여름 한거를 하게 되었다. 역시 한국 수좌계의 대표되시는 큰스님이라 모시고 사부 대중이 모두 좋아했다.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 그 무렵 해인사는 선원이 선열당과 퇴설당 그리고 조사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진도 선열당은 보통 정진, 퇴설당은 가행정진 그리고 조사전은 용맹정진으로 나뉘었다. 조사전은 방도 선열당이나 퇴설당에 비하여 작다. 그래서 대중은 열 명 안쪽인 일곱 여덟 명이었다. 용맹정진이란 하루 스물 네 시간 잠을 자지도 자리에 눕지도 않고 정진만 하는 것을 말한다. 큰스님은 일생을 그렇게 장좌불와로 용맹정진 하듯이 살아오셨지만 우리들이야 어디 그런가. 날마다 몰려오는 잠과 싸워야 한다. 사람이 잠을 못자면 신경이 날카로운 창날처럼 살아난다. 밀려오는 잠 속에서 장군죽비가 어깨 위로 날아오면 머리 끝까지 신경이 살아나고 마른 땀이 나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른바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장군죽비로 때리는 사람이 큰스님인 것을. 참선하는 스님들은 참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칼날 같기만 한 예리한 신경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해 여름 큰스님 덕에 아홉 안거를 무사히 용맹정진으로 마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유독 큰스님을 늘 존경하는 것도 그 때의 은덕 때문이다. 물론 그 때도 위태위태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한번은 한 스님이 그만 큰스님의 장국죽비를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왔다. 밤 두 시쯤이나 되어서일 것이다. 예의 큰스님의 장군죽비가 깜박 졸고 있는 그 스님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 스님이 소리를 치면서 큰스님께 항의를 했다.ꡒ스님, 해도 너무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조금도 안 졸 수가 있습니까. 어지간 한 것은 슬쩍 봐주시는 요령도 있으셔야지요.ꡓ옆에서 보고 있던 우리는 마음으로는 은근히 그 스님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은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더욱 장군죽비로 그 스님을 내려치려고 하자 그 스님은 앉아서 맞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해서 도망을 가면서 항의를 했다. 갑자기 조용하던 방안에 쫓고 쫓기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몇 바퀴 방안을 돌고 나서 큰스님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아주 간절한 마음의 법문을 하셨다. 오래 되어 다 잊었지만 그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ꡒ너희가 누구냐,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대장부 중의 대장부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가 이 정도의 힘든 고비를 못 넘긴대서야 될 일이냐. 용광로에서 더욱 세게 단련된 쇠라야 금강보검이 되는 것이다. 너희를 부처님으로 만들려고 이렇게 단련하는 것이다. 알았느냐.ꡓ가까이서 모셔 보면 큰스님은 그렇게 소탈하고 천진하실 수 가 없다. 그리고 일을 당하면 당차고 당당하게 행동하심은 출격장부의 기상 그것이다. 선객이란 생사를 초탈하자는 것인데 무엇에 걸릴 것이 있어서 당당하고 용맹 있게 하지 못할 것이냐는 것이 평소 큰스님의 말씀이다.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난하고 어렵던 옛 시절 스님들이 고생하면서 공부하고 정진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 공부에 대한 용맹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옛날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겨울을 나며 김치를 금치라고 했다고 한다. 겨울 내내 김치 하나로 공양을 하는데 대중이 김치를 많이 먹으면 헤퍼진다고 아예 소금에다가 저리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암 노스님은 밤에 대중들 모르게 김치독으로 가 이렇게 짜게 담은 김치에다가 소금 한 바가지씩을 더 갖다 붓었다고 하니 그 김치의 짜기가 짐작도 안 간다. 김치 맛이 짜다 못해서 아예 쓰다고 한다. 그런 김치 한 쪽이면 밥을 세숫가락은 먹는데 그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불평 한마디 할 줄을 몰랐다고 한다. 큰스님의 법력은 무엇보다 이번 삼월 구종법회를 계기로 법난중에 잘 나투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범종추의 구종법회가 혜암 노스님의 명철한 혜안과 법력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눈앞에 아찔해진다. 나는 당시 구종법회를 이끌어온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혁회의를 출범시킨 제일의 공로는 혜암 해인총림 방장 스님의 몫으로 역사에 기록하고자 한다. 당시 구종법회 참여 대중은 모두 나의 이런 생각에 동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대각사에서 있었던 사월 오일의 원로회의를 주도하시던 혜암스님, 당시 범종추들은 혹시나 원로 스님들이 젊은 사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시지나 않을까 가슴을 조렸다. 원로 스님들은 우리들의 뜻을 만장일치로 받아 주셨다. 원로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서원장 측에서는 서암 종정스님의 이름을 빌려 사월 십일 승려대회를 무산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혜암스님은 우리들보다 더욱 강경한 의지로 기자 회견을 하시고 승려대회 절대 불변과 강력 추진을 천명하셨다. 이런 일련의 큰일보다 더욱 우리를 감동시키고 종단을 구하신 것은 사월 십일 승려대회 이후 법난을 겪으면서이다. 그 날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총무원 청사의 무지막지한 철문을 열자 당당하게 앞장서서 청사 안으로 들어가신 분이 원로의원 큰스님들과 의장 혜암 큰스님이다. 그 날 사월 십일 법난은 앞으로 우리 종단의 기념일로 제정해야 할 날이기도 하지만. 노스님에게 며칠동안 말할수 없는 고생을 안겨 준 날이다. 수천 명의 전투경찰이 청사를 에워싸고 있어 완전 고립되어 감옥이나 진배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순간에도 청사 오층에는 서원장 측의 인사들이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이틀인가 지내자 그 동안 단식을 선언하고 완강하게 버티던 혜암 노스님이 탈진하여 병원으로 실려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노스님은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고 이내 청사 안으로 다시 올라오셨다. 죽어도 청사 안에서 죽고, 경찰에게 기어이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이 서신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이 가슴 조이며 안타까워했던 것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다. 드디어 경찰은 노스님의 완강한 결심 앞에 항복을 하고 물러나고야 말았다. 그래서 삼십일 범불교도 대회가 열리고 개혁회의 간판이 청사 앞에 걸리게 되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혜암 노스님은 개혁회의르 출범시키고 해인사로 내려가실 때 문경 봉암사를 들렀다고 한다. 평생 도반이고 선후배로 수행해 오신 두 분이 종단 문제로 잠시 견해가 달랐다고 해서 오랜 우정에 금이 가서야 되겠는가 하는 뜻이었으리라. 봉암사에 가셨을 때 이미 서암 노스님은 안계셨다. 그래서 혜암 노스님은 사중의 대중을 불러 모아 놓고 그 동안 구종법회 기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봉암사 대중들이 앞장서서 서암 노스님을 다시 산중 조실로 잘 모시도록 당부 하셨다고 한다. 우리 젊은 납자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큰스님은 살피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번 구종법회에 몸 고생과 아울러 마음 고생을 가장 많이 하신 분도 역시 노스님이다. 크게는 서암 스님과의 관계가 그렇고 안으로는 당신의 시봉인 도각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상처를 입은 것이 그렇다. 법을 바로 세움에는 사사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이 선사의 가풍이지만 노스님은 그 동안 육신의 피로함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아, 가야산 해인총림 방장이시며, 조계종 원로의장이시며, 우리 젊은 납자들의 의지처이신 큰스님, 마음으로 심심한 존경을 보내옵니다. 내내 법체 강형하시옵소서. 그리고 혼탁한 우리 종단의 희망이 되소서. 후학이 먼 곳에서 향 사루고 엎드려 아홉 번 절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