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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시가의 범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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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학 - 조기영 1994년 09월 151호
‘응법송리應法頌理’의 ‘송리시頌理詩’ 란「십이부경十二部經」에 나타난 게송偈頌의 두 가지 양식인 응송應頌, 중송重頌의 ‘기야祇夜’ 와 불응부중不應不中의 조송造頌, 조기송孤起頌의 ‘가타伽陀’ 가운데 ‘기야’에 속하는 유형으로서 불교 경전에 의거하여 그 법리를 거듭 강조하면서 노래한 형식의 시가라고 규정한 바 있다. 불교 경전의 끝이나 가운데에서 경전의 내용을 거듭하여 강조하면서 부른 노래가 ‘기야’인데 일반적으로 ‘기야’이든 ‘가타’이든 간에 ‘게송’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럼 게송은 어떤 형식의 노래인가. 물론 불가의 노래인 기야 또는 가타를 음역音譯하여 ‘게偈’라 한 것이고, ‘송頌’은 그 의미로서 한역漢譯한 것이다.
단지 그 음가音價와 의미를 음역하고 한역했기 때문에 불교의 게송은 ‘송頌’이 지니는 본디의 성격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디 ‘송頌’은「시경詩經」의 육의六義가운데 ‘풍아송風雅頌’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종묘의 악가樂歌를 지칭한다. <시경대서詩經大序>에 따르면 성덕盛德의 형용을 찬미하여 그 성공을 신명神明에게 알리는 것(美盛德之形容 以其成功 告於神明者)이라고 정의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0說」, 권10, <세병마사장洗兵馬四章>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소릉杜少陵의 <세병마편洗兵馬篇>은 바로 전공戰功을 찬송하여 지은 것이다. 여섯 운韻이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데 네 번 바뀌어서 한 편을 이루었다. 이러한 체는 이사李斯에서 비롯되었다.......생각해 보건대 송頌이란 반드시 관현管絃에 힘입어서 성악聲樂이 되는데 곧 그 마디와 박자의 적절함이 반드시 이와 같은 뒤라야 가능하게 될 뿐이다. <양보송梁父頌>, <지부송之不頌>, <동관송東觀頌>의 세 송은 모두 두 번 운이 바뀌어서 모두 12연이 되었으며, <낭야송廊耶頌>은 네 번 운이 바뀌었는데 앞서 18운은 음이 같고, 뒤의 18운은 세 번 바뀌어 36운이 되었다.

‘송’이라는 시체의 형식이 악기에 맞추어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운韻이 붙게 마련이지만 옛 노래를 상고해 보면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공적을 찬송讚頌하는 필요성에 의해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 자체가 그다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찬술하는 노래 내용의 전달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운이라고 하는 것은 가창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라서 그 노래마다 상이한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지나치게 이러한 형식에 구속되어 의미 전달레 장애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으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익의 설명이 송체頌體에 있어서 운마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노래로 불려지기 때문에 적절하게 운이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송체頌體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규정된 압운법押韻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게송에서는 이와 사정이 다르다. 다음은 「잡아함경雜阿含經」가운데 맨 처음으로 나오는 게송이다.

항상함이 없음과 괴로움과 공
내가 아님과 바른 생각과
알지 못하는 것의 네 가지와
물질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다.
無常及苦空
非我正思惟
無知等四種
及於色喜樂

위의 <잡아함 제1게(雜阿含第一偈)>는 그야말로 앞의 경전 내용을 요약하여 다시 설명한 기야로서 어떠한 운문적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송으로서 지녀야 할 가악의 요건인 운의 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 의미의 전달에 주력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볼 때 부처님의 설법이 구전되고 다시 한역되면서 본래 지니고 있던 운소韻素가 없어지고 그 의미만 남아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게송’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가명假名’이라고 했듯이 글자만 빌어 음역하고 한역한 것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송체가 지니는 본래의 형식과는 엄연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최행귀崔行歸가 균여均如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와 같이 모두 ‘가歌’라고 한 반면에 자신의 한역시를 모두 <예경제불송禮敬諸佛頌>과 같이 ‘송頌’이라고 한 점은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게송이 가창되는 노래라기보다는 효과적으로 불법을 전파하고 암송하기 위하여 단지 그 형식을 차용한 찬술讚述의 산문적 노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게’와 ‘송’을 기야와 가타의 음역 또는 한역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둘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으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를 구별하여 쓴 것으로 볼 때 전혀 의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야 형식을 취한 「잡아함경」의 게송에서는 “불설게언佛說偈言”과 같은 표현 뒤에 게송이 실려있어 ‘게’가 ‘언설言說’적인 성향이 강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가타 형식을 취한「중론송中論頌」에서는 “이차이게찬불以此二偈讚佛”이라고 하여 표현수단인 ‘게’와 표현 영역인 ‘찬불讚佛’의 구분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게’라는 언어적 표현 수단을 통하여 표현의 영역이자 목적인 ‘붓다를 찬송함’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나친 추론일 수도 있겠으나 ‘게’는 ‘언설’의 문장이고, ‘송’은 ‘가송’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송’은 본래의 송체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착된 게송에서 문학성을 찾는다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유의 법은 나름대로 실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불교문학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어차피 가명假名이라 하더라도 그 모두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라는 범주는 그 형태로나 의미로 볼 때 협소한 기반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게송 자체가 송체로서 지녀야 할 형식을 벗어났다고 해서 문학이 될 수 없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불교문학이 지니는 특수성과 고유성에 대해서는 이미 3장三藏과 12분교十二分敎에서 정리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기야의 작품을 바로 ‘응법송리應法頌理’의 ‘송리시頌理詩’ 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은「잡아함경」의 제308경<불염착경不染着經>에 실린 송리시이다. 이 게송의 제목은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세존이설게언世尊而說偈言>이라고 붙여 보았다.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접촉과 법의 여섯가지 경계에 한결같이 향하여 기쁨을 내고 애욕에 물들며 즐겨 집착한다. 모든 하늘 사람과 세상 사람이 오직 이것으로써 즐거움 삼아서
변하고 바뀌어 모두 없어질 때 저들은 곧 큰 괴로움을 낸단다. 오직 여러 현인과 성인이 있어 없어질 거라 보고 즐겁게 여긴다.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는 것들은 관찰하고서 다 원수같이 여긴다. 현인, 성인이 괴로움으로 보는 것 이 세상에서는 즐거움으로 여기고 이 세상에서 괴롭게 여기는 것을 성인에게는 곧 즐거움이 된단다. 매우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법에 이 세상 사람들은 의혹심을 내고 큰 어두움 속에 아득히 빠져들어 눈 멀고 깜깜하여 보는 것이 없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 어둠을 헤치고 큰 밝음을 열었다. 이와 같이 매우 깊은 글귀를 성인이 아니면 그 누가 알겠는가. 다시 오욕의 몸을 받지 않는 자만이 진리에 깊이 통달하여 밝게 안다.
於色聲香味 解法六境界
一向生喜悅 愛染深樂著
諸天及世人 唯以此爲樂
變易滅盡時 彼則生大苦
唯有諸賢聖 見其滅爲樂
世間之所樂 觀察悉爲怨
賢聖見苦者 世間以爲樂
世間之所苦 於聖則爲樂
甚深難解法 世間疑惑生
大闇所昏沒 盲冥無所見
唯有智慧者 發朦開大明
如是甚深句 非聖孰能知
不還受身者 深達諦明了

주숙가周叔迦가 기야에 대하여 “중복하여 서술하고 긴 시행의 산문 형식으로 말한 시가(重覆敍述長行散文所說的詩歌)” 라고 했듯이 이 송리시는 다분히 서술적이고 산문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예시한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응법송리’의 송리시는 다분히 교리적敎理的이고 설리적說理的인 형태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법을 효과적으로 칭송하고 교유하고 설명하기 위해 직설적인 방법이 사용될 뿐 어떠한 장식도 수반하지 않는다. 이러한 송리시에는 다시 형태적으로 불설시佛說詩, 백불시白佛詩, 약경시約經詩, 설리시說理詩, 독경시讀經詩 등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잡아함 제1게>는 경전의 내용을 요약한 게송으로서 바로 약경시의 형태에 해당하고, <세존이설게언>은 불설시의 형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숙가의 말처럼 기야라고 해서 반드시긴 시행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잡아함 제1게>의 경우처럼 4행으로 이루어진 기야는 얼마든지 있다. 다음에 인용할 게송 역시 4행에 불과하다. 다음의 작품은 승려로서 주로 당나라에서 활동한 원측圓測이 응송應頌한 것으로 형태적으로 볼 때 설리시에 해당하며 <제법지실상諸法之實相>이라는 제목을 붙일 만하다.

일체가 실상이면서 일체가 실상이 아니다.
일체가 실상이라는 것도 또한 실상이 아니며
일체가 실상이 아니란 것도 실상이 아님이 아니니
이것의 이름을 모든 법이 실상이라는 것이다.
一切實一切非實
及一切實亦非實
一切非實非非實
是名諸法之實相

위 그림은 의상義湘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54각角 210자로 이루어진 이 도형의 글자를 순서대로 옮기면 7언시의 형태가 된다. 이를 의상대사는 <반시槃詩>라고 하였는데 역시 설리시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화엄경華嚴經」의 종지를 요약한 것으로서 쟁반 모양의 도인圖印을 지녔다 하여 의상대사는 이를<반시>라고 하였다. 균여대사는 이 게송이 7언으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7자에 연유한 것이라고 보았다. 화엄의 뜻을 설명하면서 인상印象을 함께 사용하였는데 의상대사는 이러한 교망敎網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이 삼종세간三鐘世間 곧 기세간器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섭융한 까닭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법계도의 상징성은 문학적 가치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法’자로 시작하여 ‘불佛’자로 끝나면서 세간의 제법諸法이 불성佛性이라는 원융한 무이상無二相을 인상印象의 선을 따라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반사>는 불교시가와 회화繪畵의 상관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평면적인 설리說理를 통하여 불법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입체적인 구도를 통하여 불법을 증득하고 불성을 터득하도록 교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