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사천왕과 십자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수상 - 백완승 1994년 09월 151호
실로 오랜만에 경기도 광주 석촌면의 곤지암 입체 교차로 부근에 있는 도사를 찾았다. 오 년만의 일이다. 파계사에서 머리 깎고 행자 수업을 받던 남편과 얼치기 기독교 신자였으나 명색이 개신교 개척 교회 집사였던 내 결혼을 앞두고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낼 때 정작 본인들은 그런 시선을 냉소로 일축하고 태평하기만 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일을 괜한 걱정들을 사서한다고... 남편이 신혼 여행지로 해인사를 돌아 시댁에서 가까운 고창 선운사를 돌아보자고 했을 때 호기롭게 따라 나선것도 그런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산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님 덕분에 초파일의 연등 행사에나 마지못해 따라가 본 기억과 어머님이 가끔 맛이 심심한 떡보퉁이를 들고 오시던 기억이 전부였다. 나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삼천배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나 불교는 모두 초인적 극기를 통해 불안한 마음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자기 위무의 인간적 노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었을 뿐 신의 화답을 바란다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 동기도 자식들이 어떤 종교를 믿든 그저 관대하게 바라볼 뿐 조금도 강요가 없던 친정 부모님 덕에 일찍이 기독교 신자가 된 큰 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맛을 들인 때문이었다. 가끔 나누어주는 과자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구박하지 않고 함께 놀아주고, 거의 동화에 가까운 창세기와 열장기의 이야기는 변변한 먹거리나 읽을 거리가 없던 그 시절 아이들에겐 대단한 문화적 축복이었다. 그 달콤한 문화적 축복을 따라 특별한 믿음 없이도 주일날만 되면 자연스레 교회를 들랑거렸다. 가기 싫은 날은 빼먹었고, 땡땡이를 쳐도 학교 선생님처럼 야단칠 일도 없는 주일학교 선생님은 거의 친구에 가까웠고... 대학 시절 공단 지역에 노동교회를 설립하겠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매달렸을 적에도 목사님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그늘 밑에서 운동을 한다는 인간의 뜻을 앞세웠다. 그리고 그 기대(?)가 허물어졌을 때 미련없이 교회를 등졌다. 결국 유대 민중 해방을 위해 예수의 품에 뛰어들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자 헐값에 예수를 팔아 넘긴 인간 가롯유다의 뒤를 망설임 없이 뒤따랐던 셈이다. 가롯유다야말로 망설이고 번민하는 예수의 등을 떠밀어 확실하게 신과 동격이 되게 한 최고의 공로자라는, 광신도들을 분노케 할 엉뚱한 궤변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던 나는, 사탄의 자손이요 루시퍼의 형제이며 메피스토텔레스였다.
거기에 덧붙여 결혼해 주지 않으면 다시 머리 깎고 절로 돌아가겠다는 남편의 염원(?)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고백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 덜컥 뒷다리를 물어 버렸으니, 언젠가 죽더라도 천당이나 극락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고 지옥과 연옥 양쪽에서 서로 오라고 손짓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3월 초 쌀쌀한 날씨 탓이지 적막하도록 고요했던 해인사 입구의 사천상을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형틀- 예수 당시 십자가는 정치범을 산 채로 못질해 매달아 굶겨 죽이는 가장 잔인하 형벌 도구였다-을 높이 내건 교회나 입구에서부터 눈을 부릅뜬 사천상을 내건 절집이나 민중을 겁주고 을러서 고분고분 순종시키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릴 때 남편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장격각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서도 나는 신이 아닌 신성을 끊임없이 지향해 온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민중불교운동연합 초창기 회원으로 재가 불가로서 자기 몫을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남편 옆에서 그저 훼방하지 않는 것으로 내 몫은 충분하다고 믿는 내게, 산사란 골치 아플 때 머리 식히러 가는 콘도미니엄의 의미를 넘지 못했고 그나마도 바쁘다는 핑계로 늘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닿는 것도 아니었다. 한때 민불련 식구였던 혜문스님이 주지로 있는 수도사는, 곤지암을 벗어나 논길을 따라 이, 삼십 분 달려 광주군 석촌면을 끼고 이제는 퇴락해 자칫 놓쳐 버리기 쉬운 두개의 이정표를 찾아 산길을 오르다 보면 시야가 트이는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이라야 백 평 남짓한 작은 암자이다. 총무원 직속 본사급 절임이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앞마당의 해묵은 호두나무 두 그루가 세월의 깊이를 전해 줄 뿐 안동 김씨가 한창 세력을 떨치던 이조 말엽에 창건되었다는 절의 역사를 증명해 줄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육이오 때 불타 버린 뒤로 몇몇 신도가 잔해를 끌어 모아 다시 건축했으나 거의가 카톨릭 성지로 재편되어 사찰자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주지 스님의 설명을 듣고 쇠락한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지난날 영화의 흔적인 듯 깊게 패인 낙숫돌 하나가 덩그러니 굴러 있고 아귀가 맞지 않는 대웅전의 굵은 기둥 몇 개가 콘크리트 블록과 어색하게 맞물려 있었다. 비구니 주지 스님의 깔끔한 성품 덕에 그나마 면모를 일신한 듯 경내는 정갈했으나 스산한 느낌은 면하기 어려웠다. 뒤편 오솔길을 끼고 있는 자그만 약수터에 오도카니 앉은 아기 부처 둘이 목을 축이는 여행객의 방만함을 꾸짖고 있을 뿐이다. 사찰 살림을 위해 임시로 지었다는 뒤꼍 가건물- 고시생이라도 받아 사찰 재건에 보태 보려고 지었으나 아직 입주생이 없이 비어 있다-에서 민중불교연합 십 주기를 위해 먼 길을 달려온 회원들의 얼굴은 이제 이, 삼십대 청년의 애티를 벗고 삼, 사십대로 접어들어 자식이 있는 장년이 된 그들을 만났다. 민불련 시절부터 이 못말리는 방랑객들을 말없이 지켜 보아온 부처님은 대웅전 옆방에 혜문스님의 배려로 깨끗하게 개금되어 모셔져 있었다.
다른 모든 공개 운동 기구가 그러했듯이 번듯한 사무실 하나, 불당 하나 욕심 내기 어려워 셋방에서 셋방으로 이삿짐처럼 이 년이 멀다 하고 이 식구들을 따라 옮겨 다니던 부처님이 천주교 성지로 둘러싸인 이 산 한 자락에나마 안식을 찾았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멀리 보이는 연꽃잎처럼 어우러진 앞산 문필봉을 바라보며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니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마음씀에 있다던 원효스님의 평범한 가르침을 문득 깨닫는다. 늘 불만 투성이인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머물렀던 탓에 단 한번도 체감해 보지 못했던, 모태에 든 듯한 푸근함을 비로서 느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