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 하면 저 유명한 초기 선승 신행과 명필 타연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가 먼저 떠오른다. 신행의 비는 초기의 선종 연구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고, 턴연의 비는 서법의 연구뿐만 아니라 공백으로 남은 고려 시대 선종사를 연구하는 데 그 가치가 매우 높은 탑비이다. 진정 대사의 탑비를 포함한 이 두 탑비는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1489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때까지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16세기 중반 이후에는 탑비의 안녕을 알 길이 없어 언제무슨 연유로 파괴되었는지 의문스럽다.
지금의 단속사는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삼층석탑과 여러 건물터와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많은 불교 문화와 유산들이 여기 저기에 널려진 채 방치되고 있다. 이 일대에 들어선 민가 때문에 가람의 중심인 금당지의 훼손이 무척 심하나 다행히 그 주변에 기단석과 초석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 통일신라 시대 초기 선종 가람의 구조를 밝힐 수 있을텐데 안타깝다.
단속사는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속하며 지리산 동쪽에 자리한 옛 절터이다. 88올립픽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지리산 휴게소를 지나 함양 입2체 교차로 입구에서 산청 쪽으로 빠지고, 단성에서 운리쪽으로 접어들면 바로 길가 옛 절터 위에 우뚝한 당간 지주와 쌍탑을 만날 수 있다.
삼국유사의 두 가지 창건설
단속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피은避隱 신충괘관新忠掛冠에 실린 두 가지 창건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신충과 더불어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말하기를 ‘훗날 내 글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하였으나 두어 달 뒤 왕위에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나무가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이들이 나무에 붙은 노래를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을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서야 다시 살아 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이 가을에 아니 시들 듯 너를 어찌 잊어하신 그 우러러 뵙전 낯이 계시온데, 달 그림자 옛 연못의 지나는 물결을 원망하듯 얼굴을 바라보나. 세상사 싫은지고...‘ 신충에 대한 총애는 양조(효성황,경덕와)에 두터웠다.경덕와 (왕은 곧 효성왕의 아우임) 22년 계묘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여 벼슬을 버리고 남악(지리산)에 들어갔다.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 깍고 중이 되었는데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금당 뒷벽에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다.
또 별기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오십이 되면 출가해서 절을 세우게 되리라 했다. 천보 7년 무자에 오십 세가 되자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해 법명을 공괴장노라 했으며, 절에 거주한 지 이 십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일연이 삼국유사와 별기에 등장하는 단속사의 두 가지 창건설을 다 실어 의심나는 점을 덜고자 하였으나 십육 년이라는 차이가 있어 오히려 밝히는 데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신충에 의한 경덕왕 22년(763년) 창건설의 내용 가운데 금당 뒷벽에 임금의 진영울 모셔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금의 진영은 일연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임금의 진영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김일손의 「속두류록」(1489년)에 따르면 “신라 신하 유순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건하여 단속이라 이름 짓고 자기 임금의 상을 그린 판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는 거주하는 스님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김일손 당시는 신충의 임금 진영가 이준(「삼국슈사」에는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속두류록」에는 유순으로 기록)의 창건설이 뒤섞여서 문제점은 있지만 일연과 김일손 당시까지 임금의 상이 있었던 듯하다.
이준에 의한 천보 7년(경덕왕 7년, 748) 창건설의 내용은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단속사를 창건한 이준이 공굉장노라는 법명을 사용했고 왕이 음주가무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자 간하여 마음을 골린 뒤 왕의 요청으로 불교 교리와 정치의 방책을 강설했다고 한다.
이 두 창건설의 공통점은 시기적으로 8세기 중엽이고 왕을 위해 단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다만 선후상의 문제와 어느 창건설이 맞는가 하는 것은 더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일연도 고증치 못한 거이거늘 하물며 그보다 칠백 년뒤인 지금에 와서야...
또 「동국여지승람」에 “단속사에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화神畵라고 하였다는 내 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솔거는 진흥왕(540~570)대의 사람이고 황룡사 노송도와 분황사의 관음보살상을 그린 시기와 활동 연대가 6새기인 점으로 미루어 단속사 창건 뒤 솔거가 직접 와서 유마상을 그렸다기보다 솔거가 6세기에 제작한 유마상의 화본을 가지고 8세기에 창건할 때 사찰 벽에 보사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초기 선승 신행 선사의 탑비
신행 선사의 비는 8세기 신라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비문의 주인공인 신행은 7세기에 중국 달마 계통의 선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한 법랑法朗을 계승하였다. 당에 건너가 신수 계통의 북종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그 문하에서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를 개창한 도헌道憲이 배출되었다.
신행神行(704~779년)의 행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 보자. 선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 사람이다. 장년에 이르러 출가하여 이 년 동안 율사 운정에게 배운 뒤 중국의 도신으로부터 선법을 배우고 돌아온 법랑에게서 삼 년 동안 공부하고, 법랑이 입적하자 당나라로 건너가 북종 신수의 제자인 보적 선사의 제자인 보적 선사의 문인 지공에게 삼 년 동안 공부하여 법을 얻었다. 그 뒤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교화하다가 779년(혜공왕15)10월21일 나이76세로 단속사에서 입적했다.
탑비는 신행 선사가 입적한 지 삼십오 년 만인 원화 8년(헌덕왕 5년,813)9월9일에 건립되었다. 단속사에 조선중기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분실되어 전하지 않고, q2l편 일부는 동국대학교 발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옛 탁본첩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규장각 소장본 등이 전한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따르면 높이 5척 6촌, 폭 2척 5촌이었다고 한다. 서체는 행서로서 시풍이 왕희지체에 가깝고 종28행에 각행은 63자씩이다. 글을 지은 이는 김헌정이며 글씨를 쓴 이는 동계시문 영업이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따르면 신행선사의 비는 북문을 지나 개울 건너편묵은 덤불 속에 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앞으로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 비의 지대석이나 그 밖의 비 조각 등을 찾을 수 있는 15세기 후반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동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우리가 단속사를 찾아갔을 때는 인근 동네 청년들이 쌍탑과 보호 철책 사이를 골문으로 삼고서 축구 시합을 하고 있었다. 옛 절터에 늘어선 민가들도 보기 민망한데 동네 학교 운동장은 놔두고 하필이면 천 년도 넘게 제자리를 지켜 온 쌍탑 주변에서 그 난리들인지.
이 쌍탑은 높이 5.3미터에 이르며 보물 제72와 제73호로 지정될 만큼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동서로 나란히 자리잡은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옥개석을 가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양식의 삼층석탑이다. 두 탑은 크기나 구조 등이 대체로 비슷하나 상륜부와 옥개석의 반전 각도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서탑의 파손이 심한 편이었는데 1976년 서탑을 해체해서 수리하여 지금은 반듯하다.
그 때 1충 탑신에서 원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없었다. 이 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균형이 알맞아서 안정감이 있고 돌 다듬는 방법 또한 정연하고 단정하며 우하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9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듯하다.
그 밖에도 통일신라 양식의 당간지주가 그 옛날 선풍을 드날리던 때를 증명이라도 하듯 절 앞쪽에 우뚝 서 있다. 1983년에 넘어졌던 당간지주를 복원하였으나 위쪽 일부 족각이 아직도 정당매 옆 담장 부근에서 나뒹굴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큰 수확으로 기록할 만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등 옥개석을 금당지 뒤쪽 담장 옆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석등 부재는 쌍탑이나 당간지주와 함께 9세기 속조물로 한짝을 이룬다.
골짜기 입구인 청계리 용두마을 뒤쪽 천연석문의 석벽에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고 새긴 돌을 가리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최치원(857년~?)이 썼다고 한다. 이처럼 쌍계사를 비롯한 지리산 골짜기 여기 저기에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것은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간 이후의 행적이 분명치 않고 심지어는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명필 대감국사 탄연의 탑비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따르면 대감국사 탄연의 비는 편액이 걸린 문 앞에 서 있고 신행의 비보다 두어 자쯤 더 크다고 한다.
탄연坦然(1070~1159)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며 대단한 권승으로 알려져 왔다. 좀더 자세하게 대감 선사의 행적을 살펴 보자. 선사의 속성은 손씨이고 휘가 탄연, 호는 묵암으로 경남 밀양 사람으로 여덟 살 때부터 굴과 시와 글씨에 능했으며, 열세 살에 이민 육경의 대의에 통달했다고 한다. 1088년(선종5)열아홉 살에 경북한 안적사에 가서 출가하였고 그 뒤 광명사의 국사 해소에게 법을 이어받았다. 1105년(숙종10)대신에 합격하고 이후 대사와 중대사, 삼중대사를 거쳐 1121년(예종16)에 선사가 되었다. 이후 의림사에서 보리연사로 옮겨 법회를 열고 많은 이적을 보였다. 마침내 1132년(인종10)대선사가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오른다. “사위의송”과 “상당어구”를 써서 중국 광리사의 선사 개심에게 보내자 회답하여 찬탄하고 가사와 발우를 전하여 왔다고 한다.
1146년(인종24) 진주의 단속사로 들어갔는데, 왕이 우가 승록 등에게 따라가 모시게 했다. 천성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했으므로 학도들이 많이 모여 종풍을 크게 떨쳤다. 1159년(의종13)6월4일 나이 아흔, 법랍 칠십일 년으로 입적했으니 대감 국사라 시호했다. 당시의 왕이 한취, 음중인 등을 보내 단속사의 북쪽 독립산에 장사하게 하고, 비는 단속사에 세웠다.
대감 선사는 필법이 뛰어나 흥관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서거정이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 요국일, 영업, 탄연이 다음 간다’고 했을 만큼 그의 시격은 고상하고, 글씨는 중국 왕희지의 체를 본받고 있다. 그는 춘천 청평사의 문수원 중수비와 예천 복룍사비, 삼각산 승가굴 중수비 등을 썼다.
탑비는 1172년(명종2)에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실되었고 비편의 일부는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과에 보존되어 있다. 이지무가 비문을 짓고, 석기준이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자경은 5푼이며 행서이다. 문경 김룡사에 사본이 소장되어 있고 「조선금석총람」에는 한림학사 김은주가 지은 진정 대사의 비문이 있었다는데 알 길이 없다.
만종과 진각 국사 혜심
만종萬宗하면 화순 쌍봉사 연재시 소개한 적이 있는 최우의 두 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속사에서 만행을 일삼아 왔다. 만종은 무인 집권기인 고종때(1213~1259) 권신 최우의 서자로 창기의 소생이다. 최우는 병권을 자신의 사윙 김약선에게 전할 때, 만종, 만전(최항) 두 서자가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수선사(송광사)의 진각 국사 혜심 문하로 출가시켰다. 그 뒤 만종은 단속사, 만전은 쌍봉사에 보냈으나 그들은 승려들을 모아 문도를 만들어 금, 은, 곡식, 베들을 축적했다. 또한 몽골족을 모방한 말과 옷차림을 하기도 하고, 관인을 사칭하는가 하면, 남의 아내를 욕보이고, 관리를 능욕하는 등 안 한 짓이 없었다. 그와 만전은 경상도에 비축해 둔 쌀 오십만 섬을 백성들에게 꾸어 주고 이자를 거두어 들이는 고리대금업을 하였다. 백성들은 가을에 벼가 익자 추수한 것을 전부 이들에게 바치느라 조세도 납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에 형부상서 박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점 등의 건언으로 최우는 만종과 만전이 축재한 재산을 환수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고리대 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문도 가운데 흉악한 자들을 잡아 가두었고 만전은 환속시켰다.
정당매와 속두류록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 말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하면서 매화 한 그루를 직접 심었는데, 그 뒤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그 매화 나무를 정당매라 이름하였다 한다. 지금도 이 정당매는 금당지 뒤편에 잘 보호되어 있다.
1226년(고종13)「선문염송집」을 간행했고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무렵에는 교종으로 종풍이 바뀐 듯하다.
김일손이 1489년에 지리산을 돌아 본 단속사의 모습이 「속두류록」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대감선사의 비는 문정에 있고, 신행의 비는 북문에서 나와 시내를 건너서 묵은 덤불 속에 서 있다. 편액에 지리산 단속사라 하여고, 정당매 뒤편에 루가 서 있다. 북쪽 담장 안에 주지의 침실로 쓰이는 정사와 그 오른편에 있는 허술한 집을 세상에서는 치원당이라 한다. 동쪽 행랑에 돌부처 오백 분이 있는데 그 표정이 서로 다르다. 지금의 자문지와 같은 백저지는 인종과 의종이 대감 선사에게 보낸 문안장들이다..”
김일손은 이처럼 15세기 후반 경의 단속사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쌍탑과 단속사 북쪽 독립산에 장사를 지낸 대감 선사의 부도와 신행 선사의 부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우리의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신행, 탄연, 진정스님의 탑비가 파괴되는 폐찰의 경위를 적은 문헌을 아직 찾지 못해 답답하다. 절 주변 마을 사람들의 얘기로는 1568년 선조 원년에 절에서 책을 찍자 유생들이 “중이 무슨 책이냐 염불만 하면 되지” 하고 불상과 경판 등을 불질러 버렸고, 1568년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완전히 불탔다고 한다. 그 뒤 선각스님에 의해 일시 준건되었으나 끝내 천 년을 이어온 법등은 폐허에 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유생들에 의한 사찰의 파괴는 좀더 고증하여야 할 것이나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침입으로 귀중한 불교 문화 유산이 파괴되는 예는 지리산 골짜기 여러 곳에서 엿볼 수 있는데 연곡사와 쌍계사, 칠불사 들이 그러하다.
잔속사를 나서면서 이런 생각에 잠겨 본다.
“단속사斷俗寺는 속세의 인연을 끊기 위해 절을 세웠다기보다는 오히려 님금의 진영을 모시거나 탄연 같은 권승들이 주석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단속斷俗에 이르지 못해 우리는 실망감을 안고서 환속還俗하고야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