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봄 동산에 풀빛이 더욱 짙고
꽃 핀 두 언덕이 시내에 비치어 붉다.
이리저리 읊조리다 돌아갈 길 잃으니
이 몸도 공허하고 만물도 공허하여라
雨歇春山草色濃
花開兩岸映溪紅
徘徊吟賞忘歸路
疑是身空物亦空
구름 아래 산언덕에 움막을 짓고서
선정에 안주한 지 사십여 년이 흘렀다.
지팡이 짚고 산 밖을 나선 적 없고
붓 들어 서울로 편지하지도 않았다.
대나무 시렁으로 샘물 소리 울리고
소나무 마루에는 해 그림자 드물다.
이 경계가 높음을 다 읊을 수 없어
눈 감고 만유가 여여如如함을 깨닫는다.
雲畔構精盧 安禪四紀餘
공無出山步 筆絶入京書
竹架泉聲緊 松靈日影疎
境高吟不盡 暝目悟眞如
부휴 대사의 작품에서는 일체 만 유가 공허함을 깨달아 견성見性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선기가 나타난 반면에 최치원의 작품에서는 선정에 든 지광 대사의 높고 높은 경계에 감복하면서 절로 오묘한 선경禪境에 매료되어 젖어드는 선정의 사유가 나타나 있다. 두 작품 모두 자연의 경물을 직관적으로 흡입하여 수용하는 한편, 그 경물 자체에 머물지 않고 오도와 견성의 선도의 경계를 진전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즉물선정’의 선정 시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자는 선의 시적 원용에 충실하고, 후자는 시의 선적 함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 사실 최치원 역시 불가에 깊이 융입했기 때문에 선사 못지 않은 선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 그 차이를 가름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정의 차이에 근거하여 전자를 선기시, 후자를 선취 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단지 선승과 속사의 작품이라는 전제에 근거하여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그밖에도 전자는 ‘영물오도’의 양상까지 지니고 있는 오도적 선기시이고, 후자는 ‘응사찬술’의 양상을 지니고 있는 찬술적 선취 시라는 차이도 아울러 보이고 있다. 이로 볼 때 선정시, 곧 선시의 하위 갈래는 더욱 세분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종찬 교수가 시의 선적 힘축에 해당하는 일반 문사들의 선시의 유형으로 ⑤의 선리시, ⑥의 선사시, ⑦의 선취시를 들고 있는데 이들 유형들은 작시의 동기나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 시법적 선취시, 찬술적 선취시, 송고적 선취시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두송백이’이선입시以禪入詩’를 말하면서도 선의 전적적典籍的 내용을 다룬 작품을 선적시禪典詩라 하고, 조사나 선가의 사적을 다룬 작품을 선적시禪迹詩라 해야 한다고 한다 했지만 이는 선정시 유형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일 뿐 전적으로 우리 불교시가를 갈래 규정에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오히려 위의 선리시, 선사시, 선쥐시에 대한 구멸이 더욱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창작 동기, 수용자 양태, 작품의 출전 양상 들을 고려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적합하고 타당한 갈래 규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종찬 교수는 禪理란 일반적인 사리詞理가 아닌 선사禪詞의 사리事理를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 뒤 소동파, 왕양, 섭적, 범성대, 백거이, 이백, 이규보의 작품을 예시하여 설명하였다. 일반 적으로 성리학자의 이치적인 시작품을 설리시說理詩 또는 이어시理語詩라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선리시시라는 용어가 그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다. 청나라 심덕잠沈德潛이 이어理語로써 시를 이룬 것이라는 말과 길천행차랑吉川幸次郞이 송대의 시를 의론과 이치로써 시를 지었다고 말한 뒤로 이러한 용어가 나온 것이다. 응법송리의 송리시와 불응설리의 설리시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선시의 하위 장르로서 선리시의 설정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종찬 교수가 규정한 선리시와 선취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⑥의 선사시에 대하여 시인의 종교성과는 관계없이 불교적 고사나 사적 또는 종교성과는 관계없이 불교적 고사나 사적 또는 불가의 현실적 사실과 연관시켜 지은 것 이라고 하였지만 다시 지식인들이 선사禪事나 선어禪語와 같은 것, 선전禪典이나 선리禪理 또는 불교적 교사와 같은 것을 시로 구사했을 때 이를 선사시라 규정한다고 하였듯이 선리시와 선사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그럼 실제로 인용된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의 작품은 선리시라고 한 범성대范成大의 ‘병중삼게病中三偈’와 선사시라고 한 소동파의 ‘증동림총장로贈東林總長老’이다.
말이 없어야 병의 근원이
끊어진다고 하지말라.
병의 근원이 깊은 곳이야말로
바로 말 없음이다.
장부로서 도리어 유말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생불일여生佛一如’ 여덟 자로
크게 ‘불이不二’를 깨우친다.
莫把無言絶病根
病根深處是無言
丈夫解却維摩縛
八字轟開不二門
시냇물 소리는 바로 넓고 큰 불법이요.
산빛이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리오.
지난 밤 동안 읊은 사만팔천의 게송을
다음 날에 어떻게 모두 들어 보이리오.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四萬八千偈
他日如何擧示人
여러 보살들이 문수文殊 보살에게 인간의 고통이 육근六根 가운데 바로 설근舌根에서 파생하기 때문에 무언무설無言無說의 상태를 유지해야 오입悟入, 곧 입불이入不二의 경지로 나아 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범성대는 문수 보살의 입장에서 생멸生滅, 구정垢淨, 정사正邪, 선악善惡 등이 불이不二하고 나아가 ‘생불일여生佛一如’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입불이入不二’에 들어가게 된다고 보았다. 이로 볼 때 이 작품은 불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는 의미에서 ‘불응설리不應設理’의 설리시設理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 나오는 ‘무언무설無言無說’ 곧 유마힐의 침묵의 태도와 그 논리가 다분히 선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 후대 성가에 많은 관심을 쏟게 항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제법불이諸法不二’라는 차별이 없는 일체 평등의 여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선리시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소동파가 동림총장로東林總長老인 조각照覺 선사에게 준 아래의 작품은 ‘계성溪聲’이나 ‘산색山色’과 같은 선정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선취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이 역시 불법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과그 방대한 불법을 포교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불응시법不應示法의 시법시示法詩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종찬 교수는 이 작품이 불사佛事라기 보다는 불리佛理에 가깝다고 시인하면서 동림사東林寺의 선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시 작품이기에 선사시禪事詩로 다룬다고 하여 갈래 규정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⑦의 선취시에 대해서 정려靜濾의 고요함이 지향하는 선가의 사유를 빌어서 시의 깊이를 다진 것, 성을 빌리면서도 선의 표상이 없이 선미禪味만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이미 일반 문사들의 선적 취향의 시작품을 선취시라고 하여 선가의 선기시와 구별되는 대칭적인 개념으로 규정한 이상 여기서 다시 하위 장르로 설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선리시에 속하는 것도 있고, 선사시에는 시법의 실상이나 오도의 경계를 노래한 것도 있기에 그 갈래 규정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불교시가의 갈래 규정이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닌 줄 안다. 그렇다고 어떤 분명한 기준도 없이 나누너 놓는 일은 더욱 혼란만 일으킬 것이다.
불교시가는 크게 향가, 가사, 시조, 한시, 민요 작품들이 포함된다. 이들 장르에 속한 불교시가에 대한 갈래 규정은 더욱 고려되어야 하며, 단지 불교가 요니 불교시가니 하는 정도로 묶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각적인 입장에서 다분화해야 하는 작업이 우리의 목전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야말로 불교시가 연구에서 좀더 핵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