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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보림사 불교유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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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4년 07월 149호
보조 선사 체징이 개창한 가지 산문의 중심 도량- “참선 좀 합시다”
이태호/황호균

철불의 제작 연대에 관한 견해는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위왕삼년渭王三年(859)과 선제십사년宣帝十四年(860)은 즉위년을 잘못 계산하여 대중십이년大中十二年(858)에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위왕삼년渭王三年(859)과 선제십사년宣帝十四年(860)은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는 일반적인 제위 연대 계산법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지만 즉위년을 제위 일 년으로 하면 제위 연대가 일 년씩 줄어들기 때문에 불상은 85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859년에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철불의 제작 연대에 관한 문제의 핵심은, 이 무쇠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철불과 보조선사창성탑 비에 각각 석가여래 입멸 뒤 일천오백팔년(858), 대중십이년大中十二年(858), 선제십사년宣帝十四年(860)으로 서로 연달라서 갖가지 억측과 구구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록들이 불멸연대 산정에 중요한 단서가 됨에도 그동안 이를 간단하게 생각해서 간과해 버렸다는 국립광주박물관 정선종 선생의 탁견이 현장에서 빛을 발한다.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사람이다
문제는 당시 보림사 관련 기사에 나오는 김수종과 김언경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이다. 기존 학계의 정설(이기동 교수설)은 위 두 사람의 활동 연대와 하는 일이 같아서 한 사람으로 보는데 견주어, 단순하게 한 비문에 두 사람이 쓰는 예가 없으므로 후임 장사(지금 전북 고창군 무장 일대)부관 김언경이 철불 제작의 공덕을 혼자 차지하려고 이러한 개작을 시도하였다는 최완수의 추리는 도금술에 의해 철불 팔뚝에 조상기가 숨겨져서 이런 명문이 새겨진 것을 몰랐을 거라는 가정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전제로 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태도는 소설이라면 몰라도 후학들이 보고 배울까 겁난다. 사찰 답사기여서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아무런 부담 없이 썼을 거라는 심증은 가지만, 이 명문은 도금에 의해 덮혀질 만큼 얕은 음각이 아니고 상당히 돌출한 양각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은 마치 논지를 만들어 놓고 여기에 모든 문제를 짜맞추는 억측에 불과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면 이 문제는 한 비문에 두 사람이 쓰는 예가 없을 뿐더러 서로 다른 연대가 세 개나 있는 데에서 빚어진 혼선이다. 창성탑비의 7행 ‘선’자 이전은 김원이 그 뒤로는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관례대로 비문의 서두에서 밝힌 것은 아니다. 비문 서두에는 ‘김영이 짓고 김원이 쓰다’라고만 하고 끝에 ‘7행 ’선‘자 이후부터는 김언경이 쓰다’라고 적고 있어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7행 ‘선’자 이하를 김언경이 어떤 이유에서든 개작하고 끝에 석현창이 글자를 새겼다는 대목 앞에 자기가 썼음을 궁색하게 적고 있는데서 볼 수 있다. 아니면 김원이 7행 ‘선’자 이전까지만 쓰고 중병에 걸려서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는 사정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으나 이도 역시 이 년 뒤에 세운 양양군 사림사지 흥각선사비에 김원이 비문을 지어 신체적 이상으로 보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글씨는 쓰지 않고 글만 짓는 것으로 미루어 이도 역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김영이 짓고 김원이 쓴 비문 내용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이를 김언경이 고쳐 썼다고 보는 정치적 동기에서의 개작설이 가장 유력한데, 현단계에서 더 이상 고증하기는 불가능하다.

헌안왕의 명복을 비는 원탑인 쌍탑과 석등
보림사에는 무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다시 십 년 뒤에 두 개의 삼층석탑을 만들어 이른바 철불 하나에 보탑 두 개를 완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려고 870년에 건립한 원탑인 국보 제44호의 두 개의 삼층석탑을 보자. 현재 보림사 외호문과 천왕문이 일직선에 있는 대적광전 앞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좌우로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 석등 한 기가 놓여 있다. 일제시대인 1933년 겨울에 도굴꾼들이 사리 장치를 빼내려고 쌍탑을 모두 무너뜨렸으나 미수에 그쳤다. 다음해인 1934년 가을에 도괴된 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사리함, 자기류, 목판, 비단, 사리, 구슬 등의 사리 장엄구와 함께 탑지를 발견하여서 탑의 조성 연대와 중건 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따르면 이 탑은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려고 건립한 탑으로 신라시대에 초창한 뒤로 1478, 1535, 1684년 세 차례에 걸친 중수 사실을 적고 있다.
이 탑 안의 유물들은 당시에는 장흥경찰서에 보관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군청으로 옮겼고 다시 6․25전쟁 뒤로 교육청에서 관리하다가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을 거쳐 1970년대 후반에 비로소 국립광주박물관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그 거처를 자주 옮겼는데도 잃어버린 유물 없이 고스란히 전해져 다행이다. 석탑은 이 층의 기간 위에 삼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통일신라에서 전형적인 양식의 석탑이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건립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며, 다른 석탑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탑 사이에 놓인 석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으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10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쌍탑과 대적광전 사이에 건물의 기단석으로 보이는 석열 높이가 서로 다른 두 열이 땅 속에 반쯤 묻혀 있다. 종각을 신축하려고 요사채를 헐면서 주변을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파헤쳤다가 문제가 되나 이를 다시 쌓아 놓아 어쩐지 어색하다. 이렇게 전문가의 고증 없이 밀어붙이는 식의 불사에는 진정한 의미의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려는 불사라기보다는 과시적인 성과에만 급급한 임기제 주지가 노심초사한 흔적이 엿보인다.

보조 선사 체징 탑비, 묘탑과 등, 서부도
이제 보림사의 대웅전 오른쪽 뒤편에 자리한 보조 선사 체징의 흔적을 기록한 탑비와 묘탑을 봐야겠다. 보조 선사 체징이 입적한 뒤 사 년 만이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탑비는 비신이 깨어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체징의 비는 비신을 완전히 갖추어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삼미터 오십 센티미터에 달한 이 비는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비제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이 짓고, 글씨는 김원과 김언경이 썼는데, 첫줄에서 일곱째 줄의 ‘선’자까지는 해서로 김원이 썼고 ‘사’자 이하는 행서로 김언경이 썼다. 일찍이 청 말의 금석 연구가 섭창치는 이 바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당시 조형 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묘탑의 높이는 사 미터에 달하며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이 부도의 조성 연대는 884년이다. 요즘 사찰 측과 장흥군에서 탑비와 부도의 보호각을 세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오지만 탑비 거북이의 발 쪽에 균열이 생겨 이 탑비의 안녕이 무척 위태롭다. 도괴돌 우려가 있으니 지대석과 거북이의 보수가 오히려 시급하다. 보림사에는 보조 체징의 부도 말고도 고려시대의 부도 세 기가 더 있다. 하나는 동부도라 부르며 높이 삼 미터 육십 센티미터에 달한다 보물 제155호로 지정된 이 부도는 보름사 동쪽 숲 속에 있는 여러 부도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다른 두 기는 보림사 경내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서부도라 부른다. 높이가 삼 미터에 달하며 보물 제 156호로 지정되었다.

국내에서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목조 사천왕상
다시 고개를 돌리면 외호문과 대적광전 사이에 자리한 천왕문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목조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맞이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 홑처마 지붕으로 중앙 칸은 통로이고, 좌우의 양칸에는 네 구의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보림사천왕금강증신공덕기」에 따르면 1539년에(중종34년, 정덕 기해)처음 조성된 뒤로 1668년과 1777년에 중수하였고 6․25때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사천왕상은 입구 왼쪽에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이, 오른쪽에는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상들은 목재라는 점이 주목되며 조각 기법 또한 매우 사실적이다. 보통 동방 지국천왕이 마귀를 발로 밟고 있으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모습인 데 견주어 보림사 사천왕상 지국천왕은 둥그런 눈의 마귀가 지국천왕의 무거운 듯한 발을 들어 올려 주는 듯한 모습이여서 흥미롭다. 오래된 풍문에 따르면 사천왕상의 복장에서 간경도감판의 불서들이 다량으로 출현했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조계종 개혁회의에 바란다
이 글을 마치기 며칠 전 조계종 개혁 회의에서 종단을 혁신할 몇 가지 개선안 가운데 물고기 방생을 전면 금지하기로 한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 안을 채택한 모든 분들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일천수백 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물고기 방생은 속박되어 있거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생물의 목숨을 살려 줌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준다는 불살생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물고기 방생을 한답시고 멀쩡한 물고기를 오염된 강물에 풀어 놓아 살아 있는 생물마저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닷고기를 민물에 넣어 죽이는 일도 있어서 비난이 많았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생 대목을 노려 외국에서 수입해 온 블루기나 베스 등 번식력이 강한 외국산 물고기들이 강물이나 바닷물에 풀어 놓기 바쁘게 우리 토종 물고기들을 닥치는대로 잡어먹어 생태계가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기 가족들의 안녕만을 위한 기복 신앙으로 전락한 물고기 방생은 ‘놀부 방생’이라는 세인들의 빈정거림 속에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인 방생’으로 바람직하게 변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경우는 무척 드물 뿐더러 오히려 물고기 대신 새를 날려 보내는 ‘새 방생’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하니 이도 역시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더욱이 어쩌면 물고기 방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문화재를 파괴하는 신축 불사의 폐단은, 어처구니 없게도 앞서 다룬 쌍봉사나 보림사 뿐만 아니라 사역 전체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회순 운주사에서도 형상 변경이라는 형태로 자행되고 있어 더 이상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거주의 편리를 추구하는 사찰 신축 불사가 자칫 천 연도 훨씬 넘는 절터를 깔아뭉개는 문화재 파괴로 이어지는 폐단에 대해서 그 개선책을 건의하고자 한다. 먼저 증, 개축 및 복원 불사를 하려는 사찰들은 그 계획서를 사전에 총무원에 제출하고 총무원은 이를 문화재 관리국과 협조하여 공사를 하기 전에 지표, 발굴조사를 충분히 한 뒤 공사에 착수하였으면 한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찰의 외형만 늘리려는 무분별한 증축 불사가 전국에 걸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필연적으로 천 년도 훨씬 넘는 옛 절터가 파괴되는 폐단도 낳았다. 가뜩이나 부족한 자기 종교의 역사를 밝혀 줄 만한 좀더 구체적인 자료들이 옛 절터의 초석이나 축대 하나에 담겨 있는데도 증축 공사를 한답시고 깡그리 중장비로 걷어내 버리는 일은 50년대 정화 때 배운 솜씨인가? 경제성장 시기에 과거의 역사를 밝히는 일이 무에 좋은 일이라고. 이제 새 절 짓고 모처럼 불교 중흥을 맞는가 싶던 시절에 기와나 도자기 부스러기 땅위를 주어들고 이 절의 역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분명하다. 모든 불사가 다 그렇듯이 외상 불사라 일을 벌려 놓아야 시주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주지직을 임명해 준 분께도 도리는 해야겠기에, 언제 주지 자리를 내놓게 될지 모르니 이 기회에 개인 절도 하나 번듯하게 지어 놓아야 하는 큰절 주지는 임기 동안 무척 바빠 코빼기도 볼 수 없다. 그 동안 선거 때마다 호국불교를 외치며 권력자의 편에 선 한국 불교, 물심양면으로 공들인 탓에 현 집권층의 돌바주심을 믿고 정화 때에 보여 준 전통적인 방법조차도 거추장스러웠던지 깡패들을 승복조차도 입히지 않고 백주에 벌인 그 무술극은 이제 조계사를 소림사로 바꿔 불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림사의 호법 무술과 조계사의 폭력배 난동은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서황룡, 그는 분명 청화와 효봉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화의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게다. 선방에서 참선하던 때의 서황룡의 모습은 그도 어느 선승처럼 해맑은 얼굴이었으나 지금의 얼굴은 그야말로 돈과 권력에 연연하는 아귀상이다.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몇 년 전에 따놓고도 종을 부리는 것 같아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는 월하 큰스님을 이제 종정으로 모셨으니 이 기회에 우리 불교계도 거듭나야 한다. 도시로만 몰리던 승려는 이제 선방으로 강원으로 돌아가고 사판승은 돈을 만지던 손을 거두고 부처님 시대의 법인 우바이, 우바새를 포함한 사부 대중과 함께 중지를 모아 사찰을 이끌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