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떠난 빈자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07월 149호
지난 5월 19일 오후 3시, 나는 가장 다정했던 도반 하나를 불시에 잃어 버렸다. 종태스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종태스님이 나의 가장 가까운 도반임을 알고 있다. 그만큼 그와 나는 남다르게 가까운 사이였다. 종태스님이 사고를 당한 그 날은 날씨가 유달리 화창했다. 조계사에는 초파일 이튿날이라 아직도 연등이 마당 가득이 달려 있고, 총무원 청사 안은 행사 뒷이야기를 나누며 어딘가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달려와 “조금 전에 라디오를 들었는데, 천안지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종태스님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 기가 막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기가 막힌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법안스님을 찾았다. 법안스님은 청사 안 5층 자기 방에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니 우리 실천승가회의 스님들이 모여 있었다. 법안스님이 “방금 천안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김용근(종태스님의 속명)이라는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부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문득 돌아보니 일문스님과 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와 있었다. 이리 저리 관리 책임자를 찾아 영안실 냉동문을 열었다. 책상 서랍 같이 생긴 좁은 냉장고에 종태스님은 멀쩡한 얼굴로 잠자듯이 누워 있었다. 얼굴 위에 하얀 한지가 덮여있어 그것이 주검임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우리는 친숙한 도반으로 살아왔다. 스무 살에 운수납자로 해인사 선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혼자 대웅전 축대 위를 걷기도 하고 홍제암으로 가는 숲길 어디쯤에서 누더기 두루막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채 망연히 하늘을 보고 있기도 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흰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종태스님은 유달리 눈이 크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시원한 것이 마치 외국 어느 유명 배우의 얼굴같지만 그 중에도 눈이 크고 아주 순하게 생겼다.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그의 눈은 어딘지 애잔한 우수와 고독이 있었다. 혼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타고난 운수객의 고독 그것이었다. 종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범어사 선원에서 였다. 그 때 명완스님과 함께 한철 여름을 지냈다. 명완스님은 종태스님의 속가 친형이다. 명완 스님은 동생 종태스님을 찾으러 절에 갔다가 스님이 되었다. 학교를 다니다가 문득 말없이 집을 나간 동생이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려고 한다기에 찾아 갔다가 동생과 함께 밤 늦도록 인생과 출가 수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에 형 명완스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생을 따라 스님이 되었다.
절 집안에는 형제가 함께 출가하여 스님이 된 예가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명완, 종태 두 형제 스님의 출가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다. 언젠가 종태스님에게 \"왜 학교 다니다 말고 출가 했느냐\" 했더니, 그저 웃으면서 \"사춘기 고등학생 나이의 인생 고민 탓 아니겠어\" 하였다. 평소 남달리 생각을 깊게 하고 언행을 치밀하게 하는 그 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도 말이 줄어 들었다.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나 역시 말을 적게 한 것이다. 아니 말을 잘하는 나도 그와 있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한나절을 같이 있어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정 할 말이 없으면 내가 먼저 \"말 좀 해보지\" 하고 말을 건다. 그러면 스님이 \"그래, 할말 있으면 스님이 한번 해봐 내 다 들어 줄테니까\" 하여 서로 싱거워서 웃고 만다. 나이가 같은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고, 함께 구름과 바람이 되어 전국 선원을 다니면서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그래서인지 생각도 비슷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나 입장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서로 눈빛만 보아도 뜻이 통하고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는 정도까지가 되었다.
내가 지금 불교계의 활동 진영에서 중심에 있는 것도 바로 종태스님을 인연으로 해서다. 그의 권유로 대승불교전국승가회에 발을 들여 놓고 또 실천승가회 종단개혁위원장을 맡게까지 된 것이다. 불교 활동 진영에서 우리는 마치 수레의 바퀴와 같이 역할을 분담해 왔었다. 지리산 쌍계사에 있을 때였다. 오월 초여름에 종태스님이 청학동에서 산길을 걸어 쌍계사까지 와서는 나에게 불일폭포로 해서 천왕봉까지 등산을 하자고 했다. 나는 마침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던 터라 길을 나서기가 싫었다. 그래서 거절을 했더니 “스님은 아직 신승 자격이 없네. 산은 오월 초여름에 가장 아름다워 하루 등산은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월등 가치가 있을 것이요. 그리고 매사가 때가 있는 법이요” 하면서 억지로 나를 끌어 내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우리는 사철 누더기 한 벌로 살아가던 터라, 무더운 여름에 땀을 흘리면서 하는 산행은 여간 고생이 아니였다. 그러나 깊은 계곡을 지날 때 둘이서 발가벗고 목욕하거나 높은 능선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쐴 때면 그 바람만큼이나 시원하고 울림이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종태스님의 노래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그와 잘 사귄 사람으로서 그의 노랫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면 그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지리산 같은 높은 산능선, 맑은 바람 앞에서 눈을 아래로 반쯤 지긋이 감고 흘러간 노래 ‘용두산’, ‘울고 넘는 박달재’,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면, 늙은 소나무나 바위까지 귀를 기울인다. 그만큼 그는 노래를 시원하게 잘 불렀다. 요즘에는 나이를 핑계로 노래를 잘 부르지 않았다. 어쩌다 나의 강요로 김영동 씨의 노래 ‘어디로 갈거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스스로 이 노래는 김영동 씨보다 자기가 더 잘 부르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종태스님은 ‘어디로 갈거나’ 그 노래처럼 작년 여름부터 새로운 갈등과 고뇌를 많이 했었다. 어느날 갑자기 실천승가회 집행위원장을 그만두겠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 때 그는 실천승가회의 전국불교운동연합의 집행위원장직을 함께 맡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 우리 실천승가회 스님들은 몹시 당혹해 했다. 며칠 후 법안스님과 내가 사방으로 그를 찾다가 결국 지리산 화엄사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말없이 웃고 말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궂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못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렇게 해서 작년 여름부터 지리산으로 내려가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만나면 화엄사 일을 본다고 말해 왔었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화엄사 일을 심리적인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개혁회의가 출범하고 그는 사회복지분과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인사동 수희재라는 전통 찻집에서 만나 앞으로 화엄사 일은 마무리를 하고 다시 서울에서 개혁회의 일에 전력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초파일 지나면 바로 상경하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파일 이튿날 5월 19일 고속도로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나의 날갯죽지가 꺽인 격이 되었고, 우리 활동 진영에서는 좋은 선지식 하나를 잃은 셈이다. 들리는 말로는 초파일에도 화엄사에서 있지롤 못하고 여수 쪽 문중 사형제들의 절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돌이켜 그의 깊은 고뇌를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고 아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