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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이 용맹이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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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법연 1994년 08월 150호
홍제암 물레방앗간 문간 방에서 시를 씁네 하고 사는 나를「해인」편집장으로 지목한 까닭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때「해인」지 사정은 여러모로 여간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다.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해인」지를 대하는 사중스님들의 눈도 썩 너그럽지만은 않았던 터에, 그런「해인」지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중임을 사교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한 나에게 떠맡긴 편집위원들이나 그런 무거운 짐을 쉬이 떠맡은 나나 지금에 생각해 보면 막무가내의 인사였지 싶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그 시를 씁네하는 것과 잡지 일이 궁합이 맞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 대한 인사가 아니었는가 싶다. 마침내 나는 그 겉궁합에 떠밀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일이란 실타래를 부여잡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아무튼 무식이 용맹이라고 편집에 대한 중뿔난 식견도 문화적 소양도 없는 나는 달력의 날짜들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자誤字 찾기와 필자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찾기엔 둘 다 똑같이 어려운 난적들이었지만 필자를 찾는 일이 더욱 곤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스로 찾은 사람들이라도 청탁 거절은 있기 망정. 청탁 거절을 줄이는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곧 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써 준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자리에서 물러나는 방법이었다. 가당찮은 오기요 결례이었지만 나름대로 나 개인을 위해서는 좋은 경험이었지 싶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말이다.「해인」지가 아니었다면 소심하고 주변없는 내가 무슨 너스레로 그렇게 억지를 썼겠으며 하심을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미치니 말이다. 「해인」지로 인해 만났던 많은 분들 중에 나에게 끊임없는 애정과 가르침을 주신 주명덕 선생님과 도반처럼 여겨주셨던 끄레 최만수 선생님, 홍현숙 선생님이 있다. 처음 끄레를 찾았던 때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돈 삼십만 원으로「해인」지를 통째로 디자인 해 달라고 떼쓰던 그 무지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