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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엘리트 승려들의 모임체였던「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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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장 1994년 08월 150호
월간「해인」이 지령 150호를 맞이한 것이 꿈만 같고, 편집일을 맡았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벅차기도 하다. 창간호부터 현재까지「해인」지 소임을 맡았던 모두가 나와 같은 기분이지 싶다.「해인」지가 지령 150호까지 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또한 세월이 끌어온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역대 편집진들이 뼈를 깎고 피를 말린 아픔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이 인쇄문화의 시원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젊은 엘리트 승려들이 현대 정보사회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숨쉬게 한다는 자각으로 노력한 언론 문화 운동의 결정체가 아닌가 한다. 80년대 초 암울했던 군사통치 시대, 그 시대 아픔을「해인」지를 통하여 풀수 있었기에「해인」지는 의식 있는 젊은 엘리트 승려들의 모임체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 때 모인「해인」지 최초의 편집위원들은 필자인 나를 비롯하여 종림, 법성, 여연, 시명, 소허, 현응 들로 그들은 조계종에서 진보주의자들을 대변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당시 이들이「해인」지로 모이게 된 것은「해인」지 일을 하고「해인」지에 글을 쓴다고 하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전두환 군사통치 아래에 모든 언론들이 합수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으나「해인」지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기재했고, 그래서 한때는「해인」지가 불교사회과학 운동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수행하기에는 8면인 타블로이드판「해인」지로서는 역부족이었기에,「해인」지를 28면으로 증면하여 잡지의 규모를 갖추고 표지를 불교 잡지 가운데에는 최초로 광주 조선대학교 산업미술과 고현 교수 그림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해 그 때는 불교언론문화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였고 군사통치 아래에서 기존의 신문과 잡지도 무더기로 통폐합될 때라,「해인」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위하여 문공부에 등록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이 들었다. 그것을 일년에 가까운 시도와 설득으로 간신히 등록을 마칠 수 있었고, 그 때 등록된 불교 간행물은「해인」지와 불일회보뿐이었다. 어렵사리 등록을 마치니 산 너머 또 산이라. 경영 분석도 없이 의욕만으로 20면을 더 증면하고 나니 예산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 경영난이라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몇 달씩이나 밀린 인쇄비를 갚지 못해 한때는「해인」지 폐간론까지 나오기도 했으나 다행히 불교용품 전시회를 열어 인쇄비 부채를 해결하였고 폐간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어려웠던 일은「해인」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노스님들과 일부 독자들이 이해해 주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듬해부터는 주명덕 선생님의 사진으로 표지를 꾸미기 시작했고, 이 일이 불교의 사진 예술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발전 단계를 거치며「해인」지는 불교계 잡지의 모델로 떠올랐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난 오늘날「해인」지가 경쟁 시대에서 계속 살아 남으려면 종합적이고 냉철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듯이 이제「해인」지도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할 때이다.「해인」지가 80년대에는 젊은 엘리트 승려들과 진보주의 승려들의 구심 역할을 해 주었다면 이제 90년대에는 법보종찰 해인사에 맞는 전문 교학승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끝으로「해인」지령 150호까지 이끌어 주시고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또한「해인」지령 150호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