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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창간 당시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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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장 1994년 08월 150호
“스님, 참 잘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빳빳한 종이에 만들어야 사람들이 똥을 못 닦지요.세번째 나온 「해인」지를 받아들고 해인사 암자의 노 비구니 스님이 한 말이다. 지금부터 십이 년 육 개월 전 불교인쇄물로서는 처음으로 아트 용지에 칼라 인쇄한「해인」지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 중에 지금까지 기억되는 한마디다. 강원 학인으로 갖가지 제약 속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해인」지 만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150호 발행이라니 새삼스레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본다.「해인」지를 통해서 다달이 성철 큰스님의 말씀을 세 번, 네 번 되새길 수 있었던 일, 그리고 함께 일했던 도반들과 고마운 불자들과의 인연을 생각할 때 내가「해인」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해인」지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왔음을 절실히 느낀다. 먼저「해인」지의 창간 배경과 운영과정 그리고 몇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창간 무렵 해인사에는 불교 학생회 지도 법사를 강원 경반에서 포교부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때 나는 강원에서 도사관 사서를 맡았다. 그런데 포교부장을 맡은 홍선스님이 강사 스님께 소임을 바꾸어 달라고 간곡히 청을 하였다. 일이 많을 때는 서로 돕기로 하고 부탁을 받아들여 불교 학생회의 월간 회보를 펴낸 것이 월간「해인」의 창건이다. 창간호를 내고 생각한 것이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스님 법문과 벽화 설명들을 실어서 보급하면 많은 포교가 될 것 같았다. 원택스님께 얘기했더니 쾌히 승낙하여 큰스님의 불공하는 법법문을 원고로 주었다. 최고로 잘 만들어 보려고 시설과 기술이 뛰어난 왜관의 분도 인쇄소를 찾아가 초판 오천 부를 아트 용지에 칼라로 인쇄하였다. 그 당시 인쇄 비용이 삼십 칠만 원으로 기억되는데 그 비용은 도반 스님들이 학생회 포교 활동 기금으로 모아 둔 돈이었다. 산뜻한 모습의「해인」2호를 장경각 안에 무인 판매대를 설치하고 백 원씩 넣고 한 부씩 가져가게 했는데 열흘 만에 오천 부가 모두 나갔다. 계속 중판을 해서 한 달에 사 판 이만 부를 보급하였다. 3호부터는 이만 부씩 발행하고 4호째에는 3월 불사와 겹쳐 사만일천 부를 발행하였다 불교 학생회보 및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포교지로 출발한「해인」지의 정기 구독을 요청하는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업무가 여러 가지 많아졌다. 그 때의 구독료는 일 년에 천 원, 평생은 만 원이었다. 처음에는 편집실도 없이 강원 서기실을 이용하여 밤 늦게까지 발송 작업을 하면 다음날 강의 시간에 조는 일이 많아졌다. 그 당시 도견 주지 스님과 강사 스님은「해인」지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강원에서 나가라고 성화가 대단했다. 강원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이 후회되기도 하지만「해인」지를 통하여 더 큰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해인」지를 운영하면서 눈물겨웠던 일이 한 가지 생각난다. 사집반 스님 세명이 가사, 장삼을 입고 부산 국제 시장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점포마다「해인」지를 한 부씩 나누어 주었다. 그 탁발은 불교가 시장 사람들과 만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해인」지를 받아든 시장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불교도 이렇게 변해야 한다면서 탁발 발우를 편집실로 가져왔다. 요즘은 불교 잡지들도 필자들에게 원고료를 챙겨 주지만 그 때의「해인」지는 원고료 대신 게재료를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였다. 백련암의 원택스님과 원당암의 여연스님 그리고 강원 학인 스님들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이 년 동안 유급 직원 한 명 없이 강원에서 서기 소임을 정해 장부를 정리하고 홍선, 지묵스님들과 함께 편집 교정을 보고 강원 율력을 통해서 발송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사부대중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된「해인」은 앞으로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