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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산중의 행복한 사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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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일진 1999년 08월 210호
나에게 출가사문의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첫 출발부터 행복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산문에 들어선 지 올해로 꼭 서른해. 세속에서는 새색시가 서른 번 김장을 담고 나면 늙고 마는 인생이니 , 짧지 않은 세월을 절집에서 보낸 셈이다. 수행자로서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늘 행자시절의 그 풋풋한 초발심으로 새롭게 돌아가는 것일 게다. 그러므로 행자 시절은 수행자의 삶과 원초적으로 직결되는 소중한 시간이리라.
누가 내게 ‘행자시절’을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저는 행자 시절이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로서 제대로 사는 것이 행자 때의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 하루가 행자로서의 첫 출발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를 다잡곤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도 ‘행자다’, ‘아니다’하는 개념 없이 살고 있으니, 행자 시절을 따로 떼어 놓고 얘기한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살 통통히 쪄 가며 한해 내내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피어 오른다. 지금 또한 행자와 다름 이니라는 마음으로 산다고는 하나, 그 시절의 한 점 티없는 풋풋함을 어찌 따라 갈 수 있으랴.
내 출가에의 첫 걸음은 속가의 어머니와 함께 시작된다. 어머니는 내 출가사문의 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분이다. 몇 대 독자인 아버지와 혼인해 아들 하나에 딸 여섯을 낳았으니, 당신 이들에 대한 정성은 가히 신성에 가까웠다. 돈독했던 어머니의 불심은 오로지 아들에 대한정성으로 출발했을 것이며 이들의 평안을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아들의 생일엔 꼭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을 잊지 않으셨는데, 추운 겨울에도 빳빳이 풀을 먹여 다린 광목 치마 저고리를 입고 손수 만든 먹을 가지고 절에 가시곤 했다. 절에 가실 때 보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그 곁엔 언제나 막내딸인 내가 함께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와의 절 나들이가 내 불심의 시초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집 가까운 개심사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그 무렵 비구니 강당의 학인 스님들을 보면 다른 세계의 사람인 양,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불심이 싹트고 있던 오학년 때였다.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까 의논해 보자’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도덕 시간이었다. 선생님이나 간호사, 발레리나 등이 되고 싶다는 친구들의 말끝에 나는 분명한 어조로 그랬다.
“저는 조용하고 깨끗한 산중의 스님이 되겠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담임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까지 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 알아 보기기까지 했으니, 또래에 견주어 다소 내 꿈이 파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초등학교 오학년 때 자신의 꿈을 분명하게 세운, 야무진 여학생임엔 틀림없었다. 출가 뒤에도 나는 어머니의 무언의 담담한 눈빛에서 ‘수행을 잘해야 한다’는 경책을 읽으며 재발심을 하곤 했으니 나의 어머니는 분명 혈육 이상의 선지식이셨다.
고등학교를 일월에 졸업하고 그 해 삼월 스무이렛 날 용인 화운사에서 삭발을 했다. 온 들녘이 봄 오는 소리로 가득하던 그 새봄과 함께 시작된 사문에의 첫 걸음은 환희로움 그 자체였다. 서울로 유학 온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 간부도 할 만큼 활동적이었고, 공부도 착실히 했건만, 세간의 살림살이를 바라볼 때 어인 일인지 희망적이거나 기쁨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전부를 걸 만한 가치가 그 곳에 있지 않음을 인지하였기에 한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던 입이 절에 들어오자마자 저절로 풀어졌다. 그야말로 함박꽃 같은 웃음이 번져 나왔으며 일상 자체가 소중했고 즐거움 그것이었다.
그 무렵 비구니 선원이었던 화운사엔 예순 명쯤 되는 대중스님이 있었고 행자는 나와 나중에 운문사 강원에서 같이 공부하게 된 행자하나가 더 있었는데, 유난히 불사가 많아 할 일이 많았으나 왜 그리 모든 것이 좋기만 했는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계곡에서 쑥을 캐고 있노라면 잔잔한 기쁨과 함께 코로 배어들던 그 쑥내음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향기 그대로 살아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즐거웠기에 일도 참 부지런히 잘했던 것 같다.
어른 스님들 곁에 있다가 시키지 않아도 뭐가 필요한지 눈치 채 대령하곤 하던 나를 모두 예뻐한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칭찬에 자극받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나 그 시절 어린 나이엔 모두 잘한다고 하니 더 절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좋기만 하던 행자시절이었으나, 꼭 한번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공양주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였다. 그 날 따라 불을 잘못 때어 누릉지가 다른 날보다 많이 나왔기에 슬쩍 버렸다. 그 일로 대중 공사를 받았는데, ‘쌀 한 알이 생길 때까지 농부의 피와 땀의 무게가 일곱 근이라’며 음식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던 주지 스님의 따끔한 말씀이 무릎 꿇고 받은 유일한 나무람이었으니 혹독한 고생과 배고픔으로 보낸 선배 스님들에 견주면 오히려 싱거울 정도로 행복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일상 자체가 그저 즐거움으로 피어 올랐고, 치문 한 구절, 염불 한 자락 그리고 내 눈길이 닿는 절 집안의 모든 것이 그 순간 금빛으로 물들어 가슴으로 번져 가는 듯했으니, 그 한 해의 행자시절만큼 불도에 대한 간절함으로, 수행자가 된 자긍으로 빛날 수 있다면 어느 제왕의 자리인들 부러우랴. 굳게 다물어졌던 입이 함박꽃 웃음으로 변하고 살까지 통통히 쪄 가며 꼭 한해 동안의 행자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서울 은사 스님이 계신 만법사에서 사미니계를 받았는데, 혼자 받은 조출한 자리에서 채벽암 노스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는 이랬다.
“너무 웃지 마라.”
나는 감히 계를 받던 그 날부터 계사스님의 말씀을 수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뒤로도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행자 시절에 누린 환희를 계속 누릴 수 있는 복된 시간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다치多癡가 다소多笑’라 했으니, 나는 행자시절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다치인 채로 산 셈이다.
서두에서도 말했듯 지금도 오늘 첫 걸음을 땐 행자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행자로서 가질 수 있는 욕심이 있다면, 제 분위기로 만든 넉넉한 도량에서 지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기를 바리는 마음이다.
‘삶이 버거워 지칠수록 기도 정진합시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