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
먼저 화엄경의 보살문명품에 이런 게송이 있다. “여인수타보如人數他寶 하는데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인 듯하여 어법불수행於法不修行이면 다문역여시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이 남의 보배를 헤아릴 적에 자신에게는 반푼어치도 이익이 없는 것처럼 출가하였더라도 많이 듣기만 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이 게송은 제방 납자들의 애송구라서 군말이 필요 없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나의 사미계사이며 노스님이신 경봉 큰스님의 발심인연구發心因緣句이기 때문이다.
노사老師께서는 통도사에서 강원을 마치고 종무소에서 소임을 살면서 화엄경의 이 게송을 우연히 읊조리다가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 며칠 동안 침식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걸망을 챙겨 놓고 다음날 새벽이 되기 무섭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행각의 길로 나섰고, ‘선방 첫 철’을 이 곳 해인사 선열당에서 나게 되었다. 반 철이 채 안되어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일본인 순사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뒷문으로 빠져 달아나 백운동을 넘어 김천 직지사로 줄행랑을 쳤다. 이 때 일본 순사는 통도사 종무소에서 사무 인계를 하지 않고 떠났다는 핑계로 스님을 잡으려고 경찰을 동원한 것이다.
그 뒤로 노사의 정진은 일구월심 이어졌고 마침내 1927년 동짓달 어느 날 경봉선사는 통도사 화엄산림에 법주로 법문하며 용맹정진을 하던 중, 영축산 극락암의 삼소굴에서 오도의 소식을 전하셨다. “아시방오물물두我是訪吾物物頭 목전즉견주인루目前卽見主人樓 가가봉착무의혹呵呵逢着無疑惑 우발화광법계류優鉢花光法界流,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고 보니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있는 것을. 허허 이제야 만나 의심 사라지니 푸른 연꽃 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네.”
지난 10일(음력 5월 27일)에 스님의 추모제를 지냈으니, 올해가 스님 가신지 17주기가 된다.
비단집과 동장승
노사께서 하신 법문 중에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할까 한다.
비단장수 왕서방이 비단짐을 지고 시골 산길을 걷다가 고갯마루에서 디리쉼도 할 겸 묘터 옆에서 낮잠을 자다가 비단을 통째 잃어버렸다.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지만 어디다 호소할 데가 없었다. 죽을 용기를 내어 그 고을의 동헌을 찾았다. “사또 나리, 제 전 재산인 비단짐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뒤 사정을 전해 들은 고을 원님은 생각다 못해 직접 심문을 하며 목격자가 있는지를 물었다. “묘 옆에 서 있던 돌장승이나 보았을까?” 그랬더니 원님은 곧 나졸들을 시켜 돌장승을 파오게 하였다.
동헌 마당에서 돌장승을 상대로 증인 심문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이 희한한 구경을 하려고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동헌으로 모였다. 증언할 리 없는 돌장승에게 이윽고 곤장이 가해지고 옥에 가두라는 사또의 엄명이 떨어졌다. 동헌 마당에 모인 구경꾼들이 고을 원님의 기이한 행동을 비웃으며 수군거리고 때로는 비난도 하였다. 그 때 원님은 다짜고짜로 수령의 정시를 보고 비웃고 수군거린 사람을 무더기로 하옥시켜 버렸다.
상소가 빗발쳤으나 고을 수령은 묵묵부답, 이윽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시장에 가서 비단을 한 필씩 구해다가 이방에게 뇌물로 진상하여 수령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였다. 마침내 수령은 다른 뇌물은 모두 사양하고 오직 비단만 받았다.
다음날 일찍 왕서방을 동헌 마당에 나오게 하여 비단짐을 모두 찾게 하고 남은 비단은 아직 석방되지 않은 사람과 함께 내보냈다는 설화이다.
예나 지금이나 옷로비니 뇌물 공세니 하는 것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나라가 시끄러운 로비가 있는가 하면 도둑을 잡기 위한 보살의 선교 방편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너무나 다르니, 탐관오리와 청백리가 십만팔천 리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참으로 이런 지혜를 자재롭게 쓰는 경지가 바로 원효 선사의 “무리지지리無理之至理요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니, 곧, 이치 없는 것 같은 것이 지극한 이치요, 그렇지 않을 것 같은 것이 크게 그러한 경지”나 “남산기운南山起雲 북산하우北山下雨 남쪽 산에 구름끼니 북쪽 산에 비가 내린다”의 소식이 아닐까?
또 더 나아가 현수품에서는 말하였다. “혹어동방입정정或於東方入正定하여 이어서방종정출而於西方從定出하고 혹어서방입정정或於西方入正定하여 이어동방종정출而於東方從定出하며….. 동자신중입정정童子身中入正定하여 장년신중종정출壯年身中從定出하고 장년신중입정정壯年身中入正定하여 노년신중종정출老年身中從定出이라. 혹 동방에서 바른 선정에 들어 서방으로 출정하기도 하고, 혹 서방에서 바른 선정에 들어 동방으로 출정하기도 한다. 동자의 몸으로 바른 선정에 들어 장년의 몸으로 출정하기도 하고, 장년의 몸으로 바른 선정에 들어 노년의 몸으로 출정하기도 한다.”
일이삼사오륙칠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한번은 노사가 새해 정초를 맞아 법문을 하였다. “화엄경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화엄경의 일곱 글자인 일이삼사오륙칠은 우리 얼굴에 다 쓰여져 있듯이 눈이 두 개요 콧구멍이 둘이요 양쪽 귀가 또한 둘이요 입이 하나이니 모두 일곱이 ‘바를 정자正字’로 쓰여져 있다. 눈으로 바로 보고 귀로는 바른 소리를 듣고 코로는 바르게 냄새 맡고 입으로는 바른 소리를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화엄경 수행을 바르게 닦아 나가는 길이다.”
참선이나 염불, 간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선한 일을 행하고 남을 위한 보살행으로 일관하는 것이 보살의 만행이다. 바로 눈앞에 내 주인공이 있듯이 화엄의 수행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삼업을 잘 닦는 데 있다는 말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