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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정법사 기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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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4년 09월 151호
“정말 수행을 잘하신 스님이랍니다. 스님을 아는 분들의 한결같은 얘기가 그렇습니다.” 이번 호 ‘호계삼소’의 대상으로 기후스님이 선정되었음을 알리면서 편집장 스님이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늘 그랬지만 수행승을 만나는 일, 게다가 수행을 철저히 했다는 선지식 앞에 서는 일이란 범속한 세상사에 발을 들여 놓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긴장되고 주눅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삼계삼소’를 통해 눈 밝은 수행인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여 어느 때보다 꼼꼼히 질문을 준비하고 큰 걸음으로 삼십 년 한길을 걸어 온 한 분의 수행승 앞에 섰다. 호주 시드니 정법사 주지 기후基厚. 기후스님이 기자에게 건네준 명함내용의 전부다. 스님의 겉 모습과는 달리 옹색하게조차 느껴지는 명함을 받아 들며, 무릇 기자란 명함의 활자 밖 여백에서 한 사람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리란 생각을 해 보았다. 스님은 기자의 이러한 작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성의 있고 진진하게 응해 주었다. 한 수행승의 솔직 담백함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암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했다.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던 암자에서 삼 년 남짓 경을 익히고 절의 허드렛일을 하며 중물을 들이고 있을 무렵, 주지 스님이 대처승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행에 철저했던 스님이어서 충격이 컸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입을 가사까지 준비해 둔 참이었으나 떠난다는 내용의 쪽지 한 장을 남겨 놓고 짐을 꾸려 통도사로 갔다. 행자 시절에 익힌 인욕과 하심은 뒷날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스님을 가르치던 강사 스님이 말씀했다. “기후는 강사 준비를 해라.” 평소 성품이며 소질, 장래성을 눈여겨 보던 강사 스님의 명이었으나, 스님은 자신이 남 앞에 나설 만한 실력이나 주변이 못 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을 했다. 그러나 강사 스님의 명은 단호했다. “아니요, 준비하세요.” 그렇게 해서 엉겁결에 학인 스님을 가르치는 중강 소임을 맡았는데, 스님의 수행 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던 글을 다루는 전생의 업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통도사 강원에서 경전을 연구하며 학인들을 가르치던 스님은 한평생 목숨을 걸고 수행한 스님들의 말씀을 말로만 배우는 것이 그분들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후학들 앞에 선 사람이 경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후학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통도사를 떠나 해인사 강원 사집반에 방부를 들였다.
서장을 바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해인사의 강사 스님들은 서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통도사에서 강원을 마치고 중강의 소임을 맡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런 저런 오해와 자연스럽지 못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눈 내리던 겨울날 해인사를 내려와 향곡스님이 계신 선방으로 갔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다보면 예전에 공부할 때 몰랐던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내 자신이 깨우친 것들을 후배들에게 부처님 말씀에 가깝게 전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강원으로 내려왔고, 경전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다 보면 결국 종교란 논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데 하는 학문에 대한 허구가 발견되어 다시 선방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수행을 잘 하려면 과거의 선근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선근이 약해 이런 과정을 십 년 동안 되풀이하며 업력에 휘말렸지요.” 강원과 선방을 오가는 것이 되풀이되면서 스님은 자신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특정한 자리나 일이 아니면 중심을 잡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기림사 북암에서 육년결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갈망을 짊어졌다. 통도사 중강 두 번, 해인사 중강 한번을 거치고 도솔암, 고암사 등지의 선방에서 정진한 뒤였다. ‘육년 묵언정진’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끝없이 끝없이 침잠해 들어갔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도, 무엇인가 무르녹아 섬광과도 같이 터지는 전율이나 개안도 있었을 살신의 세월, 우리는 육년 묵언정진이라는 표현 앞에서 숙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끝없는 상상과 함께 의문도 많다. 육 년 동안의 묵언 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 변화, 자기 극복, 깨달음, 그 행위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의미 등등.
육 년 동안 스님의 안에서 무르익은 것을 내놓아 보라는 꼭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야 성에 차는 습에 젖은 기자의 어쩌면 당돌하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했을 이렇나 물음에 스님의 답변은 한 점 군더더기 없는 자연스럼움 그대로였다. 스님은 후배 스님 두 분과 함께 기림사에 둥지를 틀고 자신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에 올랐다. 처음엔 주변에서 오는 문제라든가 세 사람의 관계에서 생기는 짜증 같은 것도 있었고, 한곳에서 말없이 육 년을 어떻게 지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삼 년쯤 정진을 계속하고 나니 갑갑한 마음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식이 늘 상대적인 두 가닥 흐름으로 흘렀죠. 이 사람이 좋고 저 사람은 싫다, 또는 이 곳이 좋고 저기는 싫다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인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마음이 안정되더군요. 안정된 가운데 의식의 흐름을 들여다 보니 마음의 본질이 맑아지고 밝아지면서 전체를 수용하게 되었지요. 글쎄요, 그 밖에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세계를 표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청정하게 함으로 해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그러므로 해서 주변 무정의 생물까지도 고맙게 생각되고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백한 스님의 말씀엔 서정성이 배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 한 포기도 아름다웠던 나날들. 서리를 맞으며 여문 대추 몇 알을 호주머니에 넣고 청량한 공기, 맑은 마음, 경쾌한 걸음으로 경내를 한 바퀴 도는 수행자. 때론 문 밖의 차 경적 소리에 온 마음이 쏠리기도 했고, 깊은 밤 문밖의 차 소리에 사람이 그리워 문을 열었다가 옆방 스님의 코고는 소리임을 알고 쓸쓸히 문을 닫았던 외로운 구도자. 누군가 묵언정진중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을 밀치고 들어와 얼마나 애를 쓰냐는 얘기를 듣고도 싶었던 날들.
사정이 듬뿍 배어 있는 말씀은 스님의 지난 시간들을 담박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 욕구, 망상과 시비를 제공하는 상념을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나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지요. 역시 ‘자기’라고 하는 뿌리를 캐내는 것이 육 년 동안의 세월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죠.” 묵언정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에 하나가 글을 써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스님은 지적한다. 말은 망상을 일으키는 소지가 되기 때문이다. 묵언을 하는 이유는 침잠의 세계를 많이 가져 본래 청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려는 것. 그러므로 스님은 정진을 야무지게 하려면 묵언 기간을 지낼 수 있는 의식주를 들여 놓고 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호기심이나 상을 내려고 시작해 묵언 흉내를 내려 한다면 대중 속에서 평범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게 스님의 말씀이다. 물론 스님도 망상이 일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때로 글로 감정을 교환하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기도 하고 뿌듯했던 경험이 있다. 혹은 비가 샌다거나 큰절과의 관계가 있을 때도 더러 글을 써 의사를 표현한 일이 있다.
그러나 스님은 이러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스님은 육 년 동안 꼭 한번 소리내어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무슨 일로 큰절에 잠깐 내려갔는데 멀리 우체부가 보이더란다. 그래서 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쏟아놓은 말 한마디. “안녕하십니까?” 이 얘기 끝에 우리는 모두 웃었고, 스님의 삼십 년 세월중 육 년 묵언 기간의 얘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마도 그 길이는 우리가 육년 묵언정진이라는 어려운 수행과정을 지나온 수행승을 바라보며 느끼는 기대치와 비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스님의 육년 묵언정진의 세월, 더 나아가서는 지금도 토굴에 앉아 선정에 들고 있을 이름 모를 수행인들의 사회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스님의 허심탄회하고 솔직담백한 말씀에 힘입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선사상에 있어 가장 사회적인 요소는 스스로 빨리 깨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참여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종교인의 순수한 의식일 뿐 사회적인 의미는 생각치 않습니다. 지금도 나는 진리적인 입장에서 나를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은 극히 미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맑은 마음이 이 우주의 주체가 된다고 했을 때는 어느 것이 더 주체에 가깝냐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스님의 호주행은 좀 뜻밖이다. 스님은 호주행을 설명하려고 우리를 저 눈내리는 태백산맥의 골짜기로 끌고 간다. 기림사 북암에서의 육년결사가 끝나자 스님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정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태백산 줄기의 오십 리 계곡 구마동. 그 곳에 얼기설기 초가집 한 채를 지어놓고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한 가부좌를 틀었다. 그 해 겨울 구마동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어느 날 설핏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밖이 훤해 있었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싶어 문을 여니 흰 눈 위에 비친 푸르스름한 달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도 희고 눈도 흰데 내 마음만 맑지 못하구나.”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 반. 달빛에도 눈이 녹는지 지붕 위에선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급히 지어 허술한 벽으로 한겨울의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고, 스님은 그날 이런 생각을 문득 했다. 해제하면 대만이나 호주를 다녀올까 하는.
시드니의 정법사에는 대여섯 명의 호주인을 비롯해 스무 명 남짓의 신도가 있다. 일요일마다 법회를 보고 있는데 스님은 호주에서 느낀 것이 많단다. 우리 땅 넓이의 서른다섯 배에 인구가 천팔백만 명인 호주. 입지 조건이나 사회 구조가 원칙을 자연스럽게 지키게 하고, 그러함이 그들의 삶 자체를 불교적이게 한다고 스님은 말씀한다. 나무 한 그루라도 육십 센티미터 이상이 되면 자르지 못하게 하는 사회제도, 그 속에 사는 그들의 언행은 불보살에 가까울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스님은 반문한다. 지난 칠월초 한국에 다니러 온 스님은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서 푸른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숱한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물질에 밀려 바쁘고 어지럽게 살아가는 저들을 위해 부처님의 제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내년쯤 스님은 호주에서 돌아올 생각이다. 돌아오면 태백산 구마동에 조그만 집을 짓고 푸른신호등이 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이다“인간의 심성을 가장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흐트러진 자기와 감추어진 본래의 자기를 만나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다소나마 어느 세계에 대해 불신했던 마음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이삼 년 뒷면 이런 일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무더위 속에서 문득 느끼는 한 줄기 가을 바람과도 같다.

고등학교 삼 년 세월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가장 후회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골몰하다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선 지 삼십 년.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많은 선업을 쌓아야 중이 되는 복이 가능하다는데. 과연 인간이 한번 가볼 만한 길이었을까?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살아온 길에 스스로 풀어냈어야 할 매듭은 없었을까?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스님의 말씀, 때론 바깥 세상을 마음으로나마 기웃거렸고, 죽어도 다시 이 길을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수행의 길이 그냥 자연스러울 뿐이며, 이성에 대한 정염이 스스로 풀어야 했던 매듭이었고, 나이 사십이 지나니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윤곽이 잡히더라는 스님의 말씀은 단 한번도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이 없었으며, 죽어도 다시 이 길을 걷겠다는 어느 큰 스님의 말씀보다 더 큰 위안이 된다. 스님만이 가지는 솔직함 때문이리라. “호주에서 돌아오는 대로 태백산에 들어가 흩어진 마음을 예전에 묵언정진하면서 가졌던 맑은 상태로 돌리려 합니다.” 인터뷰를 끝낸 스님은 걸망을 들고 일어섰다.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자기 공부’라는 스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곤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수행의 길에 성큼 큰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