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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그 삶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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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배평모 1994년 08월 150호
국민의 성숙된 문화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그 나라가 지닌 산업 시설이나 노동력, 그리고 모든 자원이 문화에 속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 역량이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국민의 높은 의식을 뜻한다.
작은 예를 들어 행락지에서 쓰레기를 챙겨 가지고 오는 것과 그냥 두고 오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쓰레기를 치우려면 사람과 장비가 동원될 것이고, 결국 그만큼 국력이 소비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낙동강이 오염되어 영남 지역 주민들이 식수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식수뿐만이 아니라 공업용수로도 적합하지 않아서 일부 공장에서는 물을 정수시키는 데도 막대한 돈이 든다고 한다. 결국 상품의 생산 단가가 높아져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큰 강이 지니고 있는 자정 능력마저 인위적으로 막고 거기다 앞다투어 강물을 오염시켰으니 그 결과에 대한 피해를 누가 입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비단 낙동강뿐만이 아니다. 조금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강과 냇물이 심각한 지경에 다다른 것만은 분명하다. 이 강과 냇물을 되살리려면 또 얼마나 국력이 소모되어야 할지.
문화란 의식주를 포함해서 기술, 학문, 예술, 도덕, 종교 등 물심양면에 걸쳐 생활 형성 양식과 내용을 포함한다고 볼 때, 앞서 말한 문화 역량을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제 우리는 자연이 오염되고 파괴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마음이 오염되고 파괴된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무감각한 것 같다.
얼마 전 한 패륜아가 부모를 살해했을 때 온 국민은 경악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예견된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이전에 늙은 부모를 제주도나 그보다 더 먼 곳에 버리고 오는 신종 고려장이 행해지고 있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자연보호라는 말이 구호처럼 번져서 유치원 아이들조차도 그 말을 쉽게 입에 담는다.
“자연보호 ― 우리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우리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 주제에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하고 자가당착적이다. 이것은 우리네 삶이나 생각이 반자연적인 데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행동의 최상 경지를 “자연스럽다고 한다. 아무리 고상하게, 우아하게, 품위 있게, 근엄하게, 위엄 있게, 당당하게 하려 해도 자연스럽지 못하면 그것은 억지이고 과장이고 흉내일 뿐이다. 진실의 뒷받침 없이는 결코 자연스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반자연적인 현상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집단 속에 내재된 구조적인 형태에서 개개인의 정신적 가치와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과 형태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의 마음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 훨씬 앞서는 삶의 터전이다.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삶의 터전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면 그 결과에 대한 피해는 누가 볼 것인가. 산이 파괴되고 강과 바다가 오염되자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조차 “자연보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한 피해를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들 삶의 터전인 마음을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가시 돋친 독선과 비방의 말에서부터 이기와 횡포의 날을 세운 행위, 더 나아가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역사적인 부조리와 흉악하고 매국적인 범죄에 이르기까지. 강물을 오염시키고 나서 그 피해를 우리가 당하고 있듯이 이제 우리는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산이나 강을 되살리자고 거창하게 구호를 외치며 온갖 방법을 모색하면서도 그보다 우선 우리들 마음을 되살리는 데 소극적이며 심지어는 외면조차 하고 있다.
작년부터인가 “국토 대청결 운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무원들과 여러 단체들이 산과 들에서 쓰레기를 줍는 행사를 거창하게 벌이고 있다. 쓰레기는 줍는 것보다 안 버리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다. 그렇다면 “국토 대청결 운동을 하기 전에 “마음 대청결 운동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아침 신문의 “조계종 개혁 ‘대헌장’ 막바지 산고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조계종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반가운 일이다. 이번 조계종 개혁이 있기 훨씬 전부터 불교계는 환골탈태의 개혁이 있어야 했기에 더욱 반가운 일이다. 이것은 비단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계도 마찬가지리라.
종교가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어 통상의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일을 해결해 준다고 볼 때에, 오늘 이 혼탁한 사회에서 희망을 갖고 기댈 수 있는 것이 종교말고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많은 스님과 성직자들은 오히려 반종교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신자들을 호도하지는 않았는지를 깊이 자성해야 하리라. 세계 최대니 동양 최대니 하며 세운 불상들이 어디 말썽 많은 동화사 약사여래대불뿐이며 보는 사람의 기를 누르고 높고 큰 교회당은 어디 한두 곳인가. 중세의 성채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성당 역시 곳곳에 서 있다. 기복이라는 극도의 이기심을 부채질하여 세운 불상이나 교회당이나 성당이 과연 얼마만큼의 자비와 사랑을 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시골 할머니가 시주한 보리쌀 한 되나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때묻은 지페 한 장을 소중히 여겼다면 어찌 그 큰 불상을 세우고 웅장한 교회와 성당을 지을 수가 있었으랴. 우리 국민은 절반 이상이 무슨 종교든 믿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바른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 사회의 자정 능력은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오염의 악취를 곳곳에 풍기고 있다. 저 낙동강 하구에 쌓아 놓은 거대한 하구언처럼 혹시라도 스님과 성직자들이 자정능력을 막는 둑을 교계 내에 쌓고 있지는 않은지. 만에 하나 그러한 둑을 쌓았다면 이제부터라도 과감히 허물어야 하리라. 다행히 조계종 내에 버티고 있던 둑이 허물어져 그 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크다. 비단 불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도 한결같으리라. 개인의 존재 가치는 정신 세계에서 그 의미를 찾고 국가와 사회는 그 정신에서 창출해 낸 문화의 역량으로 역사의 위상을 올바르게 세울 수가 있는 것이리라. 흐르는 강물처럼 역사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 강물이 오염되고 썩은 것은 우리들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오염되어 흐르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자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곧 우리들 마음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바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