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면 진도리의 ‘무주 생태마을’이 세간에 알려지기는 지난 해부터 일 것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주최로 이태에 걸쳐 열린 ‘생태마을 만들기’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실례로 삼은 곳이 이 곳이었다. 두번째 심포지움에서 귀농운동본부는 그 동안 녹색연합에 의뢰하여 꼼꼼히 조사한 이 지역의 지형, 식생, 기후 동의 조사 결과와 함께, 생태마을에 필요한 건물과 시설, 생산 방식이나 생활 양식 등에 대한 전문가들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여 ‘생태마을 기본설계도’를 선보였는데, 이로써 무주 생태마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생태마을이란 전통적인 우리의 두레 공동체 마을에 다름 아닐 터다. 다만, 귀농운동본부의 이병철 본부장에 따르면, 두레 공동체가 마을 주민들의 상부상조와 호혜 평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협동의 지혜로 이루어진다면, 생태마을이 지향하는 바는 거기에 더하여 도시와 농촌, 사람과 자연의 생태적 관계를 고려한 공존과 조화의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즉 도도한 산업자본주의의 물결에 밀려 나날이 깨어져 나가고 피폐해지는 농촌을 살림으로써 삶의 기반인 식량을 우리 손으로 자급자족함은 물론이요, 전통마을이 품고 있던 상부상조와 상생순환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윤리와 문화를 실천하고 되살리자는 것이라 하겠다.
외국에서는 이미 생태마을이나 생태도시의 사례가 많다. 특히 유럽은 땅이 좁고 환경의식이 높아 일찍부터 생태학적인 개념을 도시와 농촌에서 적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온실 가스 방출량을 줄이기 위해 유럽연합이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 을 위한 제도를 다양하게 시도하며 재정 지원, 정보 교류 등도 활발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생태적인 생활 공간으로 마땅히 내세울 만한 곳이 없으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제도적 지원도 허술하다. 전국에 공동체 마을이 없는 바 아니나, 거개가 개별적,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시민 단체들이 힘을 모아 사회적 구호로써 “생태마을 건설”을 내세우고 실천하는 최초의 사회운동이라는 점에서 무주 생태마을은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 계획에는 무주군에서도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고 있어 더욱 뜻 깊다.
이 운동의 한가운데에 허병섭 목사가 있다. 목사이며 도시 빈민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그가 이십여 년의 빈민운동을 접고 진도리에서 새로운 ‘생명사상’을 일구고 있으니, 최소한 십 년은 걸릴 생태마을 일구어 나갈 길에 그가 앞장을 서고 있다.
88년에 목사직을 반납했으되 여전히 목사로 불리는 그는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월곡동에서 헌신적인 빈민운동을 벌였다. 또한 그가 세운 동월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교회로서 우리 현대사에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된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아이들 놀이방과 공부방을 차리고 무료진료소를 갖추었으며, 교회 벽에는 벽화를 그려 넣고, 판소리나 국악을 이용해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는 등, 상식적인 목회 활동의 내용과 범위를 벗어난 그의 열성은 오로지 주민과 함께 하는 교회를 이룸으로써 너나없이 평등하게, 더불어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이었을 터다.
목사직을 반납한 것도 오로지 주민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였으며, 그 뒤에 그는 월곡동 ‘건축일꾼 두례’라는 도시 빈민 자활조직을 만들어 목사가 아닌 목수로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 뒤에 책으로 쓰이고 영화로 만들어진 ‘어둠의 자식들’이며 ‘꼬방동네 사람들’이 이 달동네와 허목사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렇듯 도시 빈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가득 찼던 이가 96년 4월. 진도리에 내려온 것은 개인적인 “깨달음과 반성”에서 비롯된다. 그가 몸 바쳐온 빈민운동이 결국에는 ‘거대한 도시 산업 구조의 부속품을 만들거나 그 부속품의 기능을 도와주는 기름칠과 수선의 역할 이상일 수 없다’는 깨우침이 든 것이다. 이 도시적 삶에 대한 회의는 산업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생태적 자아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후배들과 함께 95년에 가족 동반으로 전국의 유기농업, 자연농업의 현장을 두루 찾았다. 김제, 부안, 해남, 거창, 의성, 봉화 등지에서 만난 농부들에게서 그는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으니, 미래를 올 곧게 준비하는 그들의 삶은 “이성과 논리, 합리성이 아니라 생태적 감성이 삶의 바다로 항해하게 하는 돛대”와 같은 것이었다.
노장 사장을 훑어보고, 생태학적 철학도 접했다. 농장에서 예비 수업을 하고 집 짓는 견문을 얻는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모임’을 만들어 관련 강의를 들으면서 한 해 착실히 귀농 준비를 했다. 이때 그는 ‘밀알노동사장’이란 소중한 생각을 얻는다.
성경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했으니, 즉,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 이루어지는 자연계의 공생과 공존 현상에서 그는 절절한 깨우침을 얻었던 게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속에서 자연 만물이 지닌 자기 회생 정신과타자를 위한 존재성을 발견했으니, 생태계는 신비한 밀알노동의 결집체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이란 자연 만물의 공생 관계를 돕고, 뭇 생명체들의 공동체성을 살리고 확대하는 일이며, 나아가 스스로 이들과 한 가족이 됨으로써 생태적 공동체를 이루도록 해야 할 터인즉, 이 한 생각을 그는 앞으로 제 삶의 심지로 삼았다.
이듬해 4월에 진도리로 들어왔다. 경관이 수려하되 산업적으로 개발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개발될 여지가 없는 곳, 맑은 햇빛과 물이 풍부한곳, 무엇보다 땅값이 싸서 알마춤한 곳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으니, 진도리의 진眞과 도道는 그즈음 그를 사로잡고 있던 화두였다. 생명의 농업을 일구기로 마음먹은 그로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한 예수의 말씀을 새삼 일깨우게 하는 반가운 인연이었던 셈이다.
세 해 동안 진도교회가 있는 아랫마을에 정착하여 빈집을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다. “풀농사 짓는다는 순박한 마을 주민들 걱정 들어가며 유기농을 고집하고, 작물들을 자식처럼 보듬으면서” 키워냈다.
한편으로는, “서울 생활의 찌꺼기인 운동의식”을 온천히 떨쳐버릴 수 없어서, 정기용 건축연구소에 의뢰하여 마을회관을 흙으로 짓는 일을 주선하는가 하면, ‘밀알터’라는 소식지를 돌리고, 인근 진안군의 동향초등학교 학선분교 임대에 앞장섰다. 이 학교는 이후 서울이나 인근도시의 교회 및 사회단체의 수련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앞으로 생태농업을 소개하는 등 지역 연대의 장으로 활용활 생각이다.
‘푸른 꿈을 가꾸는 학교’를 준비하는 교시들이 옛 진도초등학교를 매입하는 일을 거들었고, 나아가 ‘부적응아를 위한 대안학교’였던 애초의 이념을 생태교육 쪽으로 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니. 결국에는 이 학교의 김창수 선생, 김경남 목사와 함께 푸른꿈 고등학교 설립 공동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런 소식들이 세간에 알려지고 관심을 끌자,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생태마을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로서는 생태적 자아를 생태적 공동체에서 구현할 계기가 된 셈이겠다.
평소 눈여겨둔 윗마을의 봉화산 자락 십만 평을 마을터로 잡고 먼저 일곱 명이 공동 투자하여 육만오천 평을 샀다. 십 년 계획의 첫 해가 올해로, 현재 살림집이 두 채 섰고, 또 한가족이 집을 짓고 있다.
그는 옛 이력을 살려 집을 손수 지었다. 폐가를 헐 때 나온 목재로 뼈대를 세우고 흙벽돌로 벽을 만들었으며, 억새로 지붕을 올렸다. 부인의 가사노동을 고려하여 부엌은 입식으로 마련하였고, 한 해 찾아오는 손이 천여 명은 되는지라 거실 겸 서재를 널찍하니 마련했다. 약간의 호사를 부렸다면 마주보이는 산줄기들을 끌어오기 위해 그 방 전면에 통유리를 맞춰 세운 것이다.
이래저래 “위에서 내려다보면 초가요 안에 들어오면 아파트”인 “어중띠기”라 자평하지만, 자연생태계를 유지하며 오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생태마을의 원칙을 충실히 좋은 집이니, 예컨대 세면장 겸용 뒷간은 집 안에 있되 재래식으로 설치하여 퇴비 걱정을 덜었고, 생활하수를 처리하기 위해 미나리 심은 웅덩이를 마당 가에 따로 만들었다.
생태마을 기본 설계도를 잠깐 들여다 보면, 주택을 포함한 마을의 모든 건축물은 흙이나 나무로 지을 것이며, 그 모양은 한옥이나 초당, 또는 자연 능선과 조화되는 타원형 지붕을 갖추게 될 것이다.
태양광, 태양열, 바람, 물 등의 자연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전기, 난방, 취사를 해결하도록 하며, 오폐수 자연정화 시설을 갖춘다. 쓰레기를 최대한 억제하며, 음식물 쓰레기나 농사 부산물, 가축 분뇨 등은 사료와 퇴비 등으로 이용한다. 빗물도 모아 생활 용수와 농수로 이용한다.
공동시설은 필수적인 것으로, 마을센터, 방문객 시설, 공동작업장, 공동 세탁장과 공동 목욕탕을 만들며, 건조창고. 보관창고, 농기계 창고 등도 주민 공동으로 운영 관리하도록 한다.
장기 계획에는 이밖에도 주변 자연생태계를 유지 관리하는 방안과 함께 마을이 자리잡은 뒤 유기농업의 과학적, 학문적 연구 마을로서, 생태관광지로서 마을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들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돈”이겠다. 올 하반기에 착수할 상하수도 공사에는 무주군의 지원이 있을 예정이라지만,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은 첩첩하기만 한데, 정작 허병섭 목사는 크게 마음쓰지 않는다. “돈문제에 대한 해결의 답은 없고, 생기면 하고, 못하면 늦게 되는 거지요.”
그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을을 이룰 사람들이다. 그것 “생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니, 즐거이 자연의 생태공동체에 합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이들이 모였을 때, 공동체 의식도 다듬어지고 비로소 온전한 생태마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 힘으로 될 일인가.” 계획을 세우고 틀을 짜고 목청 높여 알리는 그런 운동 논리는 버린 지 오래인즉 이즈음 그의 마음자세가 이렇다.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움켜잡는 자는 잃는다” 하지 않던가 자연이란 “스스로 있는 것”이니, 제 삶의 자리를 자연의 뜻에 둔 그로서는 그저 물 흐르듯이 “무위이화無爲以化”의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등겨며 갯묵 짊어다 논에 나르고, 틈틈이 집 짓는 일 도우며 그가 즐기는 꿈이 있다. 무주군 전체가 생태마을이 되고, 좀더 욕심을 부려보라면 21세기 대안문명의 발원지로 서는 꿈이다.
현재 생태마을 터를 중심으로 반경 8킬로미터 안에는 귀농한 젊은 식구들이 스무 가구쯤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그를 보고 무주로 들어온 이들이지만 생태마을 구성원으로 참여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서,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농사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며, 필요할 때 품앗이를 하고, 가끔 공부도 같이 하며 풍물도 배우고 애경사를 함께 한다.
설계도 안의 마을만이 생태 공동체는 아닐 터인즉, 이 젊은 귀농 식구들과, 생태 교육을 실천하는 푸른꿈고등학교가 같은 무주 땅 안에 있으니, 그 꿈이 어찌 허황될까.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되 서로 오갈 일 없는” 자립자족한 그 마을에서는 삶 자체가 교육이어서 어른이 아이에게 배우고, 아이가 자연에서 배우며, 마을의 모든 생명체가 밀알노동으로 남을 섬기며 공존공생하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