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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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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이야기 - 원철 1994년 09월 151호
근본율과 심지계
만동자鬘童子라는 이름을 가진 호기심 많은 제자가 부처님께 심각한 모습으로 질문을 한다. 즉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世有常無常)하는 시간적 한계에 관한 문제 그리고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世有底無底)하는 세계의 공간적 한계에 관한 문제와, 목숨과 몸은 같은가 다른가(命則是身 命異身異)하는 영혼과 육체에 관한 문제 등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우리의 인식 영역 밖의 문제를 인식 영역 안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방법론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무기無記(판단 자체를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호기심은 “독화살을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독화살을 분석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며 수행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라고 꾸짖고 있다. 이런 대립된, 그러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명제를 우리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 부른다.
율장은 겉으로 나타나는 위의威儀에 비중을 두는 근본율과, 내면적인 마음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는 심지계心地戒라는 두 축을 밑바탕으로 이루어져있다. 때로는 근본율이 가지는 형식주의와 심지계가 가지는 내용주의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율장의 이율배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율장에 나타나는 이율배반은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만동자의 의문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우팔리 존자와 유마거사
살생계와 음행계를 동시에 범한 두 수행자가 초췌한 표정으로 우팔리 존자를 찾아온다. 앞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우팔리 존자는 “참회할 방법이 없다(不通懺悔)” 하며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두 죄목이 모두 4바라이에 해당되어 교단에서 추방되는 중죄이다. 근본율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조치이다. 더욱더 황망해진 이들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유마 거사가 이들을 발견한다. 그 까닭을 듣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준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具空
시즉명위진참회時卽名爲眞懺悔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으며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만 없앤다면 죄 역시 없어지기 마련이다.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없어져서 모두가 공空해진다면 그 때가 바로 진정한 참회라고 하여 유마 거사는 심지계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을 열어 준다.

여인을 업고 물을 건너 준 선객
두 선객이 길을 걷고 있었다. 마침 소나기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급작스럽게 불어났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너려는데 한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선객은 “여자와 신체를 접촉시키지 말라” 는 계율에 충실하고자 그냥 모른 체하고 혼자 성큼성큼 건너갔다. 다른 한 선객은 자비심을 내어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 주었다. 한참 길을 가다가 혼자 개울을 건너간 선객이 한마디 거들었다. “상황이설사 그러하더라도 어찌 수행자가 여인을 업는단 말이요” 하고 근본율의 형식주의 입장에서 그 허물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 선객은 “난 아까 이미 여인을 등에서 내려놓았는데 그대는 아직도 업고 있구려”하여 심지계의 입장에서 오히려 상대방이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힐난하였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백월산 동쪽 골짜기에는 노힐부득의 토굴이, 북쪽 골짜기에는 달달박박의 토굴이 있었다. 둘이서 공부를 약속하고 삼 년이 될 무렵이었다. 해질 무렵 젊은 낭자가 달달박박의 토굴을 찾아와서 자고 가기를 청한다.

갈길은 먼 데 저물어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마을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하노니
자비로운 스님은 노하지 마소서
行逢日落千山暮
路隔城謠絶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달달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근본율에 충실하자는 입장이었다. 할 수 없이 낭자는 근처의 노힐부득의 토굴로 가서 다시 하룻밤을 청한다. 노힐부득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요.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하고는 그녀를 암자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밤이 되자 노힐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을 했다. 여인과 같이 있는 거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계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율배반의 양면성과 그 극복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근본율과 심지계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인도에서의 우팔리 존자와 유마 거사의 안목 차이와 중국의 두 선객의 관점 차이 그리고 신라의 두 토굴 스님의 입장도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들이 부딪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근본율이 가지고 있는 형식주의는 자칫하면 “계율을 위한계율”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 이렇나 한계의 해결을 위하여 “계 제정의 정신”을 강조하는 심지계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은 완전히 도외시한 채 “마음에만 허물이 없으면 된다”는 식의 너무나 추상적인 심리주의 형태로 전락해 버린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결국 근본율의 형식주의도 없어져 버리고 심지계의 마음 내용도 죽여 버리는 부정적 측면의 극대화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이를 범망경에서는 “행동은 유위有爲에 걸려 있으면서 입으로만 공空하다고 하지 말아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근본율의 입장에 충실할 것인가, 심지계의 입장을 견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상황마다 수행자 개인개인의 결정영역이다. 다만 제대로 된 안목과 율장에 대한 애정만 있다면, 어떤 태도이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형식이 필요한 곳은 근본율로 닿아갈 것이며, 마음이 필요한 곳은 심지계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심지계에 충실했던 노힐부득은 미륵불이 되었고, 근본율에 충실했던 달달박박 역시 무량수불이 되어 모두 성불했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