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력을 부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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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이야기 - 원철
1994년 12월 154호
교화의 최고 방법은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교세를 획기적으로 증장시킬 수 있는 묘안을 짜내다 보면 결국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올림픽경기장이나 여의도 광장에 수십만 명을 모아 놓고 도력 있는 스님 몇 분 모셔다가 환희심 나는 몇 가지 신통력과 함께 꽃비라도 내리게 하면 모르긴 해도 이튿날부터 대웅전이 미어 터질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든 게 간단해진다. 신통력을 얻을 수 있는 수행만을 의도적으로 열심이 한 뒤에 “신통력 공연”을 주기적으로 열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과연 옳은 포교방법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이 아무리 불교세를 비약적으로 늘려 줄 수 있는 비방이라도 정법에 맞지 않다면 외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빈두로 존자의 신통력을 꾸짖다. 부처님 당시에 각 종교 지도자들은 신통력을 즐겨 사용한 모양이다. 재력이 있는 한 거사가 가장 좋은 나무인 전단 향으로 발우를 만들어 그 안에 얼마쯤 보배를 담은 뒤에 뜰 안의 높은 깃대에 달아 두고는 누구든지 신통력을 써서 가져가라고 하였다. 발우도 탐나고 또한 재물도 가질 수 없이 모두 나섰으나 신통력이 미치지 못하여 결구 포기해야만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빈두로貧頭顱 존자는 자기가 앉아 있던 바위와 함께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허공으로 올라가서 동네를 일곱 번이나 돌고난 뒤 가볍게 그 발우를 가지고 땅으로 내려왔다. 부처님 제자가 신통력이 가장 뛰어남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 빈두로 존자를 불러 호통을 치셨다. 계율을 어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네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신통력을 부렸느냐?” “네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신통을 나타낸 것은 마치 음녀 음녀가 돈 몇 푼 때문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몸을 드러내 보인 것과 같다. 그까짓 헌 나무 발우 하나 때문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신통을 나타냈느냐, 앞으로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신통력을 나타내지 말아라.” 신통 제일 목건련 존자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목건련 존자이다. 빈두로 존자에게 깃대 끝에 올려놓은 전단향 으로 만든 발우를 가지려 가자고 모의한 사람도 사실은 목건련 존자였다. 빈두로 존자가 가지 않았다면 아마 목건련 존자가 갔을 게다. 가지 않은 덕분에 이래저래 목건련 존자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부처님께서도 마맥馬麥을 드셔야 할 만큼 흉년이 든 그 해에 신통력을 한번 보이고자 하였다. 곧 허락만 하신다면 신통력으로 다른 지방에 가서 쌀을 구해 오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너처럼 신통력이 있는 비구야 상관없지만 신통력이 없는 비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되물었다. “신통이 없는 이들은 제가 신통의 힘으로 이끌고 가겠나이다.” “그만두어라. 그런 말은 말아라. 지금 비구들이야 그렇게라도 할 수 있지만 오는 세상의 비구들은 어찌하겠느냐?” 필링가바차 비구가 아이들을 찾아 주다 필릉가바차 비구가 마을로 걸식을 나갔다. 자주 들리는 재가자 집의 꼬마가 그 날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가 슬피 울면서 “집안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는 걸 보니 도적이 데려간 것 같다” 하고 하소연하였다. 절로 돌아온 그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생각하면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천안통天眼通으로 아이들을 관찰하였다. 도적들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갠지즈 강에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이내 신족통神足通으로 잠깐 사이에 절에서 사라져서 도적들의 배에 우뚝 섰다. 이 때 아이들이 그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다리를 껴안으니 신통으로 아이들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꼬마들이 부모에게 그 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결국 부처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빈두로나 목건련의 경우를 이미 보았는지라 필릉가는 걱정이 되어 부처님께 머리 숙여 사실대로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피하시다 이러한 부처님 태도는 외도들에게 “고타마는 신통력이 없다”는 비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대꾸하지 않고 그냥 그 마을을 떠났다. 그러자 외도들은 “사문 고타마는 우리들과 신통을 겨룰 수 없어서 떠났다”고 비방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들이 부처님께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아뢰고 거듭거듭 여쭈었다. “바라옵건데 세존이시여 신통의 힘을 보이소서.” “그만두오. 내가 스스로 때를 알아서 나타낼 만하면 나타내겠소.” 요술과 신통은 다르다 외도의 신통력은 신통이 아니라 요술로서 단순한 변화일 뿐이다. 요술은 모두 작위적인 사유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므로 괴이한 것을 나타내어 중생을 현혹하여 생멸의 원인이 될 뿐이다. 하지만 불보살이 대자 대비한 마음을 내어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원력으로 발현한 신통은 법성法性과 같다. 불보살은 털구멍 하나에서도 백천의 장엄구를 드러내어 법계를 채우고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보살의 해탈한 마음속에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생각이 없고 신통을 나타내겠다는 생각도 없으며, 또 그 신통력으로 복을 주겠다는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법성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신통이란 수행을 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일 뿐이다. 수행 자체가 신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수행 자체가 신통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려 앞뒤가 바뀌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말세 비구를 위한 자비심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부리는 것을 금하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을 현혹시켜 그것이 정법인 양 오해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신통력을 얻기 위한 수행이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참으로 다행이다. 이 말세 비구가 신통력이 없을 것을 미리 아시고 신통력을 부리지 못하도록 율장에 명기해 놓아 신통력이 없어 못 부리는 것인지 신통력이 있어도 부리지 않는 것인지를 남들이 보아서는 알 수 없도록 해 놓았으니.... 하긴 지금 내가 부릴 수 있는 신통력이라고 해 봐야 율장이야기의 연재를 끝내는 정도의 능력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