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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예수의 마지막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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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08월 210호
우리가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그래서 한번은 죽음을 연습할 수 있다면, 그 한 번을 이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뒤의 상황은 인간에게 가장 궁금한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죽음은 연습이 없다. 죽음은 재시도가 불가능한 유일한 사건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많은 보고들이 있지만, 죽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의 전이轉移’로 정의된다면 적어도 그런 보고들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보고들은 ‘죽다가, 혹은 덜 죽은 상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죽은 뒤의 일은 완전한 신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로서 확인할 수 없는 그 신비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의 삶 전체를 좌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뒤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삶을 다르게 살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과 살아 있을 때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다. 곧, 확인할 수 없는 죽은 뒤의 정황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 것이다.
한편 심리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죽음에 당면한 사람들은 당혹과 두려움, 애착과 갈망, 포기와 화해 등의 심리를 드러내는 말들을 남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딱 한 마디만 하고 끝내야 한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하고싶을까?
종교학도는 붓다와 예수가 보여준 최후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두 분이 남긴 마지막 말씀은 두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조적 태도
붓다와 예수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대조적인 면이 더 많아 보인다. 죽음에 당면하여 보여준 두 사람의 태도가 특히 그렇다.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신봉자들의 신앙고백에는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신앙에 의한 해석 이전의 객관적인 정황은 분명 대조적이다. 깨달아 해탈하신 분 또는 인간으로 육화肉化한 하느님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는 두 사람의 죽음은 팔순 노인의 자연스러운 죽음과 중년이 채 못된 젊은이의 강제된 죽음이다.

노인의 죽음은, 타오르던 불길이 연료가 떨어짐에 따라 불길이 사그러들 듯이. 오랜 여행에 지친 끝에 집으로 돌아오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했기에 마음의 평정 속에서 맞이한 죽음이다. 노인은 예견된 사건과 그 뒤에 대해 평온한 태도로 차근차근 모든 조치를 취한다 (『대반열반경), 「벨루바 마을에서-發病」, 「입멸의 예감」).
반면에 청년의 죽음은 3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갑작스럽게 충격적으로 찾아온다. 청년은 죽기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근심과 번민에 싸여 마음이 죽도록 괴로웠으며”(마태오, 26:38), 또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면 될 수 있는 일이오니 이 〔죽음의〕 잔을 거두어 주소서”(마르코, 14:36)라고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기를 기도한다’ (마르코, 14:35). 물론, 예수 역시 곧 이어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소서” (누가, 22:44),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울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오, 22:42)라며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이른바 갈등에서 하느님과의 화해로 돌아선다.
그러나 죽음에 당면해서 보여준 두 사람의 태도는 끝내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날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다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오, 27:46)라는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죽음 앞에서의 갈등의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말씀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 아니다. 그가 마지막 당부를 할 기회는 뒤로 미루어진다. 그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부활한 예수는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그는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나타나서〔부활을〕도무지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마르코,16:14).
곧 이어 이 때 남기는 간곡한 당부가 지상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마태오, 28:39).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코,16:15).
드라마틱한 예수의 그것과 달리 붓다의 마지막 모습은 매우 평범하다. 그는 조용히 최후의 당부를 남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알리겠노라. 생겨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니 게으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그대들의 수행을 완성하라”(「대반열반경), 「마지막 말씀)). 이것이 붓다가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말씀이다.

최후의 당부
최후의 한 마디를 할 때, 누구나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그 마지막 한 마디에 대해서 심사숙고하지 않겠는가 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 최후의 순간에 남기는 그 한 마디는 그 때까지 해 온 무수한 말들의 결론이며,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선포하여 가르치라’였고, 붓다의 그것은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두 분의 최후의 당부는 한마디로 ‘선교’와 ‘수행’이었다.
두 분의 제자들 중에서 어느 누가 그 마지막 당부를 소홀히 하겠는가 두 사람의 신봉자들은 오늘날까지 이 마지막 당부의 실천에 성실하고자 한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선교의 종교가 되었고 불교는 수행의 종교가 되었다. 선교에 몰두해 온 기독교인들은 수행을 소홀히 하고, 수행에 몰두해 온 불자들은 선교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두 종교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대조적인 면의 유용성
동양과 서양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온 두 종교는 2,OO0여 년 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서 저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이제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지금 두 종교는 서로 ‘한곳’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더욱 이 둘은 모두 종교라는 점에서 남이 아니라 이웃이다. 이웃이 된 이상 경쟁상대로서든 친구로서든 서로를 알아야 한다.
비교종교학은 서로를 친구로서 알기를 원한다. 경쟁 상대로서 상대를 꺾어 이기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이거나 교학이다. 종교학은 상대를 알아서 자신을 쇄신하고자 한다. 상대를 알고자 하는 목적이 타도가 아니라 자기 쇄신을 통한 발전이다. 교학도들은 이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이해를 위해서는 서로 유사한 점들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의 대조적인 면들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자신을 쇄신시킨다.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 내용과 다른 종교인의 신앙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저 비난하고 마는 사람들은 자기 쇄신을 통한 발전의 기회를 차 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든 불자이든 자신과 다른 상대의 신앙 행위를 비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