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치지구와 달동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진각
1994년 09월 151호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 3동 1-792번지 월간「해인」편집실이다. 이 곳에 머문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비가 내렸는데 지붕에서 처마끝으로 떨어진 비와 방바닥으로 떨어진 비가 그 양이 같을 만큼이었으니 지붕이 새어서 비가 방안에 쏟아진 셈이다. 편집실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금싸라기 같은「해인」지가 빗물에 젖었음은 물론이다. 건물이 워낙 낡기도 했지만 아까운 책을 더 이상 물 먹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수리했던 분에게 여러 번 연락을 했는데 언제나 대답은 출장중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이 상황인데도 태평무산인가 싶어 직접 찾아갔더니 그는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이런 구차한 얘기를 늘어 놓는 것은, 지금 우리네 사는 모습이 남의 집은 새거나 말거나, 애타게 찾거나 말거나 내가 챙길 것은 다 챙겼으니 이익이 있는 곳에만 눈과 귀를 돌리는, 낮잠 즐기는 그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이런 일도 있고 해서 낡은 편집실을 새로 지으려는데, 풍치지구라는 낯선 말에 부딪쳤다. 산자락 주변에 있는 모든 가옥들이 풍치 구역인데, 편집실을 비롯하여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은 법률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가 있는 풍치가구이고, 대궐같은 집들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두 풍치지구에서 홀가분하게 제외되어 있었다. 또 편집실은 계단이 많아서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도 법률이 정하는 평수 이상은 예외 없이 주차장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관계 공무원의 이야기에 도시계획 전문가와 입법 전문위원은 어떠한 분들일까 하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신도시 건설이라 함은 주거 지역뿐만 아니라 주변의 제반 시설도 포함되는데 집행자의 삐에로 같은 망상에 의해 간접 자본 시설 현장마다 “부실공사 추방”이라는 웃지 못할 팻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에 기득권자가 소비적인 논쟁만을 일삼는 일차산업의 생산자인 농민과 서비스 부분의 노동자의 가치를 생각하고 도시-서민(중산층)이 소비자인 제품의 유통 구조에 대해 실질적인 논의를 하여 진정한 국가적 이익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시간은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정, 무정물에게도 고루 배분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부터 긴요하게 생각하고 민족 기준의 주체적 시각에서 옳고 그르고 늦고 빠름을 가늠하는 질서가 있으면서도 유연한 사고가 자연스럽게 파생하여 상식으로 통용하고 신뢰가 넘실대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한 사람의 지혜로운 사고가 칠천만 백성을 구할 수 있으리라 난 믿는다. 내 세대에 그런 지도자를 바라는 것이 결코 지나친 욕심이 아니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