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그대 보낼 수 없어 한마디 이야기라도 버드나무 줄기에 매달아 보아야 하겠기에 휘청 내 억장을 봄빛에 담아 봅니다.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몇 천리 몇 만리이기에 아직도 그대는 내 앞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대 올라온다는 소식 있어 저 남녘으로 산을 보내고 구름과 달을 마중 보냈지만 돌아온 소식은 적멸 적멸 적멸. 그러나 그대 없이도 오늘 나는 이렇게 상아 있습니다. 그대 없이도 오늘 나, 명진, 주영, 도각, 법연, 현담, 효림으로 있습니다.
정녕 그대의 몸은 흙으로 떠나가고 그대의 피와 눈물은 물로 흘러 샛강으로 흐르고 그대 이땅의 정의와 평화를 나누던 따스한 온기는 불로 떠나가고 모두의 가슴과 귓가로 보내던 메시지, 호흡은 다시 바람으로 떠나갔는데
오늘 “종태” 그 이 름은 어이하여 이 땅에 남아서 대구에서 서울에서 광주에서 월출산은 노래하오리까.
당신의 형상은 모두 떠나 버려 다시 육신으로는 볼 수 없는 터, 우리가 그대를 부르는 것은 법안의 형상이오리까. “종태” 그 이름이 무엇이 관대 개혁의 아침 조계사 뜨락에 우리는 다시 그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로 금강경 외줄을 따라가야 하오리까.
지금 당신의 이름을 여기 위패로 앉혔는데, 그대 신령한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 영전에 잠시 경허스님의 시를 읊어 봅니다
부처, 마구니 다 잊지를 못해도
영명한 그릇 속에 갈구리들 있다네
꽃잎에 뒹구는 마른 해골
깊은 봄으로 웃어도
백발어린 아이 영원토록 살겠네
어젯밤 꿈도 헛되고 내일도 그러한데
본분사 알지 못하고 형상만 좇고 있네
눈앞 세상일 알지 못하는 이 슬픔이여
이별하려니 자꾸 가슴만 애타는 구나
종태스님.
저는 본시 천성이 천박해 이십여 년이 넘도록 불법의 대의를 알지 못하고 게으름 또한 남보다 유달리 더해 수행 정진에 진력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불법을 망망대해에 뛰노는 기쁨을 얻지 못하면서도 정진은 차일피일 하면서 세간사에 때를 묻히는 걸 더 좋아하였으나 당신과 만남 이후로 도 닦는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도 닦는 기쁨을 촌미村味도 얻지 못하였으나 도 닦는 이들과 세상사에 참여하는 일이란 무한한 기쁨이었고 세상사는 낙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당신의 수행로修行路 위에서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당신이 원적圓寂으로 돌아가고 나니 다시금 나는 인생로가 끊긴 듯하고 세상락도 지워진 듯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생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처절하게 깨달을 듯하니 니 또한 당신이 저에게 목숨으로 보여준 마지막 법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태스님.
처음 당신의 부음을 받았을 때 꿈결인 듯하더니 당신의 몸에 불을 지피고 서울로 돌아올 때 차창 밖으로 보이던 지리산을 보고서야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지리산 모습이 왜 그리도 처연하던지 지리산 능선들은 왜 그리도 어깨를 들썩이던지, 내 눈 속에는 왜 그리도 깊은 강물이 고이던지.
이제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이승 사람 또한 본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사는 죽음의 밖과 안의 차이일 뿐 더 이상 가슴 아파할 것도, 당신을 그리워해야 할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생사열반이 공화와 같다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침나절은 전생이요 한낮은 이승이며 저녘은 내생이라 전생과 금생, 내생이 오늘 하루에 있거늘 어찌 다시 당신의 생과 사를 말할 것이며 슬픔을 말하리요.
저녘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남아 있는 이승의 일들을 이승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고 오늘밤 잠자리 편케 하소서.
종태 선사 행장
스님은 사십삼 년 전 1952년 1월 4일 전남 보성군 복내면 계산리에서 부친 광산 김씨 경수 거사와 모친 임옥봉 보살의 일곱 형제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속명은 용근이다.
70년 3월 15일 도광스님을 은사로 하고 고암 종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스지하였다.
73년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전계화상 석암 종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74년 화엄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해인사 퇴설당에서 첫 하안거를 성료한 뒤 화상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선원과 토굴을 두루 다니면서 참선 수행을 계속하였다.
88년 10.27 법난 이후 불교 역사와 조국의 민주화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드디어 대승불교전국승가회 창립의 중심 인물로 참여하였다.
89년 대승불교전국승가회의 사무처장을 맡아 불교 활동 진영의 중심에 섰다.
92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창립준비위원장으로서 불교 활동 진영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위해 노심초사 그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92년 10월 1일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창립하고, 실질적 대표로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중심 사업을 종단 개혁으로 하고 종단개혁과 불교계 개혁을 위한 불사에 원력을 싣고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94년 4월 10일 대한불교 조계종 개혁회의가 출범하자 개혁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개혁회의 법제위원화의 사회복지분과 위원장에 위촉되었다.
94년 5월 19일 개혁회의 의장단 및 실무자 회의에 참석에 하기 위해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던 중 천안 지역에서 불의의 교통 사고를 당하여 시적을 보였다.
세수는 43세이고, 법납은 2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