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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보람산 불교유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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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4년 06월 148호
옛 참선 도량을 찾아서

지금까지 참선 도량을 많이 연재한 것은 이 혼란한 시대에 “참선 좀 합시다”라는 작은 소망을 담아 왔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철감 선사 도윤스님이 개창한 사자 산문의 텃밭인 화순 중조산 쌍봉사와 적연 선사가 개창한 참선 도량인 경남 황매산 영암사지, 멀게는 작년에 다룬 선각 대사 형미스님이 주석한 전남 월출산 무위사와 현각 선사의 전남 지리산 연곡사가 있었다. 지금은 별볼일 없는 초라한 절집들이지만 그 옛날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름난 선사들의 참선 도량이기에 도시로만 몰리는 발길을 돌려 한철 지내도 좋을 만한 곳들이다.
신묘한 선의 경지를 형상으로 조각한 쌍봉사의 철감 선사 도윤스님의 부도가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다음 순례 목적지인 보림사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한다. 웬지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그 오지의 고찰에서 증축 불사의 바람이 불어 천년도 넘은 절집 여기저기에 오래된 건물 축대나 기단석, 초석 들을 중장비로 모조리 뽑고 밀어젖혔다는 불길한 소문 때문이다.
광주에서 보림사를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나주군 남평에서 다시 읍 소재지를 지나가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화순 능주를 거쳐서 가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이 시간적으로는 빠른 편이다.
하지만 이번 답사는 모험을 하기로 하였다. 능주에서 운주사와 중장터, 행산을 거쳐서 가는 옛길을 택한 것이다. 행산까지는 부분적으로 포장이 되었으나 마을 너머의 길은 군사 작전 도로 같은 악조건의 산길이다. 굳이 이 길로 가는 이유는 , 몇차례 운주사 발굴조사를 하면서 행산까지느 들러 보았으나 그 뒤로 길은 가보지 못한 미련도 있고, 그 옛날 보림사에서 중장터로 장을 보러 오려면 이길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수 없이 이 고개를 넘나들던 수행자들의 숨결을 더듬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프나 타이탄 트럭처럼 힘센 차나 다닐수 있는 험한 고갯길들을 승용차를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넘었다. 그러나 길 주변의 경관은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만큼 호젓하였다. 아직도 행산 마을에는 운치 있는 흙벽집이 있고 시냇물 또한 청정수 그대로였다. 행산 마을은 한국 동난 때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토벌대에게 갖은 곤욕을 치르기도 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동네이다. 몇 년 전에는 투기꾼들에 의해 이 일대에 도로가 뚫린다는 허위 개발 사실이 나돌아 땅값만 올려 놓고 말았다.

원표 대덕의 가지산사와 보조선사 체징의 보림사
우여곡절 끝에 보림사에 도착해 보니 요사채를 헐고 새로 종각을 지어 놓았는데 좀 이상하다. 송광사 종각을 본따서 지은 듯한데, 종각이 통로 구실을 하기 때문에 이층누각식 건물 아래는 통행을 할수 있도록 설계된 송광사와는 달리 보림사는 외호문과 천왕문이 대적 광전으로 바로 이끌고 있어 종각 아래의 통로는 별 의미가 없다. 어떻게 이런 구조로 만들어 놓았는지 졸렬한 안목에 씁쓸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종각의 위치도 경전대로 하거나 사역의 배치상으로 보더라도 천왕문 오른쪽이 맞다. 옛 보림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역 중앙에 자리한 종각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두고, 돈이 남아 돈다면 옹색하게 앉아 계신 철조 비로자나 부처님을 위해 넉넉한 대적광전을 지을 일이라고 지탄한다. 그렇게 대적광전을 증축하려면 쌍탑과 대적광전도 본디 위치인지가 의심스러운 징후도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복원 계획을 세우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보림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 선문구산 가운데 가장 먼저 물을 연 가지산문의 중심 도량이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이다. 이 절은 보조 선사 체징이 창건한 절로 알려졌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체징이 헌안왕의 권유로 이곳에 옮겨온 해는 860년이고 이보다 백년 전쯤인 경덕왕 18년(759년)에 원표대덕이 가지산의 고가지에 가지산사를 창건함으로써 비롯된 절집이기 때문이다. 원표 대덕은 천보년간에 당에 유학했으며, 서역의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고 756년부터 759년 사이에 귀국하여 가지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표에 대한 기록으로는 「숭고승전」 에 실린 「당고려국원표전」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덕이 중국에 있을 때 「화엄경」팔십 권을 짊어지고 본건성 영덕현 북쪽에 있는 곽동산을 찾아 천관보살에게 예배할 만큼 신앙심 깊은 화엄 신행자였고 지제산(천관산)의 천관보살 주처 신앙의 신라적 수용과 유포에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가지산사는 화엄종 사찰로 출발하였고 원표는 경덕왕의 개혁 정치에 법력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경덕왕은 왕명으로 가지산사에 장생표주를 세우게 하여, 사찰에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신라 하대(780~935)에 들어와서 가지산사는 화엄종 승려 원표가 경덕왕의 전제 정권과 밀착하여 이후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당시 중국에 성행하던 남종선이 수용되기에 이르러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헌안왕이 입실 제자인 김언경을 통해, 반왕권의 성향이 깊은 무주 지역(지금의 광주)의 황학난야에서 선풍을 드날리던 체징을 가지산가로 옮겨 살도록 여러차례 압력을 행사한 기록은 무엇을 뜻하는가. 혹 헌안왕이 무주 황학난야에 주석하던 체징의 종교적 영향력을 줄이려고 보림사 오지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는 불만을 누르려고 철불을 조성하는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는 등 정치적인 유배와 깊은 내막이 있을 법한데 물증이 없다. 이로써 가지산사는 화엄종사찰에서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으로 그 종풍이 변하게 되었다. 보조는 이십 년을 이곳에 거처하면서 도의와 염거(?~844)를 각각 제1조와 제 2조로 삼아 가지산문의 종지를 여러곳에 과시하며 그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뒤 가지산문에서는 체징(840~880)을 제3조로 삼는다.
무주 장사현 부수 김언경은 체징의 입실 제자로 헌안왕의 명을 받들어 철이천오백 근을 들어 비로자나불 한 분을 주조하여 대적광전에 안치하였고, 또한 신라 진골 귀족의 부윤대택인 35금입택 가운데 방수택, 이남백의 백주들도 왕명에 의해 금 160분과 조 2.000괵을 절에 바쳤다. 861년에는 여러곳에서 재물을 시주하여 사찰이 더욱 확장되는 도의의 선풍이 진작되어 가지산문이 융성하였다.
870년에 세운 쌍탑은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탑으로 체징의 속가 제자인 서원부 소윤 나말 김수종(뒤에 김언경으로 이름을 바꿈)이 경문왕에게 청하여 건립한 것이다. 891년에 남탐에 사리 일곱 괴를 넣었다.
880년에 체징이 입적하자 헌강왕은 선종의 이치를 사모하여 체징에게 익호를 보조, 탑호를 창성, 사액을 보림이라 하였다. 체징의 문하에는 영혜, 청환, 의차 등 팔백여 명이 있었으며 입당하여 운거 도웅의 조동종을 전해 온 해동 사무애대사중의 한 사람 강진 무위사의 선각 형미와 풍기 비로암의 진공 대사도 그의 사법제자였다. 보조 선사 체징의 비는 감영이 짓고 김원과 김언경의 두 사람이 글씨를 써 884년에 세웠다. 이처럼 한 개의 비문에 두 사람이 글씨를 쓰는 일은 좀처럼 보기 드문데 무슨 피치 못할 내력이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가지산문 출신으로 최초의 국사인 원옹 국사 학일이 1105년에 삼중 대사가 되었을 때 가지사에 잠깐 머물렀다가 귀산사에 옮겨 갔을 뿐 별다른 기록이 없고 왕사가 된 학일이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여 선풍을 떨친 것으로 보아 가지산문 소속의 중심 도량으로서의 그 위치를 잃었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보우가 보림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자못 활기를 되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가 세조 3년과 10년사이에 간행되었다. 이 사적기는 이기백 교수가 미국 하버드 대학 연경도서관에서 사진찰영하여 가져온 것으로 「고고미술」81호에 황수영 교수가 주를 달아 자료로 소개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전반부는 보림사의 창건 연기 설화와 가람의 규모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에는 경내에 현존하는 보조선사 창성탑비문을 발췌하여 수록한 것이다. 현존하는 사지의 간행 연도가 조선후기인 숙,영,정조의 삼대에 걸쳐 집중되어 있는데 견주어, 이 사적기는 이보다 훨씬 빠른 조선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림사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서로 여겨진다.
1478년에는 보림사에서 대회를 설하여 안거하였다. 이 때의 대중 삼백여명이 남, 북탑이 기울어진 것을 보고 바로 세웠는데, 화주는 원식과 의주 그리고 정안이었다. 1535년에도 다시 쌍탑을 중수하였는데, 이 때의 화주는 의근이었다. 또한 1539년에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이로 보아 임란전 곧 16세기 중엽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81년에는 「묘법연화경」을 개판했다. 보림사에서 개판했던 현존하는 목판은 「사법화엄경」하나 뿐이지만, 앞으로 조사해 보면 좀더 발견될 것이다. 보림사에서 불전 목판이 간행되었던 사실에서 사원의 경제력과 인쇄술 그리고 단월 따위를 밝혀낼수 있을것으로 기대한다.
1780년에는 사천왕문과 금강역사상을 중수하였다. 1752년에는 연담 유일이 보림사에 초청되어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강석을 열었고, 그는 보림사 삼성암에서 입적하였다.

잘못 알려진 한국동란 때의 방화
보림사는 6.25 때 천왕문과 사천왕상, 외호문만이 남고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는 참화를 입었다. 당시의 참화를 기록하는 모든글, 특히 최완수의 「명찰순례」에서조차도 도주하던 공비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보는데 이는 잘못된 지적이다. 이렇게 최근의 역사조차도 올바르게 기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 전의 역사를 어떻게 바르게 기술할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칠수 없다.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건의 기술은 또 다른 곡해를 낳는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당시 중위로 토벌대장이었던 전 전남도지사인 김종호씨가 사석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공비들이 보림사를 본거지로 이용하자 토벌대에서 방화를 하였고, 그에 대한 참외의 뜻으로 보림사 대웅전의 복원 불사를 후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천 년을 이어온 문화유산을 한낱 거추장스러운 적군의 은신처쯤으로 여겨 불질러도 된다는...그리고 민심은 두려웠던지, 공비의 소행으로 몰았다. 그도 마음이 불편하던지 그 지역의 도지사로 부임하면서 시굴 조사도 거치지 않고 옛 터를 밀고 새로 건물만 지은 것으로 업 닦음 하려는 아주 편리한 발상, 김 처사님 지금은 편안하십니까.


팔뚝 뒷면에 조상기를 새긴 무쇠 비로자나 부처님
절 입구의 외호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쌍탑 뒷편에 있는 대적광전이 보인다. 전각 안에 조금은 비좁은 듯 웅크린 높이가 이 미터 칠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무쇠 부처님이 색바랜 금박 옷을 입고 앉아 계신다. 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는 이 철불은 팔뚝 뒷편에 조상기를 새긴 탓에 이미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큰 부처님이 좁은 전각 안에 옹색하게 앉아 계셔도 그렇게 다른 건물들만 지으려는 문도들이 있으니, 보조 체징이 이 시대에 살아 온다면...
현재의 대적광전을 해체하여 그 건물은 다른 전각으로 활용하고 철분의 몸에 맞는 새로운 대적광전이 건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지금의 쌍탑과 석등도 제자리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으니 지하의 시굴 조사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무쇠 부처님 나발은 흙으로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해 크게 보여 어색하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동화사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지권인을 결한 상체가 웅크린 듯 위축감을 준다. 곧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다소 긴장감이 풀어지는 옷주름의 선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을 묘사하며, 그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면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이나 취서사 석조 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상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쇠 부처님을 만들기 시작하여
거푸집을 완성하고 봉인하기 까지 삼년
그런데 문제는 이 무쇠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철불과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중대십이년중대십이년(858), 정왕삼년情王三年(859)과 선제십사년宣帝十四年(860)이 즉위년부터 계산하면 일 년씩 줄어들고 불상은 85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859년에 완성하였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견해들은 세 가지의 연대가 나오자 이를 심사숙고하기는커녕 당시의 기록들이 불멸 연대나 제위 연대를 잘못 산정하였다는 아주 편리한 발상으로 이를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우리나라 문헌과 금석문에서는 석가모니의 생멸 연대가 주 소왕 이십사년 갑인(B.C.1027)에 태어나서 주 목왕 이십사년 임신(B.C.949)에 입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9세기에 기록된 보림사 철불 조상기와 염거화상 탑지만 불멸 연대가 달라 이를 잘못된 기록으로 간단하게 돌려 버리고 만 것이다. 문장의 행간을 잘 살펴보면 이러한 금석문의 불면 연대는 모두 맞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보림사 철불은 858년 8월에 철불의 주조를 시작하는데 먼저 거푸집을 만들면서 제작 연대를 대중십이년이라고 새겼을 것이도 이 거푸집을 859년에 완성하였으며, 860년 2월에 철불을 완성 봉안하였다는 제작 기간을 복원해 낼수 있었다. 더욱이 염거 화상 탑지도855년에 작성되고 탑 역시 855년에 건립된 것으로 861년에 건립된 대안사 적인 선사 조륜청정탑과의 시간적 공백을 메울수 있엇고 나아가 도피안사 철불을 만들려고 천오백여 명이 참여하는 향도 집단이 결성되어 철불을 만드는데 십일 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고, 한사람이 발원한 보림사 철불의 경우 제작 기간의 명시 없이 바로 만들수는 없는 일이지 않을까. 비롯 햇수로는 삼년이라 실지 기간은 십칠 개월밖에 걸리지 않아 도피안사와는 대조를 이루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완수의 「명찰순례」에서 다름과 같은 기가막힌 소설을 싣고 있다. 이러한 연대의 차이는 김수종과 김언경을 전후임의 장사부사로 보고 후임 장사부사 김언경이 자기의 공덕을 과시하려고 불상 팔뚝에 조상기가 새겨진 것을 모르고 비 6행 중간부터 자신이 직접 썼던 것이라고...
이런 식으로 역사를 연구하면 책을 수백 권을 써보았자 오히려 학계를 더욱 어지럽히고 후학들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