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시가에 대한 연구는 신라시대의 향가 문학에서 출발한다. 불교의 성행과 함께 꽃 피운 향찰 문자로 이루어진 우리 문학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불교 문학이라는 이름을 내놓은 동시에 본격적인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초기 향가문학 및 불교문학에 대한 연구는 아쉽게도 다분히 문학적 관점에서 시도하고 규명해 들어간 접근일 뿐 불교적 관점에서의 세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60년대 이후로 오면서 불교문학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열의는 날로 증대되었고, 70년대 이후에는 문학과 불교의 양자적 입장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교문학에 대한 수많은 연구 업적이 쏟아짐과 동시에 새삼 문학사적 인식을 강조하였다. 특히 불교시가에 대한 연구는 문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장르의 특징 때문에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불교가요, 불교가사, 불교시가, 불교시, 선시 들과 같은 명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연구 대상의 범위도 차츰 확대회고 심도를 더하게 되었다. 반면에 증가되는 연구의 열의와 결과물에 따르는 용어의 혼란과 편의에 의한 개념들의 속출도 부인 못할 사리이다. 이제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미약하나마 그 해결의 시안을 전개하여 불교시가 연구에 일조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 동안의 불교시가 연구에 수반된 명칭이나 갈래 규정의 문제는 다분히 한시문학이나 우리 국문시가의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 사실이다. 독특한 예술성과 문학성을 지니고 있어 그 가치가 더욱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까닭에 어쩌지 못하고 새로운 명칭이나 갈래를 규정하기보다는 전례를 답습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논리적인 설명이 뒤따르지만 불교시가라는 전체 범주를 가름하고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사용한 용어의 예를 보면 먼저 불교문학에 대하여 선가문학(조동일), 불가문학(이종찬), 불가한문학(이진오)이라 명명하였으며, 다음으로 불교시가에 대해서는
①불게(이가원)
②고승한시(이원섭,이종찬)
③불교가사(이상보)
④불가가사(이진오)
⑤불교가요(김성배)
⑥불교시가(인권환)
⑦불교시(인권환)
⑧선시(김운학, 이종찬, 이재운, 김달진, 권기호)
⑨불교시문학(송혁)
⑩불가시문학(이종찬)
등으로 명명하여 그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문학에 대한 연구사가 그다지 길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어쩌면 초기 연구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들 역시 초기 연구자라는 어려움 때문인지 여러 가지 명칭이나 용어를 거듭하여 사용 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필요성보다는 새로운 용어를 나열하듯이 쓰면서 적합성을 구하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교문학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일반적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교문학’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의식을 획일적으로 통일시키기가 쉽지 않은 만큼이나 그 용어의 통일 역시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명칭이나 용어를 통일하여 혼란을 막고 외적인 문제에 투자되는 힘의 소모를 막아 좀더 본질적인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불교시가에 대한 명칭으로 불려진 위의 열 가지의 예를 살펴보면 우선 ‘불게’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기야祈夜, 가타伽陀라는 게송에 근거하여 붙여진 것이며, ‘고승한시’는 승려들의 한시라는 의미에서, ‘불교시가’‘불교시’등은 그 문학적 양식과 특징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며, ‘선시’는 불교시가 가운데서도 직관과 오도적悟道的 필력에 의해 독특한 시적 경계를 지닌 작품을 지칭하며, ‘불교시문학’ ‘불가시문학’ 등은 불교시가에 관한 제반 작품들은 통틀어서 넓은 의미에서 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명칭들을 종합해볼 때 굳이 서로 다르게 부를 필요가 없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미 익숙해진 우리 문학사상의 명칭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명칭과 영역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만큼 각고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규정된 갈래나 명칭들을 새롭게 수용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예에서 볼수 있듯이 똑같은 의도에서, 똑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면서도 굳이 색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알수 있으니 이를 그냥 두고 무조건 따른다는 것은 불교무학 연구의 발전의 위해서도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문학연구에서 우리의 현실은 그 본질보다도 외형에 해당하는 용어의 문제에 너무 많은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아직까지도 용어나 갈래조차 통일하고 정립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오랜 시일을 두고 시도를 감행하고 답보를 거듭한 뒤에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가 정착되는 것이 연구의 수순이요 당연한 귀로하고 할수 있겠지만 반세기가 넘은 우리 문학의 연구사로 볼 때 이러한 문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반성하고 각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개개 연구의 업적이나 그 특점 및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온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시비를 따져 나아갈 때 비로소 그 진정함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불교시가’라는 명칭으로 위에서 제시된 여러 명칭을 일괄하면서 좀더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고자 한다.
‘불교시가’라는 용어는 ‘시時’나 ‘가歌’ 가 지니는 상이성 때문에 붙여졌고 불교시라는 용어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오늘날 널리 사용하고 있는 ‘선시’보다는 불교의 시가문학을 대표하기에 적합하며, 선시가 ‘오도송悟道頌’이나 ‘열반송涅槃頌’처럼 그 일부를 나타내는 대신에 ‘불교시가’라는 말은 기야나 가타를 망라한 불교의 시가문학을 총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찬 교수는 「한국의 선시」에서 선시의 작품보다 작가인 선승禪僧에 주목하여 속사俗士들의 선적禪的 시인 선취시禪趣詩를 단지 시인 개인의 부분적 현상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한 뒤 선시의 범위를 제한하였으며, 최근에 와서는 다시 「한국불가시문학사론」이라는 저술에서 승려들의 시문학을 총괄하여 구명한다는 입장에서 ‘불가시문학’이라는 용어를 개진한 뒤 그 선시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인권혼 교수는 「고려시대 불교시의 연구」에서 불교 경전의 운문이 개인의 창작으로 전화轉化될 때 송頌이나 찬讚으로 발전하여 불교시, 선시의 창작으로 나아간다고 하면서 불교시와 선시를 구분하지 않았다.
권기호 교수는 「선시의 세계」에서 불교시와 선시는 구분되어야 한다면서 불교시는 불교의 경전 세계를 서술적으로 노래한 것, 선 수행 과정에서 느끼는 선적禪的 여러 소재를 노래한 것, 산천의 풍경과 불교적 소재를 시적으로 노래한 것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불교시가와 선시는 이와 같이 확연히 구분되는데도 구분없이 서로 일치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의 연구가 불교시가 가운데 특히 승려들의 한시에 주목하여 진행되어 왔기에 여타 불교시가 장르에 같은 이해와 인식이 크게 미치지 못해 생긴 경과하고 할 수 있다. ‘불교시가’라고 하면 「십이부경十二部經」가운데 기야와 가타를 포함한 운문적 표현의 총칭이며, 선시는 그 일부 중에서도 선취禪趣, 선리적禪理的인 시를 가리킨다. 불교시가의 갈래는 「십이부경」에 속하는 기야와 가타에 의거하여 크게 중송重頌 또는 응송應頌과 풍송諷誦 또는 고기송孤起頌으로 분류된다. 다음은 중국학자인 주적가周적迦의 「불교와 중국문학」의 내용이다.
불경의 체례는 12종이 있는데 이를 이른바 「십이부경」이라고 한다. 「십이부경」중에서 문체를 나누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으로 계경契經이라고도 하며 바로 불경 중의 의리를 직설한 산문이다. 둘째는 중송으로 응송이라고도 하며 바로 장행의 산문을 중복 서술한 시가이다. 셋째는 가타로 게송이라고도 하며 바로 장행에 의거하지 않고 사의事義를 혼자서 일으켜 곧바로 서술한 시가이다.
중송 또는 응송이라고 풀이하는 기야는 불교경전의 산문적 법리를 반복하여 설명하는 시가 형식을 말하며, 풍송 또는 고기송으로 풀이하는 가타는 조송造頌이라고 하는 것처럼 ‘不重不應’ 의 자발적인 감흥에 의해 표출되어 시가 형식을 말한다.
이러한 기야와 가타를 일반적으로 게송이라고 아며 본고에서는 이를 불교 시가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선시는 이 가운데서도 특히 가타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불교시가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선이라는 특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범주를 한정하여 말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 선은 어떤 특정 부분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승의 시가나 속사들의 선적 수행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시가를 대신하여 선시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일반적 게송이나 시가 작품 또한 산재하기에 불교시가를 단지 선시라고 대칭할 수 없는 것이다. 선이란 선나禪那, 선정禪定의 wsn말로서 정려靜慮를 뜻한다.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조사가 심인心印 하나만을 전하여 집착을 깨뜨리고 종지를 나타냈는데 그것이 바로‘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문자 없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터득되는 것이 선이며, 이러한 마음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있는 불성을 깨치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선이다. 따라서 선은 인간의 본질과 우주자연의 근원적 실태를 파악하는 방도이며, 분별과 집착이 없는 무심無心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선시가 되는 것이다. ‘이심전심’‘불립문자’가 선이라면서도 언어행위를 통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오류를 스스로 지니고 있는 선시는 선에도 얕고 깊음이 있어 그 정도에 차이가 있듯이 선을 수행하는 당사자가 견성見性과 오도吾道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 선시이며, 일상적인 논리를 거부하는 초논리성, 비논리성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 선이듯이 선시 역시 그 논리를 스스로 초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화엄대소華嚴大疏」에서 도道는 본디 말이 아니지만 말에 의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논지를 밝힌 바 있듯이 견성과 오도에 이르려면그 방편이 전혀 무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시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혜담은 그의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 본원을 얻은 사람은 만가지로 분별해서 말하더라도 맞지 않는 것이 없고, 분원을 얻지 못한 사람은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더라도 미혹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 조사祖師들은 문자를 버리지 않고 자비를 아끼지 않으면서 묻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하고, 대신하기도 하고 읊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여 심오한 이치를 후학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선이 문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선시의 존재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불교시가의 원류를 살피면 당연히 마명의 「불소행찬佛所行贊」을 꼽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선시의 시초로는 한산漢山의 작품을 들고 있는 것이 통설이다. 다음의 작품은 바로 불교시가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선시에 해당된다.
높디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끝이 없어라.
홀로 앉으니 아무도 아는 이 없고 외로운 달이 찬 샘물을 비출 뿐.
샘물 속에는 달이 있지 않고 달은 스스로 저 하늘에 있도다.
이 한 곡조의 노래를 읊지만 노래속에는 선이 있지 않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