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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암 계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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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원자 1994년 06월 148호
지난4월 초순,
조계사는 밖으로 전경들이 에워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종단을 구하고자 하는 스님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뚜렷한 명분도 없이 무장하고 서 있는 전경들을 헤치고 불교회관 지하로 들어서는 한 비구니 스님의 가슴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지하 한 모퉁이에서 불필요한 공권력에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구종법회에 동참한 비구니 스님들은 작지만 단단한 모습을 한 비구니 스님이 들어서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젠 살았구나, 어른 스님이 오셨으니.’
그 날, 아픈 가슴으로 ‘개혁’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발을 딛고 있던 젊은 비구니스님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던 스님, 출가해 삼십삼년을 산문 밖을 나서지 않고 오로지 선수행에 전념해온 계수 스님이다.
개혁중간에 동참했으나 이번 조계사 사태에서 후배 비구니 스님들을 이끌며 개혁비구니회 ‘정혜도량’을 출범시킨 계수스님을 개혁의 현장이었던 조계사에서 만나 뵈엇다.
이미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선방에서 입승을 보는 어른 스님이지만, 계수스님을 아직도 마치 어제 산물에 들어온 것처럼 당신의 들어오고 나섬을 은사 스님께 아뢴다. 밖에 나갔다가 조금 늦으면 늦는다고 아뢰고. 선방도 해제하면 곧바로 달려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지난봄, 조계사에서 법난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그랬다. 급한 일이 있어 일본에 가면서 “밖에서 찾으면 만행중이라고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리고 떠났던 것이다.
스님이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한국불교는 역사에 보기 힘든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그 와중에 스님을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
4월 초순에 돌아와 짐을 풀기도 전에 후배 스님의 질책 어린 소리가 스님의 가슴을 쳤다.
“지금 젊은이들은 다 죽어가고 있는데, 스님은 당신만 편하려고 나오지 않냐는 전화를 받았어요. 사태를 알고는 그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나만 편히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럽고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곧바로 달려가 그들과 동참했죠.“
확철대오하기 이전에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은, 눈 먼 소경이 사람을 끌고 가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갖고있어, 그 동안 어떤 모임에도 참석치 않고 철저하게 선수행에만 매진한 스님이다.
그러나, 후배스님의 질책 어린 호소는 불의를 보면 몸을 사리지 않는 스님의 잠재된 성품을 흔들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고, 새카맣게 몰려와 있는 전경들을 보며 스님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종단을 구하는 일이라면 이 한목숨 바치리라고.
스님이 뒤에서 충전역할을 하리란 다짐으로 조계사에 눌러앉아 입선에 들자 그 동안 들렀다가 돌아간 선객스님네들이 다시 왔고 구종법회는 열기를 더해갔다.
“이번에 젊은 스님네들, 참 애 많이 썼어요.”
그렇게 말하는 스님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스님은 말씀 도중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

선방의 수좌란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므로, 산철에는 누가 어디에 가 있는지 몰라 급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막막해진다. 특히 이번 조계사 사태를 치루면서 모두가 실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수좌들이 일년에 한번이라도 모여 탁마하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는 바로 연락이 될 수 있도록 모임을 갖자는데 의견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개혁비구니회인 “정혜도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 구종법회와 승려대회에 참석했던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몇 번의 모임 끝에, 지난 5월 9일 삼선포교원에서 “정혜도량”이 창립되었다.
비구니들 소리를 하나로 엮어 내는 ‘창구역활’로 종단개혁불사에의 적극적인 동참과 비구니 스님들의 새로운 위상정립이 ‘정혜도량’이 이루어내야 할 일이다.
앞으로 여러 스님들의 의견을 모으려고 전국 비구니 스님 일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와 세미나를 개최하고 비구니 스님들의 고충과 수행 그리고 교육 등 부진했던 것을 하나로 묶어 개혁에 반영할 계획이다.
그밖에 비구니 수에 걸맞는 종회의원의 확보와 총무원의 비구니 부서 설치 그리고 종무행정 참여를 개혁회의에 건의해 놓고 있다.
창립일엔 연락을 충분히 하지 못해 많은 인원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전국의 강원과 선원에서 오백여 스님들이 참석하여, 회장으로 추대된 계수스님의 어깨에는 더 큰 무게가 실렸다.
“서늘 세 해 동안 수행해온 것 하나만으로 후배들이 앞세워 나오긴 했습니다만, 이 막중한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벽만 쳐다보고 있어서 대중공사나 훈계 말고는 잘하는 것이 없는데...그러나, 모든 것이 사필귀정인 것처럼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얼마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바로 서리라 믿습니다.”
원로 비구니 스님들이 뒤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고, 또 무엇보다 수행에 철저하셨던 스님네들이 개혁불사를 이끌고 있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스님은 믿고 있다.
“부처님의 근본사상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수행인의 근본도리이자 개혁 아닙니까. 풀어놓았던 마음을 다독여 열심히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개혁이라고 해서 어디에서 다른 법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의 어조는 단호했다.
오래 전 운문사 수행시절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누구나 앞장서기를 마다한 일에 ‘총알받이’ 역활을 한적이 있다.
지금은 운문사 강사 스님이 모두 비구니 스님이지만 그 시절은 비구스님들이 강사로 계시던 시절이었다.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가려 하다는 사실을 사건 며칠 전에 알게 되었다. 대중 모두가 경악했지만 누구도 선뜻 앞에 서려 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스님이 앞에 나섰다. 스물두 살, 출가해 오 년 뒤의 일이다.
지금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스님과 함께 맨 앞장서서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고 며칠씩 단식했던일, 운문사를 나서 밤새 산을 넘어 석남사로 가던일, 한겨울 서울을 오르내리다 귀가 얼어 몇 년 동안 진물이 흐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애쓴탓으로 운문사는 지금 까지 비구니 도량으로 건재할 수 있고, 비구니 강사 스님이 처음 들어오면서 비구니 강원으로서의 위상이 정립된 것도 그때의 일이다.

말을 크게 해보지 못해 변성기에도 목소리가 트이지 않았을 만큼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집 앞에 있는 교회에 다녔는데도 커서 산꼭대기에 집을 지어주면 천사같이 살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아무래도 스님의 출가는 전생사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중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한물을 배우러 절에 갔다. 거기에서 뵌 스님은 섬섬옥수의 천사 모습이었다. 스님을 그 길로, 그야말로 집안을 ‘벌컥 뒤집어’놓고 오로지 천사같이 살려고 출가했다.
행자생활이 얼마나 고되고 견디기 힘들던지 밤만 되면 절을 나가야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집안의 그렇게 뒤집어 놓고 들어왔는데 행자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삼 년의 행자 생활을 미치고 강원으로 가 부처님 말씀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 동안의 고달팠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졌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환희심으로, 아무 것도 무르고 절에 들어와 그 어려운 삼 년 동안의 고미를 넘긴 것이 스스로 기특해 산을 보고도, 허공을 보고도 절을 했다.
대중들의 투표로 스물 한 살에 입승이 되었을 만큼 모범생으로서, 올곧은 자세로 수행에 정진했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해, ‘오늘 하루가 일생이며, 일생이 곧 하루’라는 일념으로 잠자는 시간말고는 한번도 누워 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업이 지중하다 싶어 문지방에 배가 시퍼래지도록 문질러댔을지언정, 진통제 한 알 사먹을 생각을 못했다. 물론 강원 생활 사 년이 넘도록 지대방에 누워보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초발심으로 밀고 나가야 하며, 몸 보살피며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난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목표를 세우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밀고 나갑니다. 가다가 못 가면 죽는 거지요. 죽는 것이 뭐 대단합니까. 옷 갈아입는 건데요. 열심히 가다보면 딴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후생에 또 중 되겠지요.”
선원시절, 스님의 별명은 ‘허수아비’ 어른 스님들이 울력을 시키지 않을 만큼 몸이 허약하고 야위어 다른 스님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래도 스님은 잠이 오면 겨울에도 광목 가사 하나 걸치고 눈덩어리를 머리에 놓고 눈밭에 서 있었다.
밤 열한시, 방선이 되었어도 어른 스님들은 각자의 토굴로 돌아가 다시 용맹정진을 했다. 그분들이 살아 있는 부처님이란 생각이 들수록 자신의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 두터운 업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안타까울 때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산에 올라가 울었다. 선방에서 첫철을 나던 해, 잇몸이 들떠 이를 몽땅 뺐다. 들떠 있는 이만 빼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던 시절이라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치과에서 조수를 지낸 여자를 찾아갔다. 이를 한꺼번에 빼는 것은 무리라며 물러서는 여자에게 ‘살고 죽는 것은 내 문제’이니 무조건 뽑아 달라고 했다. 한달 사이로 이를 몽땅 빼내고 틀니를 해 넣으면서도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자는 시간은 곧 죽은 시간이었으므로. ‘내생에는 나지 않을 요량하고, 일대사를 하기전의 세상일은 물에 뜬 거품과 같고 눈을 밝힐때까진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므로 정말 이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딴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대쪽같이 살았던 수행시절이었다.
이런 단호함으로, 목숨을 걸고 첫철을 정진했던 까닭에 삼십여년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언제나 첫철’처럼 지낼수 있었으리라.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살아도 산송장이니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
생전에 스님에게 용맹정진을 지도했던 향곡스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스님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오늘까지 소중한 경책으로 남아 있다. 깜빡 조는 수좌에게 불에 달군 한 웅큼의 향불로 살갗을 지져댔고, 어른 스님네들이 졸고 않아 있으면 장작끈으로 목을 매어 끌고 다녔던 향곡스님. 스님은 오늘까지 그렇듯 깊은 애정으로 후학들을 아껴 경책을 아끼지 않는 스님을 만나보지 못했다.
초발심 변정각이라 했던가. 그만큼 수행자에게 그때의 기억은 남다르리라. 짧은 시간탓도 있었지만, 스님은 초발심 시절의 얘기로 삼십년 수행생활의 말씀을 대신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으리라. 그 향기가 다른 사람을 흡인하는 것일까. 인터뷰 내내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기자를 사로잡았던 계수스님.
그분이 우리에게 준 향기는 목숨을 내걸고 삼십삼년동안 한길을 걸은 구도자의 내면에서 배어나는 빛이었으리라.
“인과만 알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서 있게 된다.”는 말씀을 남기고 스님은 조계사 경내에 물결치고 있는 개혁의 연등을 헤치며 다음날로 다가온 결제에 들어갈 채비를 하러 총총히 사라졌다.
한사람을 평하는데 사용하는 세간의 잣대가 얼마나 헛된것임을 문득 알려주고는 “특별한 일이 없는한 결제중엔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하던 계수스님. 그분이 뿜어냈던 향기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