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상주로 가는 25번 국도, 칠월 초승, 옥수수 밭 그늘은 성큼 짙어져 있다. 바람에 노란 꽃술 흔들린다. 키를 늘어어 핀 거망빛 접시꽃, 저절로 피어난 풀숲의 참나리는 태양과 눈 맞추는 한여름 꽃들이다. 푸르게 날을 세우며 어느 새 무릎 위 참한 높이로 자라난 벼 포기 사이로 무심히 바람이 지나간다. 햇빛에 희게 빛나며 흐르는 물길도 있으니, 눈앞에 펼쳐지는 저것들, 마른 장마라지만 오늘은 그저 걱정 없이 두고 보련다.
나락을 거두기까지의 여든 여넓 번 사람 손만 수고롭고 장할 것인가. 땅 위의 생물을 키우고 익히는 것은 해며 물이며 바람 들이다. 그러고도 “주기만 하고 받음이 없음에 태연한” 바, 저 무심한 자연의 손길에 미칠 것이 없을 터였다. 노악산 남장사, 해강의 글씨로 편액을 단 일주문 앞에서 몸 깊이 꺾어 예 올린다. 사백 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 스쳐 지나고, 백골 범종루를 머리에 이고 지나치면 맞배집 극락보전과 뒤편 2단 석축 위의 보광전으로 둘로 나뉜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향로전, 교남강당, 금륜전, 진영각, 요사채 등… 그러나 넓지는 않은 도량이다. 맑은 돌계단과 얕은 흙담으로써 조촐히 격해 있거나 이어지거나, 또는 층하가 지는 공간, 묵은 나무 기둥도 정답고, 새로 지었으되 규모가 조촐한 요사 따위도 생경스럽지 않다. 세월에 정성이 보태어져 이룬 불사를 대하는 기꺼움 때문이다.
눈 가늘게 뜨고 찬찬히 보면 눈에 띄는 것은 또 있다. 물받이 고운 자갈, 땅과 돌을 부드러이 감싼 이끼와 담장이 덩굴, 수각 옆 탐스러운 수국 따위가 건물과 땅과 층계의 경계를 지우거나 틈을 메워 그저 한몸이게 한다.
주말이라 가족 단위의 참배객과 뜻 맞춘 무리들이 두어 패 뒤섞여 있는 듯해 보이는 법당 안에서 성웅스님의 얼굴은 유난히 밝고 활기차 보인다.
78년 이 곳에서 소임살이를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그가 신도들과 가장 착실하게 만나 온 곳이 법당이다. 화려한 법문으로써가 아니라, 말 없이 몸으로써 그래 왔다. 기도 끝에 퇴행성 관절염으로 무릎이 불편해지고, 오랜 시간 쐰 향의 연기로 목이 탁해진 몸이다.
주지가 아니라 부전이오.
자신의 처지를 두고 스스로 그리 말한다. 늘 서덧 대중과 함께 한 세월이었지만, 그이처럼 법당을 온전히 지켜 낼 수 없었기에 떠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해인사 행자 시절 때부터 하루 일천배씩 천 일 동안, 도량석이 울릴 때까지 밤을 도와 기도하는 일이 그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소임 맡아 이 곳에 오면서 바로 시작한 것도 천 일 기도였다. 아니다. 그에게는 날을 정해 올리는 기도는 뜻이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스무해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나날의 행이기 때문이다. 84년도부터 86년도의 27개월 동안 상주 포교당 주지 소임을 볼 때도 그러했다. 도량석하고 종성하고 대종 치고, 그리고 공양 직전까지 기도를 했다. 지난 종단사태 이후로 초심 호계위원으로서 서울 나들이가 잦았으나 당일로 다녀와서, 시각에 늦는 일도 없이 예불에 참석하곤 했다. 절에 있는 한, 하루 네 시간 이상씩은 꼭 기도한다.
포교와 가람 불사의 원력, 세월 끝에 가람은 사명과 나옹 등 허다한 고승들이 주석했던 유서 깊은 역사에 어울리는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97년도에는 전국의 여섯 포교 시범 사찰 가운데 하나로 뽑히게 된다.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앞서 나가는 기획력,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 우직하리만큼 강한 의지력으로 그가 이룬 성취가 작지 않다면, 그것의 토대가 되어 준 것은 그의 이러한 “수행자적인 면모”일 터였다. 율장은 많이 보지 못했으나 지계에 관한 한 율사라 불릴 만한 그의 엄정한 계행은 강원 학인 때에 발원했던 바였다. 그 원력대로 살고 있지는 못한다 하나 그의 일상을 테두리 짓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포교의 최전방에 그는 있다.
남장사의 재적 신도는 지금 삼천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곳도 이중으로 적을 두는 불자가 많다 하더라도 만만한 수효가 아니다. 20만이던 인구가 14만으로 줄어든 형편을 헤아리면 더욱 그렇다. 그런 것보다는 노악거사림회, 선재합창단, 보광회, 간상부 따위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신도 조직 체계를 꼽을 만하다. 이들은 한 달에 두번 씩 받는 교육 및 실수과정을 통하여 정예화된다.
신信, 해解, 행行, 증證, “믿음은 더욱 견고하게, 교리의 깊은 이해를 위해, 실천적 의지를 다지기 위해, 그리고 구경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가 “볼일” 보러 가는 일도 없이 신도들과 함께 철야 정진에 동참함은 물론이다. 그런 일은 “기쁘게 해버린다”
절의 살림을 모두 공개하고, 절이 주최하는 제반의 행사 및 활동을 함께 의논하는 민주적인 사찰 운영의 면모도 전통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소중한 점이다. 불전과 재비는 총무부와 재무부를 통해 관리하게 해 왔으니, 90년에 신도회로 구성된 사찰운영위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기 이전부터 사찰은 공개적으로 운영되어 왔던 셈이다. “수입에는 미수 없고, 지출에는 초과 없다는 것은 그가 입버릇처럼 되 뇌이는 말이다. 투명한 재정 운용의 원칙은 단월에 대한 그의 엄정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개인적으로 받는 시주조차 절반은 시주자의 이름으로 불사에 동참시키고, 나머지 중의 절반은 절의 경상비로 내놓는다고 했다. 예를 들면 그런 식이다.
이십 년 전에 “고압선 서른 여섯 가닥으로 전기를 끌어 들이는 일로써 시작한”불사는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셈인데, 그 오랜 동안의 불사에도 고지만 했을 뿐 화주책 한 번 돌린 일이 없다. 미수 없이 공개되는 수입에, 그 수입을 “다른 목적을 위하여 자본화하는 법이 없이” 그러나 부처를 알짜로 빛내는 일에는 거침이 없이 지출하는 그에 대한 미더움으로 자발적으로 동참, 그 결과로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포교사업은 어린이 대상, 어린이 불교학교를 개념도 생소할 때인 81년도에 시작했고, 상주 포교당 병설 유치원을 짓고 운영했다. 십 년 전부터 함창의 관음사 불교학생회 창립에 관여한 일로 시작한 청소년 대상 포교는 96년에 지방 조직으로는 최초로 파라미타 상주 지회를 발족시키기에 이른다. 상주고등학교 불교 학생회인 삼매회, 대불련 성주 지부에도 격려금을 지원하고 있다. 일반 시민 및 노인 대상 어울 마당과 함께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청소년 어울 마당은 불자로 참가 제한을 두지 않는 열린 어울림의 장이다. 겸해지는 봉사활동은 주민들과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십 년 세월 가운데, 포교당 시절이 신도들과의 유대감을 드높인 기간이었다면, 97년도에 시작한 냉림종합사회복지관 운영 사업은 포교 활동 기폭제가 되어 줄 모양이다. 상주에는 가톨릭 안동 교구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관이 있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민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강점이 있는 종합복지관은 유일한 곳이다. 전문 복지사 넷을 포함하여 모두여덞 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이곳에는 부설 어린이집이 있고, 독거 노인 편모 편부 가정,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노인 대상 프로그램으로서 날마다 구십 명 이상의 무료 점심 공양, 이·미용 서비스 및 진료 서비스, 질병, 죽음, 용돈, 외로움 등의 노인, 문제에 대한 분기별 초청 특강, 생일 잔치, 효도관광행사를 마련해 드리고 있다.
그 밖에도 김천 소년교도소로 재소자 교화를 다닌 지는 십 년 가까이 되고, 경승 실장을 맡고 있는 상주 경찰서에다가는 그럴 듯한 규모의 법당도 하나 짓고 싶어 한다. 인근 부대 군인들은 지난해부터 월 2회 그를 찾아 법문을 청한다.
남장사에서 문화회관을 빌려 벌이는 시민 초청 행사에는 천 명의 인파가 몰리고, 방생 때는 대형 버스 열 다섯대가 동원된다. 초파일 연등 행렬은 절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인근 변에서 모여 든 주민들까지 가세되어 삼천 명 지역민이 참여하는 축제 한마당이 된다. 니 절 신도 내 절 신도로 나눌 것 뭐 있는가. 신도 재적 사찰 갖기 운동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신도 관리 형태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찰마다의 정기 법회말고는 특징있는 법회로써 자율적인 선택을 하게 해야 옳다. 그러자면 사찰간의 열린 마음, 연대의식이 전제되어야 할 터였다. 그래야 힘이 모인다. 상주 사암연합회 회장인 그의 생각은 그러하다.
삼배는 당치 않으니 일배로 끝냅시다.
그는 신도들에게 그리 말한다. “절을 올리는 이와 절을 받는 이가 모두 참된 성품으로 인연하여 일어난 줄을 관하니” 승보를 예경하는 품한 마음도 아름답고, 옷깃을 여밈으로써 아만을 경계하려는 사문의 모습도 어여쁘다. 어미를 따라온 어린아이에게도 그는 맞절을 한다.
지난번 초파일 날 도량에 내건 등은 이천 남짓, 부모를 모시고 오는 출향 인사도 두셋쯤은 되니 이 곳을 찾은 사람의 수효는 만만찮은 것이었다. 기사 장삼 갖추어 입고 그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어서 오시라 인사하려니, 그 일도 대단한 공부가 되더라 했다. 그러면서도 신도들로부터 “무서운 분” 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는 “억울하다”.
무섭다는 말은 내가 생명을 해치려 한다거나 흉칙한 마음을 먹었을 때나 들을 만한 말이오. 그런 맘이 없으니 “좀 어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난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정”은 “비심悲心” 일터였다. 중생들의 고苦를 현장에서 대사회적으로 실천함으로써 풀려는 그의 마음일 터였다.
극락보전과 보광전 뒤로 펼쳐지는 노악산은 둥글고 부드러워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다. 남종선의 선구적 대선지식이었던 혜소스님은 쌍계사로 내려가 당신이 중국에서 배워 온 범패를 유량하게 풀어 놓기 전에 이 곳에서 수 삼년을 머물었다. 어산魚山,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이 생겼다는 중국 산동성의 산, 조식이 그 곳에서 천상으로부터 범천의 음률을 듣고 지었다는 범패의 딴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노악산이 하늘에 그어 놓는 유려한 선에 붙들렸던 것일까. “금옥金玉같은 그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 나가면, 상쾌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여 능히 제천을 기쁘게 할 만하였던” 그의 범패 소리는 이 노악산 산기슭을 또 그렇게 적시었을 것이다.
스무 해 인연 도량, 성웅스님은 진감 혜소의 자취를 더듬어 그의 위업을 오늘에 재조명하고, 범패 최초 전래지로서의 위상을 부각시켜 보고 싶다.
초발심자경문으로 배운 바, “범패하고 축원할 때에는 글을 외면서 뜻을 새기되, 다만 음성만 따르지 말고… 감응함이 헛되지 않아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줄을 깊이 믿으라 했었다. 그렇게 배운 대로, “우주가 감동해 버리도록 간절히” 올리는 그의 기도는 영험이 있기로 소문나 있다. 그의 기도로 하늘에 길이 열리어 넋들이 인도된다. 혜소스님은 이 곳에서 무량전(현 보광전)을 지었다 하니 그 곳에 모신 분은 아미타불이었을 것이다. 그 또한 예불과 기도를 통하여 올린 염불, 참선하면 견성하고 염불하면 부처를 본다 하니 . 성품을 깨닫는 것이나 부처를 보는 것이나 모두 둘 아닌 하나일 터였다.
화엄경말고도 정토삼부경과 왕생집을 즐겨 읽는 그는 몇 년 전부터 속마음으로 발원해 오고 있는 것이 있다. 이승을 떠날 때는 맑은 정신으로 단정히 떠나게 해 주소서. 영험이 있으니 그 소망은 물론으로 어렵잖이 이루실 터였다.
저녁 대종 소리가 끝 자락만 남긴 채 잦아든다. 아직도 쩡쩡한 한낮 같은 저녁 , 그러나 산 그림자 설핏해 오기 시작하는 저녁답, 비로소 돌돌 개울물 소리 떠오른다. 산을 몸 삼아 핏줄로 흐르던 그것이 풀 숲 그늘 아래로 조신히 제 몸을 더 낮은 곳으로 보내는 자취, 그 소리가 오늘 저녁 상쾌하고도 애정하다. 그 옛날 이런 저녁 시간에 혜소스님 또한 발길 멈추고 가만히 들었을 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