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불교 개혁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박광서 1994년 06월 148호
이제 불교의 개혁은 시작되었다. 삼, 사월은 불교계로서는 실로 진통과 긍지의 시간이었다. 짧은 한달 동안에 엄청난 사건들이 날마다 터지면서 불교계 개혁의 몸부림은 언론과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불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일부 불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에 놀라고 실망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계가 역시 성성히 살아 있고 저력이 있음을 확인한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큰 벽은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그 벽을 받치고 있던 갖가지 비불교적 인물과 폐습들이 여기저기 걸림돌로 남아 있어서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노력 못지 않게 올바른 판단력과 과감한 추진력이 필요한 때이다.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연출한 지독한 악연의 덕으로 개혁 국면이 뜻밖으로 빨리 다가온 까닭에 벽을 허무는 데만 모든 힘을 집중 시켰지 그 이후의 구도와 방향에 대해서 전 불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낼 시간이 충분히 없었다. 따라서 앞으로 개혁을 원만히 성취하려면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그만큼 많을 것이다. 불교가 바로 세워지기를 염원하는 불자들은, 무엇보다도 그 동안 불교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불교계의 새로운 모습은 어떡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와 구체적인 실천 의지를 다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를 이루어야 한다.
첫째, 불교의 청정화이다. 불교는 깨달음과 무소유를 가르치는 종교이므로 청정한 수행 풍토가 확보되지 않으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이번 조계종 사태의 가장 큰 표적도 불청정성이다. 서의현 전 총무장은 자신의 행동이 불자와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킨 분노와 역겨움을 낮게 평가하여 어리석게도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재가 불자들도 지키려고 애쓰는 오계를 잊어버린 탓이다.
오계의 첫째는 불살생이다. 불살생은 자비로서 모든 생명을 자유롭게 하고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곧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불자 제일의 선언이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면서 도반을 폭행하려고 거리의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이제 불교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으며, 그에 관련된 자는 결코 불자들의 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음은 불투도 이다. 철저하게 무소유를 추구해야 할 승려가 풍요속에 안주하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비록 일부에서는 주지직을 사고 파는 일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루어지고 심지어는 주지자리를 놓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부처님 법 잘 펴라고 시주한 돈으로 권력을 지키려고 물쓰듯하고 또 나만을 위해 뒤로 챙기는 사람은 불교를 팔아 도둑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자들은 보시하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겠고, 종단과 사찰 재정의 투명성과 공개적 운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스님들의 공정한 인사와 활동 여건의 마련 그리고 승려 노후보장제도의 확립에도 각별한관심을 가져야 한다.
불망어는 어떤가. 비폭력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스님들에게 폭력배를 끌어들여 폭행을 한 전 총무원장에 대해 불자들은 분노했다. 결국 폭력은 오히려 개혁의 신호탄 역할을 한 셈이다. 삼선에 선출된 뒤 그는 기자 회견장에서 “결코 폭력을 동원한 적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폭력을 동원해 종권을 잡으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있지만 일치 단결하여 교권을 지키고 절대적으로 신임해 준 종도들에게 감사한다” 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바로 며칠 뒷면 자신의 폭력배 동원이 폭로될 줄 모르고 그런 거짓말을 해대는 사람이 우리 종단의 책임자였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불사음은 어떤가. 아니 비구니승에게 요구되는 불음계는 어떤가. 은처 시비로 법원에서 비구니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고 여비서와의 추문으로 도덕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 천만 불자의 최고 지도자였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런 어두운 부분이 청정 승단 안에 있도록 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무서운 악연이고 억압이 깊이 참회할 일이다. 불교가 맑고 향기롭게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종교로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청정성 회복은 모든 불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불교의 사회화이다.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한 개인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고 그 사회의 병폐가 남아 있는 한 결코 깨달음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나 혼자만의 성불과 안락함을 구할 때 출가 정신도 퇴색하고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차츰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 국토의 사람들이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나는 절대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리라(무량수경)”고 한 보살의 서원은 깨달음의 사회성을 잘 나타낸 것이다. 불교는 한 개인의 복락 차원에 머무를 수 없으며 또 승가만의 문제, 불교계라는 울타리 안의 문제로만 다루어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자기나 불교와는 관계없을 것 같은 사회의 고통과 구조적 모순들이 결국은 자신과 불교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그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이고 동체대비요 공업 중생의 가르침인데도 말이다.
모든 불자들이 바라는 불국정토, 곧 사회의 불교화는 단순히 염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사회화가 앞서야만 가능하다. 특히 불교의 사회성 회복을 승가보다 더 절박하게 느끼는 재가 불자의 종단과 사찰 운영 참여는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불교의 자주화이다. 종교와 정치는 인간 사회의 두 축이다. 종교와 정치가 서로 존중하며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때 이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종교가 밀착하면 반드시 타락함을 말해준다.
교리적으로 볼 때 불교만큼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불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정권에 예속되어 종권 확보에만 연연해 왔다. 그럴 때마다 의식 있는 불자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일반 국민들도 불교를 냉소적으로 보았다. 이번 조계종 사태는 불교계 내의 썩은 무리들과 무지한 정치권이 결탁하여 양심적이고 신심 깊은 불자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아직도 정부는 조계사 사태 때의 부당한 공권력 투입과 과잉 진압 그리고 폭력배에 대한 교묘한 묵인과 그 배후에 대한 흉내내기식 검찰 수사들에 대해 불교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과마저도 철저히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언론을 통해 호도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직력과 의지가 약한 불교계의 항의에 대해서는 시간이 약이라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기껏 원로 스님이나 중진 스님 몇몇을 개별적으로 회유하여 불교계를 적당히 달래거나 조종하려 들고 있다.
모든 불자가 불교 개혁을 염원하는 지금, 결코 정권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해서도, 결코 몇몇 정치승들의 탐욕과 이해 관계에 놀아나서도 안 된다. 법난에 대한 정확한 문제 인식과 단합된 모습으로 백만인 서명운동과 검찰에의 시민고발 운동 등을 통해 대통령의 사과와 내무부 장관 해임을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다시는 불교를 호락호락하게 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개혁은 이 세 가지 측면, 곧 불교의 청정성과 사회성 그리고 자주성 회복 어느 한가지라도 모자람이 없도록 의식과 제도 그리고 인물의 개혁을 이룰 때 비로소 완수될 것이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불자들이 가야만 하는 길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불자 한 사람 한사람이 가슴속 깊이 다짐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