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연기緣起 법사 효행 설화를 담은 사자탑과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종 대가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1월 155호
이태호·황호균

사자탑 앞의 탑전에서 섬진강 쪽을 바라보면 눈이 시원히다. 아스라이 보이는 굽이진 강줄기, 강물이 절쪽으로 흘러 들어오니 그야말로 복 들어오는 형국이라나 어쩐다나. 백팔 번뇌를 상징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세면서 내려가 각황전 앞에 선다.

우리 나리에서 가장 큰 석등에 불을 밝히고, 또 다른 사자탑
번번이 화엄사를 들을 때 마다 이 각황전에서 예불 올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겉 모양은 이 층이나 속으로는 관통하여 일 층 집인 그 웅장한 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의 공명은 참으로 장염 그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송광사의 예불문이 작곡가 김영동 선생에 의해 널리 알려져 그 신비한 불교 음악의 세계를 다소나마 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글 쓴 이는 이십여 년 전에 바로 이 각황전에서 그것도 생음악으로 시각적인 분위기까지 곁들여 불교 음악의 진수를 맛보곤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듯 각황전 건물은 그 크기에서 우러나오는 웅장함도 놀랄 일이지만 앞에 놓인 석등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이 석등은 우리 나라의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높이 육미터 삼십육 센티미터에 달하고 국보 제l2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형인 팔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주석을 마치 북의 허리처럼 만들어 전라도지방 석등의 간석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석등의 간 주석은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약간 짧은 듯 하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석등의 당당한 위풍은 뒤의 이층 팔각 지붕의 각황전 앞 장명등長明燈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울어진 것을 1961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제작 시기는 동서 오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구 세기 무렵일 것이다.
원통전 앞에는 또 다른 사자탑이 있다. 높이 삼 미터에 달하고 보물 제300호로 지정된 이 탑에 대해서는 그 용처를 알 수가 없다. 어느 글에서는 노주露主라고 하고 사적기에서는 감로탑으로 기록하기도 하나, 일반적인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의문이다. 혹 원통전 앞과 감로탑의 용어에서 오는 관계나 부도탑의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으나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어서 화두로 삼아야겠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로 잡석을 받치고 있는데, 각 층의 연화문에나 탑신부의 조각이 사사자삼층석탑과 비교해 볼 때 둔탁한 느낌이 든다. 이는 양식상 사사자삼층석탑보다는 제작 시기가 뒤떨어지는 것으로 오층석탑의 건립 시기인 구 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어쩌면 오히려 그 이후로 내려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심 법당 – 대웅전과 각황전-과 보제루
화엄시에는 기역자 형태의 축대 위에 법당이 두 군데에 자리하고 그 앞에 오층석탑이 있는 아주 특이한 가람 구조를 보여 준다. 이러한 층단식 가람 배치는 앞서 얘기한대로 산자락에 절을 창건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이다. 곧, 어떻게 하면 좁은 터를 넓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공간 측면에서 그 효율성을 높이고, 시각적인 피로도까지 고려한 매우 탁월한 발상인 것이다.
화엄사의 중심 법당은 대웅전이다. 이 법당은 정면 다섯 칸과 측면 세 칸이며 지붕 모양이 팔작인 기와 건물로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경내에서 각황전 다음가는 큰 건물이며 그 앞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석축과 돌계단이 고풍스럽다. 이 돌계단은 대웅전으로 가는 통로이며 오랜 세월 참배객들의 발과 손에 닳아 아주 반지르르하다.
대웅전은 남서향으로 동쪽으로 삼십도쯤 틀어 졌으며 기둥 간격이 같고 높으며 열이 매우 정연한 느낌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0년(인조8)에 벽암 각성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규모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서 가장 뛰어나다.
하지만 화엄사는 화엄종의 도량이므로 중심 법당의 명칭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편액은 대웅전이어서 의아하다. 더구나 1751년에 만들어진 후불 탱화가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하는 비화나 삼신불화를 걸고 있고 대웅전 편액도 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필치이며, 절에서 전하기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의 의미이라고 하지만 이도 다른 사례가 없어 고증 할 길이 없다.
특히 법당에 봉안된 불상도 후불 탱화와 마찬가지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고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목조 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다. 불상의 제작시기는 불사 관례상 후불 탱화의 제작 시기인 1757년이라기 보다는 법당 건립 시기인 1630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화엄사에는 대웅전 외에 또 다른 중심 법당이 있다. 대웅전의 오른편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의 중층으로 만들어진 팔작 기와 지붕의 다포집을 각황전이라 이름한다. 국보 제67호로 지정될 만큼 고 건축사에서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돌 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이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정井자 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 양식은 외부 첨차의 굽어짐이 매우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며 , 전체적으로는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있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각황전은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탄 것으로 알려졌으며 소실되기 전의 이름은 장육전文六殿이며 삼층이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장육금신을 입상으로 봉안하였을 것이다. 황룡사 금당에 장육존상대좌석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기에 장육불 신앙의 성행을 짐작케 한다. 1965년 조사 때 지금의 각황전 불단 밑에서 장육전 당시의 불상 대좌석으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고고미술 6권 9호에 실렸다. 더욱이 장육전 불상도 건칠한 토제 나발이 몇 개 발견되어 소조불이나 건칠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정육전의 네 벽면에는 화엄경을 돌로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그 화엄경 돌조각의 파편들이 각황전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 보관되어 왔으나 얼마 전에 동국대학교에서 전체를 탁본하고 대웅전 옆의 영전에 옮겨 놓았다.
각황전에는 세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네 분의 보살님이 계신다. 말하자면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 보살이 협시하고, 그 양면에 다보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하며 맨 끝 좌우에 지적智積 관세음보살이 자리하는 구도이다. 지금 절에서는 문수 보살의 바깥쪽 부처님을 탱화에 기록된 대로 약사여래로 알았으나 1975년 봄의 개금 불사 때에 발견된 복장기에 의해 다보여래임이 밝혀졌다.
이로서 비로자나불을 주 존불로 해야 하는 화엄종의 도량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각황전이 건립이 되고 그 안에 법화경에 등장하는 지적보살을 배치한 것은 그야말로 법화경의 신앙이 반영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창건 당시부터인지 아니면 각황전이 재건되는 1702년과 불상이 조성되는 1703년 무렵 사상의 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법당의 축대를 내려와서 쌍탑이 세워진 마당 앞에 보제루라는 강당이 자리한다. 보제루는 목초로 된 기와 지붕의 누각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이며 정면 일곱 칸, 측면 두칸씩 맞배집이다. 본디 법요식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터에 동, 서 탑과 같은 높이로 건립되었다.
대웅전 쪽은 지면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아 바로 기둥을 세웠으나 반대 쪽에서는 한 단 낮은 터에 막돌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누각 모양으로 꾸몄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 쪽 창문은 일곱 칸으로 모두 큰 두 짝의 빗살문을 달고 반대 쪽 다섯 칸은 판문으로 대치하였으며 좌우 두 칸은 문을 생략 하였다. 공포의 양식은 초익공 양식이다. 이 건물의 건립시기는 1800년 이후로 생각된다.

오층으로 만든 두 개의 석탑, 산지 가람의 절묘한 공간구조
화엄사 경내를 쭉 둘러보면 좀 색다른 공간 구성이 눈에 띈다. 두 탑을 세우고 그 위를 축대로 사람 키보다 높게 쌓고 그 위에 중심 법당들을 배치하는 눈 맛이 시원할 정도로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가람 구조이다. 대웅전 앞에 놓인 쌍탑은 대웅전 좌우에 대칭되지 않고 너무 한쪽에 치우쳐서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 금당 쌍탑이라기 보다는 대웅전 앞에 일 탑, 각황전 앞에 일 탑을 배치하여 각기 일 탑, 일 금당의 기본 형태를 마련한 듯 싶다. 또 법당 아래에 축대를 쌓고 그 밑에 쌍탑을 세운 건 물배치는 산지 가람의 특수한 지형 여건 아래에서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혜안이었을 것이다. 가까운 연곡사도 몇 년 전의 시굴 조사에서 이와 비슷한 가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동서탑은 높이 육미터에 달하며 보물 제132호와 133호로 지정되었다. 동탑은 남향의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짝한 구도이다. 서탑은 각면에 십이지신상, 팔부산중상, 사천왕상을 가득히 장엄한 데 견주어 동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수수하다. 또 서탑이 이층 기단임에 비하여 동탑은 단층 기단이다. 옥개석은 얇아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처마끝의 들린 정도가 밋밋하다. 추녀 밑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모두 사 단이다. 이 층 이상의 옥개석은 옥신을 따라 체감률이 많은 편이다. 상륜부는 노반 외는 후대에 보수한 부재로 여겨진다.
석탑의 모습이 길쭉하면서도 아래로 줄어드는 비례에 따르는 경쾌한 들림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풍을 지닌다. 여러 조각상들은 절정기의 조각에는 못 미치는 얼마쯤 굳은 듯한 자세이나 석탑의 비례에 따르는 경쾌한 기품이 그런대로 보아 줄 만하다. 석탑의 조성 연대는 조각상이 가미된 점, 또는 옥개석의 모습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인 구 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석탑의 남쪽 앞에 놓인 배례석에는 측면에 안상과 함께 상면에 연꽃이 새겨졌다. 이 두 탑은 서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는 않고 축석이 약간 틀어져 있어 이를 후대에 보수하면서 재배치한 혼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저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 세워진 탓으로 볼 것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이 두 탑이 과연 같은 시대에 지금의 위치에 세워졌던 것인지도 또 하나의 화두다.

장육전 중창 불사에 얽힌 거지 노파 공주 환생 설화

화엄사에는 장육전 불사에 얽힌 거지 노파의 공주 환생 설화가 흥미롭다. 벽암 대사의 상좌 계파 대사가 장육전 불사의 원만한 성취를 위해 백여 명의 기도승을 위해 공양주를 자원했다. 계파 스님은 자신의 직위를 돌아보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밥 짓고 물 길으며 청정한 마음으로 대중 스님들을 공양했다. 이윽고 백일 기도가 끝나는 회향 일에 한 노장 스님이 대중에게 말하기를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장육전 중건을 위한 화주승을 뽑으려면 대중이 시험을 해야 한다 했다. 곧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이 화주승이 되어 장육전을 지어야 한다는 부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꿈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모든 기도승들도 모두 다 자기들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므로 이것을 바로 문수 대성의 유촉으로 알고 그대로 시험했다. 산내 모든 대중이 모여 차례차례 손을 물에 넣었다가 밀가루를 만지니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백 명의 기도승을 비롯하여 모든 대중에게도 화주승의 중임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대중을 시봉하던 계파스님의 차례가 왔다. 자기는 기도에 참여하지 않고 부엌일만 했으므로 화주승의 자격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게 웬 일인가. 계파스님은 두 손을 물에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깊이 넣었다 했지만 손에는 밀가루가 묻지를 않았다. 신기하여 세 번이나 계속했으나 역시 밀가루는 묻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다 일어나서 계파스님을 향하여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겼다.
그러나 계파스님은 수행만했을 뿐 화주에는 전연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 걱정하며 대웅전에 정좌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밤중에 한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 말라. 내일 아침 바로 화주를 위해 떠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계파대사는 용기를 얻었다. 다음날 아무도 몰래 화주책을 품 속에 간직하고 산문을 내려 갔다. 한참을 가니 그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동구 밖 대밭에서 의지할 곳 없어 때때로 절에 와서 일을 돕고 겨우 식은 밥을 얻곤 하던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 노파를 보는 순간 계파 대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 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 달라고 권한단 말인가. 그러나, 계파스님은 지난 밤 문수 대성의 계시를 생각하고 그 노파에게 장육전 건립의 시주를 청원하고 계속 절했다. 노파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파스님은 하루 종일 노파에게 앞뒤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 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계파스님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서원을 발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 이렇게 대서원을 발하고 지금의 마을 입구 용소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노파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이었다.
계파스님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실색하여 멀리 길을 떠났다. 오륙년을 걸식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한양에 도달하였다. 하루는 창덕궁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 밖을 소요하던 어린 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 공주는 계파대사를 보자 반가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우리 스님이라면서 달려와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쪽 손을 꼭 쥐고서 펴지 않았다. 계파 대사가 공주를 안아서 꼭 쥐고 있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란 석자가 씌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계파 대사를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종 듣고 감격하여, 장육전 건립의 대원을 발하였다고 한다. 곧, 청정한 원력으로 그 노파는 공주로 환생하여 장육전 건립의 원력을 성취 한 것이다.
따라서 장육전이 완공되자 왕은 사액을 내려 각황전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이란 뜻에서 각황이라고도 하지만, 그 보다는 대왕을 깨우쳐 보전을 중건하였다는 뜻에서 각황전이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절 밥을 얻어 먹는 하찮은 거지라도 그 청정한 원력과 공덕으로 장육전 중창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두고 두고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지닌다. 물론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다. 파계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거기에서는 숙종 대신 영조가 등장한다. 각황전 수리 할 때에 발견된 장육전 상량문(1701년, 숙종 27년)에 왕자 시절의 영조(연잉군)와 숙빈 최씨가 대시주로 적혀 있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