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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옛 수도 집안땅을 찾아서-웅혼한 대륙의 기상, 광개토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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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숨결과 풍정 - 이호신 1995년 01월 155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대륙의 기상이 넘쳐 나는 이 긴 이름은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요하에 이르는 중국 땅을 호령했던 고구려 제19대 임금(374-412)으로 재위한 주인공의 이름이다.
‘광개토왕릉비’또는 ‘호태왕비’는 이 비문에서 딴 이름으로 그의 아들 장수왕 이년(414)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자리 하고 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이백 미터 지점에 태왕릉太王陸이 있고, 동북쪽 천삼백 미터에 장군총將軍塚이 있다. 비석은 자갈돌이 박힌 응회암으로 약간의 인공을 가했을 뿐 자연석 그대로의 웅대한 장방형 비석이다. 이 자연석 비의 형태는 국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의 특징적인 거석 기념물의 하나인 선돌(入石)을 세워 비로 한 양식이다.
비신의 높이는 육백삼십구 센티미터이고 사방 한 면의 넓이는 일 미터 삼십센티에서 이 미터에 이르며 무게는 삼십칠 톤이나 된다. 비석 면마다 글씨를 새겼는데 홈을 파서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그 안에 세로 선을 그어 각행을 표시하여 정연한 구획을 이루고 있다. 글자 수는 천칠백칠십다섯 자로 밝혀졌으나 백오십여 자는 아직 판독이 가능한 상태이다.
비문의 서체書體는 예隸이나 초草, 해楷의 각체가 부분 반영되고 자형字形은 정방형正方形을 보이며, 글씨 크기는 큰 것은 십육 센티미터, 작은 것은 십일 센티미터 정도이며 대부분의 글자는 십사, 십오 센티미터로 배합과 간격이 비교적 균등하다.

능비가 제작된 사백십사년(장수왕 이년)은 중국 진안제의희晉安帝義熙 십년으로 왕회지가 난정계회蘭亨稧會를 가져 유명한 난정서蘭亨敍를 썼다는 영화永和 구년보다 십일 년 뒤이다. 이 무렵의 일반 통용 문자는 해서였으나 본 비는 전서로 썼다. 그것은 전서는 해서보다 정중하므로 왕릉에 대한 최고의 존엄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임창순 「고구려의 금석과 서예」

이 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광개토왕릉비의 서법을 살펴보면 후한으로부터 위진을 거쳐 육조 전기의 서법을 거의 종합한 느낌에다가 민족성의 특성마저 보여 주고 있다.

전篆의 장방長方도 아니며 예隸의 편방扁方도 아닌 점은 광개토왕릉비의 특색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공포한 당시의 정음자체正音字體와 친연성이 보여 이것이 전형적인 한민족 본연의 특성이 아닌가 하고 놀란다. 또 정음자와 한자를 혼용할 때 곧 광개토왕릉비체와 훈민정음자체를 함께 써 놓을 때 하등의 부조화도 느끼지 않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김응현 「고구려의 서법고書法考」


따라서 시대를 초월해 광개토왕릉비의 문자는 고구려의 웅혼하면서도 질박한 국민성과 당시의 시대 배경 -서법사장의 과도기-이 서로 융합되어 창조된 새로운 서체, 곧 독창적인 민족 정서가 고양된 글씨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예술성을 떠나 내용은 오욕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일제에 의해 본 비문 일 면 구 행의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記事 날조 사건’으로 1880년 청나라에 파견된 일본 육군 스파이 사코우 카게아끼(酒勾景信) 중위를 통한 일본 육군 참모 본부의 조작설이 그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시묘년에 바다로 건너 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조작된 해석은 결국 일제에 의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미끼로 작용되었다. 이에 맞서 1910년대 신채호는 현지 답사를 한 뒤 의문을 제기하였고, l930년대 말 정인보의 연구가 이어졌으며 북한의 박시형과 재일교포 이진희가 비문 조작설을 발표하였다. 또 이형구, 박노희는 신묘년 기사를 재해석 (1986)하고 최근 연변대학 박진석 교수는 「호태왕비와 고대조일관계연구 논문」(1993)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여름 현지 답사에는「잃어버린 왕국」에서 광개토왕릉비 부분을 소설로 썼던 최인호 씨가 눈에 띄고, 문화재 전문위원 신영훈 선생은 비신이 움직여진 사실을 일행에게 설명하였다. 곧 비석은 검은색이나 하얀 화강암의 댓돌은 정방형인데 애초의 원석이 지금은 세 쪽으로 갈라져 있다. 문제는 비석을 들었다 놓았을 때 깨어질 가능성과 함께 댓돌에 비석이 위치할 애초의 중심선 표시 T자가 지금은 뒤쪽으로 물러나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대석 위에 몸통을 놓을 U자형 홈이 비석과는 오십 센티미터 가량 앞쪽에 드러난 것 또한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목수 출신인 신선생으로서는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화실에 돌아와 내내 그 생각을 하다가 지금 비석의 보호각을 벗기고 비바람 속에서 일천육백여 성상을 지켜온 비를 대지 위에 세워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따라서 비석문은 박진석의 것으로 하되 신묘년 기사 왜곡만은 이형구편으로 집성해 보았다.
어쨌든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비문의 진실과 본령의 뜻만은 거역 될 수 없는 것으로 오늘의 민족 기상으로 되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침 새해 새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