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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일어나 빛을 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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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시명 1994년 05월 147호
다시 오월이 오고 있다. 푸른 숲과 모란꽃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민주화의 함성과 함께, 많은 것이 뒤섞인 채 오월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부처님 오신 날도 오월과 함께 온다. 서씨의 삼선 야욕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계종. 사월의 혼란과 개혁 그리고 곪아 터진 상처를 딛고 새살이 돋는 고통과 신음, 고단함이 뒤범벅이 되어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님 오신 날이 온다.
비가 오고 난 뒤에 새순 돋아 고개들은 초목을 볼 때처럼 새로 시작되는 개혁에서는 신선하고 상큼한 새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묵은 어둠이 가고 첫 새벽이 밝기를 모든 종도들은 얼마나 기다렸던가. 새벽 빛과 같은 개혁을 얼마나 염원해 왔던가
새로운 탄생을 위해 고통과 신음은 언제나 예비되는것, 그 뒤에는 탄생의 기쁨 또한 있게 마련이니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맑게 개인 하늘 같은 모습으로 님을 맞고 싶다.
각 사찰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려고 종단 안팎이야 시끄럽든지 말든지 연등 만들기를 비롯하여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다.
여래는 과연 오시는가.
「금강경」 위의적정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오셨다, 가셨다, 앉았다, 누웠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말뜻을 잘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신 바도 없으며 또한 가신 바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오시지도 가시지도 않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사찰에서는 연등을 만든다, 행사를 한다 웬 야단법석인가. 근본 입장에서 보면 여래는 오고 감이 없지만, 언제나 현상에 집착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국집局執하고 있는 중생들에게는 부처님은 오심도 가심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인도말 붇다Buddha에서 온 순 우리말이고 붇다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요, 진리란 항구불변하며, 여래란 오고가는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없던 진리가 갑자기 생겨난것도 아니고 앞으로 내가 열반에 든다고 하여 또한 진리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 눈 뜬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 중생으로 안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스스로 도道를 가까이 하지 않을 뿐이지 결코 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동양 고전하고도 일맥 상통한다 부처님께서 우르벨라에서 안거하실 때의 일이다. 그해는 가뭄이 극심하여 대중이 함께 안거할 형편이 아니었다.
인근 마을에 박카리라는 병든 비구가 있었다. 병세가 깊어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자 박카리 비구는 함께 지내던 한 비구에게 죽기 전에 한번만 부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그 비구가 부처님께 가서 그 동안의 사정을 다 말씀드리자, 부처님은 기꺼이 박카리 비구를 병 문안하였다.
병 문안을 받은 빅카리는 황송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경배 드리려고 몸을 일으키자 부처님은 온화한 음성으로 병은 좀 차도가 있냐”고 물은 뒤 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박카리를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박카리, 나에게 절하려고 아픈 몸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네가 그토록 경배 드리려고 하는 이 몸은 언젠가 썩어 갈 몸뚱이에 불과하다. 네가 정녕 절하고 싶거든 이 썩어 갈 몸뚱이가 아니라 내가 평소에 너에게 설법한 그 진리에 절해야 할 것이니라.“ 나는 진리이니,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자이고 시간,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진리의 몸을 보는자는 나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육신의 오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현현 나아가 자비와 지혜의 등불로 오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에 가장 빛나는 부분은, 모든 중생이 가엽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모두 불성을 갖춘 한량없는 공덕장이요, 당당한 미래의 여래라고 선언한 평등사상이다.
이러한 평등 사상은 부처란 시대와 공간을 현출하게 벗어나 모두에게 열려 있는 중생의 지평이며 모든 생류의 보편적 이상이고 희망의 깃발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셨고 길에서 돌아가신 길의 성자이다. 길은 많은 것을 상징하지만 부처님은 특히 모든 생류에게 놓인 자신의 길, 바른 길을 가르쳐 준 중생의 교사로서의 길을 일생 동안 당당하게 걸으셨다.
부처님은 세속의 권세와 부와 명예의 왕이 아니라 진리와 자비와 지혜의 왕이셨다.
부처님은 바루 하나와 헌옷으로 몸을 가리고 일생 탁발하며 삶을 유지하였지만 세간의 어떤 부자보다도 만족한 삶을 살고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고고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착함으로써 악을 이겨라. 베푸는 것으로 인색함을 이겨라. 온화함으로 성냄을 이겨라. 자식을 둔 에미같이 중생을 사랑하여라. 원망은 원망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성냄 또한 성냄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과 성냄을 이겨라.“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노라면 오늘의 우리들은 너무나 부끄럽다. 그 분이 말씀한 진리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특히 지난 사월의 혼란은 온갖 말로 정당화하려 해도 그 분 앞에선 부끄럽다. 이제 한국 불교는 참다운 참회를 통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위도식과 폭력을 일삼는 비상식적인 집단이라는 사회 일각의 인식과 불명예를 씻으려면 뼈를 깎는 참회와 정진 그리고 수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더 이상 이권 경쟁에 골몰하여 또 다시 분규를 한다면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은 정치적 강권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젠 여론과 민중의 돌팔매질과 질타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무리 위대한 부처님의 교설이라도 널리 퍼져 실행되지 않으면 조금도 소용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한국 불교의 제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 부처님의 위대한 교설이 없기 때문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다.
오늘을 사는 승가는 바로 오늘의 부처님들이다. 오늘의 숭가가 참다운 진리를 시현할 때 부처님의 참다운 현현도 찬란한 광휘도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 오심을 기리지만 말고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이 모두 일어나 빛을 발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