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헌 종법에 나타난 승려상
어떤 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교육목표가 설정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승가교에 배대配對 시켜 본다면 ‘승가교육은 어떤 교육목표를 지향하고 있느냐’하는 물음을 다시 내던지게 됩니다. 이에 교육목표의 근거가 필요한 것을 ‘현대의 율장’인 종헌·종법에서 몇 가지 뽑아보았습니다.
1. “본종은 석가 세존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각覺行圓滿한 교리를 봉체奉體하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로 한다.”(종헌 1장2조)
2. “승려는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봉사자이며 성직자로서 고매한 인격과 자질과 능력을 갖추어 평소 언행에 대중의 사표師表가 되고 불타의 구세원력救世願力 실천자로서 수행과 전법을 통하여 불국토건설의 사명을 다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승려법 1장2조)
3. “종단 교육은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고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근본이념 아래 모든 종도에게 깨달음을 성취하고 보살도를 실천함에 필요한 교육을 시행하여 불국토 실현에 이바지할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다.”(교육법 1장 1조) 념 이래 모든종도에게 깨달음올성취하고
이 조항을 통하여 우리는 바람직한 승려상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도 드러나게 됩니다.
문제를 보는눈
한 사람의 비구는 개인적으로는 한명의 수행자 그 자체인 동시에 교단적으로는 교단대중의 한 구성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한국불교에서는 또 어느 문중의 소속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불교의 비구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수행의 주체이며 한 문중의 소속된 식구이며 또 전체 교단의 한 구성원이라는 3중성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3중성 속에서 수행자 자격으로 부딪치는 문제점, 문중 식구로서의 책임감, 교단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집니다. 때로는 공부경계 때문에, 건강 때문에 그리고 갖가지 정형화되어 있는 제도로 인하여 갈등하기도 하고 때로는 문중과 교단의 보호와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입산으로부터 수계 그리고 다비장에 갈 때까지 번뇌하고 고민하고 경쟁하고 때로는 환희하면서 수행자의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 입장에 모든 가치의 우위를 두기도 하고, 문중(新門中 개념까지 포함)의 입장에 가치를 우위를 두기도 하며, 교단의 입장에 가치의 우위를 두기도 합니다. 이는 수행자 개인 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 비록 도식적인 분류이기는 하지만 개인적 입장을 1차적 사고思考, 문중적 입장을 2차적 사고, 교단적 입장(세계,우주, 법계까지 포함)을3차적 사고라고 구별하여 부르고자 합니다.
종교교단 역시 중생이 모여 사는 곳이라 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해야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지가지의 이견들을 조정하고 통합해야만 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저마다 처한 위치나 문제를 보는 각도에 따라 첫째 개인적 입장, 둘째 문중적 입장, 셋째 교단적 입장에서 나름대로 접근해 가게 됩니다. 이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과 추구하는 가치관 그리고 명분과 실리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특히 사안에 따라서 개인입장, 문중입장, 교단입장으로 관점을 스스로 바꾸어 가며 접근하기도 협니다. 한가지 더 추가시키고 싶은 것은 신문중 개념입니다. 같은 본사, 같은 강원(학교 포함), 같은 단체에 소속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입장만을 대변하는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 2차적 사고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각자의 주관적 주장만 난무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문제 해결의 원칙이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 입장이 교단적 입장과 일치하고 문중의 입장이 교단의 입장과 일치할 때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교단의 이익이 개인의 불이익·문중의 불이익으로 다가올 때는 결국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발생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해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그대로 두는 것은 가장 못난 해결책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의 대원칙은 당연히 교단과 전체 승가의 입장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즉 개인의 입장보다는 교단의 입장이 우천 되어야 하며, 문중의 입장보다는 교단의 입장이 더 우선 되어야 한다는 밀입니다.
교단문제의 근원적 해결 방법인 교육
94년도 개혁회의 뒤로 교단의 모든 문제는 교육의 체계성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대중의 공감대 위에서 교육원敎育院이 탄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육원의 주관 아래 교육의 체계화를 위한 일련의 작업이 4년 동안에 진행되어 왔습니다.
근본원칙은 모든 수계자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기 2543년(99년) 4월 30일 사미·사미니의 기본교육기관 입학을 촉구하는 총무원장과 교육원장의 공동담화문을 통해 기본교육기관에 들어가지 않은 사미·사미니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은사·본사까지 밝히는 초강경 조치를 취한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미 교육자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은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육기관에 미입학 사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근기가 워낙 수승하여 혼자서도 깨칠 수 있다는 독각승입니다. 이는 교육이라는 것이 내 공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개인적인 1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전통적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입장에서 은사 밑에서 공부하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 공부 속에는 살림살이·부전 등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제자를 사적인 관계에만 묶어 두고 있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은사는 1차적 사고, 제자는 2차적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셋째, 교육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담화문 발표 뒤로 6월 11일 전국 비구니회에서 해마다 사미니 강원의 지원자수 보다도 수용 할 수 있는 인원이 예순 명이나 부족한 까닭에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제도 미비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교단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기존 강원의 사미과 정원을 더 늘이거나 새로운 강원을 만들어서 해결하면 될 것입니다.
넷째, 환속자·질병자 기타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 조치 뒤 강원의 입학 인원이 지난해보다 80퍼센트 이상 증가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만(‘불교신문’ 7월 6일자)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인원이 교육 자체를 회피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8기에서 13기 행자의 1278명 가운데 769명만이 기본교육기관에 입학. 불교신문 4월 30일자)
이러한 미입학 수계자 문제와 함께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강원 문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교단 안에서 가장 많은 숫자(현재 16개 강원)와 가장 많은 인원(99년 6월 30일 현재 총 재학인원 1011명)이 교육을 받고 있는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전통적인 교육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원의 개선을 통한 승가교육의 체계화가 가장 교육적 효과가 뛰어나며 또 교단안에서 가장 파급적인 효과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의 개선을 위한 파열음 또한 가장 클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승가대학(강원)령 개정의 비일관성
96년 7월 강원령이 개정되었습니다. 그 골자는 적정한 규모의 학인과 교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학인 정원 50명 이상, 교직자 정원 5명 이상이 그 요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理想論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여 4개월의 논란 끝에 학인 하한선을 30명으로 하향조정하고 2년 동안의 유예 기간을 두는 선에서 97년 6월 30일 개정하였습니다. 이 인원은 97년 학인 정원 논란 당시에 본사 종무소 소임자 및 교직자 회의에서 하한선을 20명으로 건의하였기에 교육원 안案인 50명과의 절충선에서 30명으로 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99년 4월 본사주지회의에서 하한선을 10명으로 하향 조정할 것을 제의한 바 있습니다.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건데 두 가지 문제점이 도출됩니다.
첫째, 일관성의 결여입니다.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즉흥적으로 대응하려는 무원칙적 상황논리의 만연입니다.
본사 총무소에서 하한선 30명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정원을 채우려는 노력은 얼마나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원칙은 간 곳이 없고 2년이나 지난 뒤 일방적으로 10명으로 하한선을 정해 버리는 둥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99년 6월 30일 현재까지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범어사, 법주사 등만이 이 요건 충족)
2년 동안 유예기간 뒤에도 만일 문제가 있다면 이는 교육원, 교직자, 본사 종무소 소임자가 다시 모여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의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강원 문제는 ‘본사 종무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본사의 문중적 그리고 강원의 신문중적인 2차적 사고의 만연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 학인이 모이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중 강원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 때문입니다. 그런 근본적인 이유를 도외시하고 특정 강원에 학인이 집중되어 우리 강원에 학인이 오지 않으므로 상한선도 정해야 한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학인이 많이 모이는 강원은 원융살림 곧 3차적 사고로써 교단강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사 종무소의 주지 스님 이하 중진 스님들은 한 문중의 수장급 대표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체 교단 속의 어른입니다. 그러므로 문중적인 2차적 사고에도 충실하셔야 하겠지만 교단의 중추로서 교단적인 3차적 사고를 함께 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육원의 비일관성
교육원이 현재로서는 그래도 가장 3차적 사고에 가깝다고 활 것입니다. 우선 교단 전체라는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실무적 장애 때문에 교단 전체보다는 교육원 일하기 편한대로 ‘좋은 게 좋다는’식의 입장에서 1차적, 2차적 사고의 문제점과 타협할 때는 이것도 교육원이라는 신문중적 2차적 사고에 떨어질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하한선 50명의 원칙이 슬그머니 30명으로 떨어지더니 급기야는10명까지 묵인해 버리는 5월 26일 제41차 교육원회의 결과는 교육의 질적 개선에 대한 의지를 종도들로부터 의심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원 소임자들은 실무의 편안함 쪽으로 적당히 어물어물하면서 2차적 사고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지는 1차적, 2차적 사고에 동조한다면 불교교육의 앞날은 현재와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3차적 사고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이 시점이 가장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원칙대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문중 강원, 교단 강원
절집 교육은 전통적 도제徒弟양식에 입각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방식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직접 지도하는 가장 이상적인 교육을 말합니다. 이 속에서 공부는 물론 한 문중의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스승도 수승해야 하고 제자도 수승해야 만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부족하다면 무교육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교육 방법이 조선시대 이후로 오늘까지 불교교육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의 연장 개념이 문중 강원입니다. 일 대 일의 관리에서 문중이라는 복수적 관리 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적인 교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전국 대부분의 강원들이 여기에 책 있다고 할 것입니다. 냉정히 반성해 보건데 결국 그러한 교육 형태가 오늘날 교단에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느냐 하는 평가에는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적인 교육은 무교육 내지는 부실교육으로 연결되어 강원에 가도 배울 게 없다 는 풍토의 만연으로 이어져 결국 강원교육을 회피하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니 강원교육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결국 교육개혁이 나오게 된 근본적 원인 제공이 강원교육내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현대식 학교 체제의 교육방식을 일부에서 도입하고 있으나 이 역시 승가의 기본 정서와는 동떨어지는 것인지라 현재 많은 문제점에 봉착해 있습니다.
따라서 사적인 2차적 사고의 문중 강원을 3차적 사고의 교단 강원으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이 학인 교수 정원제인 것입니다. 전통적인 교육 방식도 살리고 가장 대중적인 승가의 이념에 충실하면서 또한 승가교육의 주체자로서 수혜자로서 기능을 부여 하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1차적 또는 2차적 사고에 국집하여 문중 강원으로 남겨 놓자는 것은 이제까지 문중 강원교육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1차적 사고의 확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의제衣制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미승이 예비승인 것은 사미 본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구승과 사미승의 복장을 구별하자는 것인데도 ‘나는 기분 나빠서 싫다’라고 하는 것은 1차적 개인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다른 강원은 다해도 우리 강원은 못 한다’고 하는 것은 2차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학인 이동 질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중 강원에 이익이 된다는 2차적 사고로 무분별하게 이를 수용해 온 것이 그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3차적 사고로 기존 문중 강원을 교단 강원으로의 체질을 개선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30명(한 반에 7명 수준)의 하한 정원제와 교수 5명 이상은 이상론이 아니라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최소한의 필수적 요건입니다. 따라서 기존 문중 강원의 교단강원에로의 이행을 모든 대중이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종립강원宗立講院과 비구고시比丘考試
백 번 현실을 인정하고서 교육이 필요 없는 수승한 독각승과 문중 강원을 존립시킬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비구고시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곧 비구고시를 통하여 비구계를 주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0명을 채우기는 어렵고 더더욱 문을 닫을 수도 없는 문중 강원은 교육원 인가 및 지원과 상관없이 초연하게 그대로 기존의 스타일 대로 운영하면서 비구고시만 따로 준비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대신 일정한 조건을 갖춘 교단 강원 졸업자들은 비구고시를 면제해 주는 혜택을 부여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교단의 모범적 종립 강원 설립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기존 강원의 수리修理보다는 새 강원의 신설新設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종립 강원을 아예 새로 만들어 기존 강원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최소화하는 방안도 아울러 검토해 주시기를 여러 어른스님께 부탁드립니다.
마무리를 지으면서 개인적 사고의 방향과 문중적 사고의 방향 그리고 교단적 사고 방향이 일치한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단일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사고와 문중적 사고가 불일치할 때는 문중적 사고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사고와 교단적 사고가 불일치 할 때 역시 교단적 사고가 우선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육문제에는 교육 이외의 논리가 끼여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육문제는 교육 논리로 풀어야 합니다. 교육 논리는 교직자의 교육 논리가 우선되어야지 종무소의 살림 논리가 우선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앙종회 교육분과위원 스님들게서도 자기가 속한 본사의 문중적 2차적 사고로 문제에 접근하지 마시고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3차적 사고로 이 문제에 접근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교육원 총무원 소임자들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