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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넓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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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을 일구는 이야기 - 이영일 1995년 01월 155호
왕조 시대에는 정신적 가치에만 지나친 비중을 두어 물질에 대해 소홀히 하였다. 하지만 현대는 빠르고 편리한 서 구 과학 문명이 정신세계를 압도해 물질적 가치가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정신의 빈곤을 무엇으로 메꾸어야 하며, 물질과 정신의 조화와 신행 생활은 어떠한 자세로 해야 할까. 이영일님의 글에서 명쾌한 답을 기대해 본다.


얼마전 텔레비전에 희귀한 프로그림이 방영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영국에서 만든 특별기획 프로그램으로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어린이를 소개하였다. 가슴까지는 두 사람인데 그 밑으로는 한 사람이니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나 하고 텔레비전을 본 사람 마다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부모는 그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고 고민 끝에 전문의에게 분리 수술을 맡겼으나 안타깝게도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두 사람이 세세생생에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차라리 한 몸이 되도록 지극한 원을 세웠던 모양이다.

원력, 곧 끊임없이 깊게 맹세하는 힘은 불가사의 한 결과를 낳기도 하니까.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다분히 이기적이다. 그 누구의 이익도 나보다 앞서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나보다 잘났다고 수긍하기 어려운게 사람의 기본적 생리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 , 나의 자존심이 우리의 그것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 선택은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커질 때는 삼천대천 세계를 덮고도 남음이 있지만 작아질 때는 겨자 씨나 바늘귀보다도 작다.

선사들의 마음 법문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재주꾼이고 동시에 변덕쟁이이다. 소설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상 온갖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길거리에 어린 자식과 함께 나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숨어 있던 자비심이 뭉클 솟구치면서 보살이 되다가도 텔레비전 앞에서는 채널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솥밥을 먹는 가족끼리 아옹다옹 다투는 아수라로 돌변하기도 한다.
사람이 교육을 받고 종교를 갖는 것도 따지고 보면 큰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함이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남을 나 자신처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종교의 이념인 것이다. 그러나 교육 열기가 이토록 뜨겁고 종교 인구가 날로 늘어가지만 우리네 삶은 왜 이다지 날로 삭막해져만 가는 것일까. 배웠다는 사림들도 교통 질서를 예사로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싸우고 남을 미워하는 수준이 비종교인들의 힐난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눈앞의 자기 이익과 자존심 앞에 “더불어 사는 넓은 마음”은 십만팔천리나 멀어져 버렸다. “나”는 좀 더 풍요로워졌지만 “우리”는 모두 피폐해졌다. 종교는 번창한 반면 종교심은 희박하기만 하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자기 생각만을 앞세우는 뜻이 아니다. 바른 마음, 큰 마음이 바른 세상과 큰 세상을 만드는 뜻일 것이다. 흔히 우리 나라 사람들 만큼 “우리”라는 말을 좋아하는 민족이 없다고들 한다. 심지어 자기 아내를 가리키면서도 “우리 마누라”라는 공동 소유 개념의 어휘를 사용할 정도이다.
“우리”는 곧 “하나” 라는 의식이 만들어 낸 단어이다. 가족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의 “하나” 의식은 한 개인으로부터 한 가족으로 확대되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뭉쳐 “두레”를 형성하는 것도 이것의 소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넓이가 산업 경쟁 사회가 되고 핵가족화되면서 오히려 차츰 좁아지고 있다.
이것은 세상 탓인가 사람 탓인가. 뭇 동물들도 자기 가족, 친지는 챙길 줄 안다.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치부하기에 앞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어야겠다.
부부가 “하나”라는 의식이 약하면 자존심 대결로 치달아 싸우기 일쑤이다. 노사가 “하나” 임을 망각할 때 회사는 망하고 사원들은 실업자가 되고 만다. 크고 작은 어느 집단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하나요. 불교와 기독교도 하나며 , 남과 북도 하나이다. 하나의 색깔이 되어야만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보파와 보수파가 서로 가는 길이 다른 듯해도 결국 하나이며 김제법 씨와 이실상 씨라는 생면 부지의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도 하나이다. 산과 바다도 하나이며 , 사람과 자연도 하나이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은 그 일곱 가지의 색깔이 저마다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