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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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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이정 1994년 05월 147호
호치민시 후엔가에 올림픽식당이 있다. 호의호식(?)하는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서울의 후미진 뒷골목 같은 음습한 기운이 서려 있는 이 식당은 한국인 김병하씨가 운영한다.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주월한국군 사령부의 통역관을 지냈으며, 지금은 라이따이한 이라고 불리는 한국인 2세의 교육에도 깊이 관계하고 있다. 이 식당에는 네 명의 라이따이한이 일한다. 그들은 모두 시커멓게 타고 깡마른 작은 체구로 시골의 선머슴 같은 인상이다. 그 가운데에 김영수 군(25)은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필자 일행에게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저희 아버지는 김정이 씹니다. 소령으로 백마부대 30연대 군의관을 지냈습니다. 아버지를 찾고 싶어요.”
그는 호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다니던 가족사진을 꺼내 보인다. 누렇게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있는, 매우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머니 와 날 찾지 않아요.”
김영수 군은 다낭에서 자랐다. 적군의 혼혈아라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인 박해와 동네 친구들의 홀대가 심했다. 다낭에는 아직도 어머니가 살고 있고, 자신은 혹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히는 기대로 호치민시에 왔다고 한다. 영수라는 이름은 이 때 김병하씨가 지어 준 이름이다. 그는 김병하 씨의 도움으로 기술을 배우고 한국말도 배웠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게(?) 외국 기업인 한국 식당에 취업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발전적 변모가 크게 기쁘지 않다. 아직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으며, 그 방법조차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까마득히 먼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베트남에 한국인 2세는 모두 오백삼십 명이다. 김병하씨 와 정주섭 씨처럼 호치민시에서 한국인 2세 교육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베트남전역에 공고하여 파악한 숫자이다.”오만 명이니 삼만 명이니 하는 얘기가 한국 신문에 실리고 있지만. 사실은 잘못된 보도입니다.”
김병하 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기술 교육을 시켜 주고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여러 해 동안 홍보해도 라이따이 한으로 등록된 숫자가 이만큼 밖에 안 됨은 이 숫자보다 크게 많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란다. 일반 베트남 청년들도 외국 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안달하는 실정인데, 라이따이 한이 이런 특혜를 무시하고 숨어 살 입장이 아니라 는 것이다. 라이따이한이 지금 가장 어릴 경우가 스무 살, 나이가 많을 경우가 스물일곱, 여돏 살이고 그 가운데에 여자들은 대부분 출가했다. 또한 전쟁 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한국과 베트남사이에 교류가 두절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2세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대부분 2세가 라이따이한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러므로 라이따이한은 많아야 이천 명쯤으로 추산된다.
그동안베트남 사회는 라이따이한을 철저히 냉대해 왔다. 적군의 협력자와 적군 사이에서 태어난 그들은 비운의 삶을 고스란히 견뎌 내야 했다. 어머니가 반동분자로 몰려 식량배급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고, 일은 많이 해야했기 때문에 대체로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어머니가 재혼해서 가난의 고리를 끊을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어머니의 과거를 충분히 숨길 수 있는 농촌이나 밀림 깊숙이 들어가 새살림을 차려야 했기 때문에 이 역시 가난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라이따이한의 최고 학력은 고졸이다. 출신 성분이 나빠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설령 갈 수 있다고 해도 갈 필요가 없었다. 라이따이한은 공무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 사회에서는 하찮은 가게 점원도 공무원이다. 모든 재산이 국가 소유이므로 국가의 통제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라이따이한은 육체를 이용하는 부지런한 노동자가 되든지 빈둥빈둥 노는 일만이 주어지는 게 숙명이었다. 자신이 라이따이한 임을 끊임없이
저주하며 살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림들이 베트남에 다시 나타나고, 라이따이한들을 돕겠다고 찾아 나섰다.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격이었다. 이렇게 하여 등록된 숫자 오백삼십 명, 그 밖의 라이따이한들은 일찌감치 라이따이한으로서의 고통을 마감하고 다른 살길을 찾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라이따이한이라고 구태여 밝힐 필요가 없다.
김병하씨 와 정주섭 씨는 기술 학교를 세워 라이따이한을 교육시키고 있는데. 한국의 기독교 감리교단어 후원하고 있다. 학과는 한국어를 비롯하여 영어, 컴퓨터, 전자, 금속가공, 재봉, 목공예 등 일곱 개 과이다. 학생들에게 월 십만 동(미화로는 십 달러)의 가사 보초비를 지급하고 모두기숙사에서 생활한다. 공무원의 평균 임금이 이십만동 수준이니까, 십 만 동의 기사보조비는 적지 않은 수준의 돈이다.
“요즘 문제가 생겼어요.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면 취직은 안 하고. 보조비 지급에 현혹되어 학과를 바꾸어 또 공부하려고 들어요. 의타심 늘어나 큰일입니다.” 김병하 씨의 전언이다. 현재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은 삼백 명, 이미 이백 명이 졸업하여 한국계 회사에 취업했다. 김병하씨도 올림픽식당에 네 명을 비롯하여 모두 아홉 명을 고용하고 있다. 한국계 기업에서는 같은 피를 나눈 동족으로서 라이따이한을 선호하며, 라이따이한 역시 베트남내 다른 회사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주는 한국계 회사를 좋아한다. 한국의 기업 진출이 크게 늘고, 그 규모도 확대일로에 있는 까닭에 등록된 라이따이한의 안전 고용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라이띠어한은 이제 과거의 어둡고 배고팠던 기억을 차츰 잊어 가고 있다. 오히려 라이따이힌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살만큼 세상이 변했다.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더 많이 받으려는 새로운 풍조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기술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가운데에는 라이따이한이 아닌 경우도 많다. 베트남 사람 들이 한국 기업에 진출하려고 슬그머니 끼어든 것이다. 라이따이한의 최저 나이가 스무 살임을 감안하면, 필자가 보기에도 분명히 한국계가 아닌 어린 학생들이 꽤 많이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필자의 물음에 “나는 한국인” 이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그만큼 한국을 선망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라이띠이한은 지금 아버지를 만나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베트남 내 가족을 찾은 한국인은 백 명 가운데에 다섯, 여섯 명꼴이란다. 어떤 이는 베트남에 왔다가도 가족을 찾지 않는 비정함을 보여 준단다. 라이따이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산가족의 재회를 극복하느냐가 그 관건이다. 김영수군만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를 한국에서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회 뒤에 일어 날 새로운 문제들을 최소화하는 연구를 서둘러야 할 때
이다.
우리 불교계가 라이따이한을 위해 한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국민의 팔십 퍼센트가 불교 신자인사실상 불교 국가 에 기독교가 휴머니즘을 앞세워 라이따이한을 돌보고 한 발 앞서 포교해 가는 현실을 불교인들은 아직도 구경만 하고 있다. 좀 어려운 일이지만 한국내 아버지 찾아 주기 운동이 응당 불교계가 벌여야 할 과제라고 필자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