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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사태와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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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영일 1994년 05월 147호
기자와 기사에 대한 이해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전국 기자들의 의식을 조사한 빼 따르면 이른바 문민시대 기자 사회 현안으로 불공정 보도에 대한 묵시적 동조 69.3퍼센트, 오보와 부정확한 보도 69.8퍼센트 자질과 전문성 부족 66.2퍼센트가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기자자신들에 의해 지적되었음은 아직도 언론이 부실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독자들은 기자사회의 매커니즘을 조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일간신문기자들은 날마다 마감시간과 싸워야 한다. 취재와 기사 작성이 그날그날 시간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하는 부담은 곧 오보나 부정확한 보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심층 취재를 요하는 사인이 시간이 긴박한 가운데 전개될 경우 그 개연성은 한층 높아진다. 둘째, 기자들은 결코 만물박사가 아니다. 한마디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요즘 언론계 일부에서 전문기자 제도가 실험적 단계에 있긴 하나 지금까지는 기자가 전공에 관계 없이 취재 활동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셋째, 기자들의 뜻에 더러는 왜곡 될 수도 있다. 기자들이 기사를 취합하거나 출고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데스크나 심할 경우 경영진의 의지가 기자의 뜻에 반하여 기사에 반영되는 사례도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이다. 불공정 보도에 대한 묵시적 동조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기사 작성과 편집, 교열 등의 분업화된 제작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기사가 잘리거나 기사 내용과 걸맞지 않는 제목이 달릴 경우가 생길 수 있으며 취재 기자의 표현 양식이 굴절될 여지도 적지 않다.
이 같은 기자사회의 현안은 이번 조계종 사태에 대한 보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면 이번 조계종 사태에 대해 언론 보도들이 보여 준 현황을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매체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한다. 보도의 가치 중립과 정론 이번 조계종 사태에 대한 언론외 보도는 대체로 눈치를 보거나 갈팡질팡하는 논조를 보였으며 그러한 태도는 김대통령이 귀국한 뒤 “폭력 엄단”지시가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도 가치의 측정에서도 이른바 중립과 정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총무원에 대한 범승가종단개혁 추진회(汎宗推)의 3임반대 운동이 3임 강행과 사퇴 거부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불교도와 서의현 전원장 및 그 일부측근들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접어들 때까지도 많은 언론들은 거의 같은 비중
으로 양측을 다루었다. 4월 5일부터 출처가 불분명한 서원장 사퇴설이 나돌아 다투어 보도되었으나 이튿날 총무원 측의 사퇴 불가만 확인해 오보가 된 셈이다. 승려대회 뒤 서전원장 연행 기사도 결과적으로 추측기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태 발생 초기에 공권력과 폭력배 개입 부문은 소홀히 다루고 승려들의 충돌 부분만 부각시켜 이번 사태가 개혁 과정의 진통이기보다는 종권 쟁탈이나 폭력승들간의 무협 대결로 독자들에게 비쳐지도 록했다. 특히 「ㅅ신문」은 4월 7일자 사설을 통해 “잿밥 싸움 악습은 청산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개혁회의 출범 뒤에는”최내무 퇴진 등을 끝내 고집한다면 정보 기관의 종단 내분 공작을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위협의 전위에 나서는 뻔뻔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예전의 종단 사태 때마다 정보기관이 개입해 왔음올 적어도 「ㅅ신문」은 알고 있었다는 일종의 양심 선언으로 풀어할 수도 있다.「ㅈ일보」와 또 다른 「ㅈ일보」도 8일자부터 11일자 사이에서 “완전분열””종권 싸움 증폭” 등으로 묘사하여 노도와 같은 개혁 열기를 종단 분규 부각으로 희석시키려 하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이는 예전의 경우로 미루어 우루과이 라운드 등에 직면한 정부의 난처한 입지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려는 노파심에 기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ㅁ일보」경우는 논설실장이라는 사람이 사태의 정황이나 기사 논조와 동떨어진 논설을 썼다가 뒤에 사과 아닌 변명만 늘어 놓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뒤에 「ㅎ신문」등 일부신문이 불교계의 사태 발단과 개혁 열기 그리고 폭력배와 공권력의 비호 의혹 등을 끈질기게 추적하자 다른 신문들도 부랴부랴 뒤쫓아 온 느낌이다. 이번 사태에서 「ㅎ신문」의 일관된 정론의지는 수많은 불교인들의 구독의욕에 불을 지를 만큼 매우 돋보였다. 특히 만화 「가공할 법력」 시리즈는 그야말로 만화의 법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울러 이 신문의 “조계종 묵은 때 긴급점검” 시리즈와 「ㅅ일보」의 “한국불교종교개혁 특집”은 종단 분규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천착해 들어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한국기자협회 강령 첫번째에 “우리는 조국의 민주발전과 언론인의 자질 향상을 위해 힘쓴다”고 적혀 있다. 언론이 사회의 목탁이고 소금인 것은 눈치 보도나 무책임한 가치 중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려는 정론의지에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기자들의 예단과 전문성 부족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은 역시 기자들의 예단과 전문성 문제였다. 기지들이 전문 지식이 취약한 데다 취재원 마다 말이 틀리고 정보에 대한 비중이나 신뢰성을 판단하기 어려워 오히려 섣부른 예단 기사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승려대회 참가 인원이 전체 승려 숫자의 과반수를 넘어야 하지 않냐는 따위의 억지가 자연스럽게지 않냐는 따위의 억지가 자연스럽게 기사에 인용되고, 서원장 사퇴 발표 이후에는 마치 모든 사태가 끝난 듯 때 이르게도 차기 총무원장에 대한 기사 등 개혁을 지향하는 불교계 정서에 걸맞지 않는 기사감을 선택함으로써 종단의 실질적 개혁 작업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게다가 많은 기자들은 법난이나 불교관계법 등 불교 역사나 종단 구조 등에 대해 지나치게 어두워 기사를 발로 쓰기는 커녕 귀로 쓰기에도 바쁘기만 했다. 여기서 불교계 언론이 단단히 한몫을 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간 종단 기관지 「불교신문」은 종단 사태 때마다 그렇듯이 사태 중 발행이 완전 중단되었고, 재야신문인 「법보신문」은 발행인이 사태에 관련되어 발행이 중단 되었지만 기자들끼리 「편집국 뉴스」를 발행해 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일조를 했고, 일반 일간지 기자에게 불교개혁의 당위성과 종헌종법, 문중 인맥 등 문종의 전문지식 전수에까지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해동불교」와 「주간불교」도 이번이 종단개혁의 호기임을 강조했고 「승가대학신문」도 뛰어난 순발력을 과시하여 선도적 역할을 했다. 처음에 서 전원장을 두둔하다가 승려대회를 앞두고 개혁 세력에 동조한 「불교방송」도 뒤늦게 나마 재가 불자들의 호응을 받아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자들의 예단과 전문성 부족현상은 데스크나 논설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싸움을 그쳐라, “염불엔 마음이 없고” 따위로 안이하게 논조를 이끄는가 하면 심한 경우 일선 취재 기자의 기사조차 읽지 않은 채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자신의 관념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기자의 전문화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를 이번 조계종 사태가 웅변해 준 셈이다.

아무개 승려라는 표현의 등장
이번 사태에 임하는 언론 보도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으로 스님과 승려 두 가지 표현의 혼용이 있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두어 군데 신문에서 다룬적이 있어 자세한 출처는 생략하겠지만 승려 아무개씨라면 차라리 모르겠지만 이무개 승려라는 표현은 이무개 사람처럼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사실 승려라 함은 반드시 불교의 성직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독교계나 회교계 등 모든 종교의 성직자를 뭉뚱그려 나타낸 표현일 뿐이다. 님” 이 들어갔으니 존칭이고 그 존칭을 이교도에게 붙일 수 없다는 타종교 언론인이나 독자들의 정서와 특정 종교의 승려나 저질 승려를 스님이라 호칭해서 되겠냐는 일부 언론인의 정서가 이 같은 현상을 일으킨 요인으로 보인다.
신문에서 살펴보면 「ㅎ신문」 과 「ㄱ신문」이 제목과 기사에서 모두 ‘스님’으로 일관한 반면 「ㅈ일보」, 「ㄷ일보」,「ㅈ일보」, 「ㅎ일보」는 제목이나 사진 설명에선 승려, 기사 내용에서는 스님이라고 표현했다. 「ㅈ일보」의 경우는 종교를 달리하는 성격이 명료한 탓인지 제목이나 기사에 관계없이 원로 스님을 비롯한 누구에게나 시종일관 아무개 승려”를 고집했다. 그러나 역시 특정 종교가 발행하는 「ㅅ일보」 는 오히려 다른 신문들보다 유연성을 갖고 표현에 임하는 자세를 보였다.
‘하나님” 은 하나 의 존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고유명사이다. ‘스님”이라 불러서 손해 보는 듯한 심리가 바로 독선과 편협에 빠져 있는 종교인과 언론인의 ‘탈 벗긴 얼굴’ 에 다름 아니다.

언론의 사명의식 아쉬워
이번 조계종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보도지침’ 시절의 관습이 아직도 언론계에 남아 있음을 엿보게 했다. 양 비론적 기회주의에 젖은 눈치 논조, 수박 겉 핥기식의 무지한 보도는 언론을 목탁이기 전에 또 하나의 폭력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 ‘기자’는 결코 ‘기는 자‘여서는 안 된다. 또 ’속이는 자‘ 여서도 안 된다. 권력 앞에 당당하지 못하고 무지함에 겸손할 줄 모르는 언론은 이미 목탁이 아니다. 고위층보다는 국가를, 작은 독선보다는 큰 포용력을 먼저 생각할 줄아는 언론만이 민족의 미래에 책임을 지는 제4부의 자격을 지닌다.
정부도 정권 유지 차원에서만 문제를 풀어 왔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어떤 단체, 어떤 개인의 후퇴도 그것은 나라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나라 안 모든 구석의 개혁을 정부와 언론이 외호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는 절간에서 폭력배가 날뛰거나 공권력이 제멋대로 편들기를 삼가토록 해야 한다. 불교 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불교는 이 땅에서 단순한 하나의 종교이기 이전에 민족자주의 보루이고 국익의 파수꾼이며 문명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정치계와 종교계 못지 않게 오늘의 언론계는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수준을 규정짓는 바로미터이다. 이회창 전 총리가 마지막 던진 말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국가는 어려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