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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사태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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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담 1994년 05월 147호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번 조계종 개혁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성격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듯하다. 마치 광주민중항쟁에 대하여 많은 논란과 시각차이가 있던 것과 같다. 이번 조계종 사태는 발단과 과정 그리고 일단락의 양상이 너무나 급격하고 예측할 수 없던 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와서 사태의 추이를 따라잡는 데나 성격을 올바로 바라보는데 많은 혼란과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필자는 그 동안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사태 의 초기 과정부터 결말까지 일련의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그 성격을 살펴 보고자 한다.
지난3월 23일 안암동 중앙숭가대학에서 지난해 10월 경부터 준비하여 온「범숭가종단개혁추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선우도량, 전국승가대학연합 등 여넓개 단체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종단 개혁과 바람직한 발전 방향에 대한 연구와 논리 정립 그리고 개혁운동의 실천을 위한 중장기의 프로그램을 갖고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용에 대한 준비에 주력하였다. 지금은 이미 역사성을 갖게 된 ‘범종추’ 는 그러한 프로그램에 입각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구조를 갖추기도 전에 급속한 행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바로 서의현체제의 비정상적 삼선 연임 기도에 있었다. 임기를 무려 다섯 달 이상이나 남겨 둔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돌출된 사태를 맞아 범종추 준비 모임은 곧바로 기동 체제를 갖추고 3월 23일 발족하여 3월 26일 종단 개혁과 상무대 비리 진상 규명을 위한 구종법회를 조직하였다. 3월 26일 탑골공원에서 사백 명쯤 대중이 참석하여 조계사까지 행진하고 바로 법회 발대식을 가졌다. 세 명의 공동대표와 일반 회원 아홉 명을 비롯하여 대표단이 조계사 덕왕전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토론의 밤을 조계사 대웅전에서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통도사, 법주사, 청암사 등 지방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을 비롯하여 육백여 명의 대중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조계사 경내 문화관 선방과 초향 가든식당, 산중다원 등에서 걸망을 풀어놓고 30일에 열리는 원장 선출을 위한 종회 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28일 토론회를 마치고 호법부 등의 편제를 갖추고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중앙승가대학 학인들은 학사 일정 전면 중지 등을 결의하고 강력한 투쟁 조직을 준비하였고, 재가자들은 전 불련과 대불련 둥을 중심으로 스님들과 연대하여 기동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실천 불교승가회는 사무실을 옮긴지 십여 일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철야 상태로 들어갔다. 29일 밤에는 스무명쯤의 대중이 승가회에 있었는데, 새벽 다섯 시쯤 급보가 왔다. 폭력배 삼백여 명이 구종법회에 난입할 것이라는 제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그럴 리가 없을텐데 허는 생각으로 눈을 한숨 더 붙이고 싶은 피로감이 들었다.
방마다 비상이 걸리고 급히 조계사로 가자는 소리가 긴장감을 더하였다. 각 언론사에 급전을 보내고 다섯 시 삼십분쯤 도착하니 총무원 청사 앞에는 호법부 철야 대기조 서른 명이 다라니 독경을 계속하고 있었다. 장작불을 피우고 북을 두드리며 빠른 다라니 독경 속에 “서의현 삼선 저지와 상무대 비리 진상 규명, 그리고 종단의 전면적 대개혁과 불교 자주화 실현”의 발원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섯 시가지나 동이 훤히 트도록 폭력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총무원 청사 앞에는 이미 숙소에서 달려온 스님들 둥 백여 명이 모여 들고
있었고, 호법 기도조는 더욱 힘차게 다라니 기도를 하고 있었다. KBS, MBC 카메라는 오보로 생각했는지 이미 철수하였고 우리가 준비한 비디오 카메라- 여기에 담긴 영상은 엄청난 역사적 증거물에 되었다-만이 대기하고 있었다. 조계사 법당 서쪽에 있는 청사에는 종로서 정보과 과장과 계장등 네 명의 형사들이 대기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탈문 밖 연합통신 주차장에는 전경차 세 대가 대기하며 있었고 안국동 로타리에는 열 대 이상의 전경 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섯 시 이십 분이 조금 지나자 총무원 삼층 사층에서 규정 부 승려들이 나타나더니 소방 호수로 물대포를 쏘아대는 것을 신호로 밝혀진 대로 규정부 무성과 고중록의 지휘 아래 이백여 명 가량의 깡패들이 난입하기 시작하였다. 독경하던 다라니 소리는 순간 찢어지는 비명과 신음소리로 변하였고, 주변에 모여 있던 승가대학학인들과 범종추 스님들은 청사쪽 문을 중심으로 온몸으로 대항하는 스님들과 합류하여 깡패들과 몸으로 맞서고, 비구니 스님들을 중심으로는 서의현 타도 구호를 외쳤다. 이 상황이 삼십 분 가량 이어졌는데 조계사 경내 종로서 경찰은 스님들의 절박한 구호 요청과 항의를 철저히 묵살하고 오히려 조소로 일관하였다. 삼십 분 가량의 격전 끝에 깡패들을 몰아내는 동안 범종추 스님들은 온통 물벽락을 맞았고 동대 석림회, 중앙승가대 학인 등 서른 명 가량의 중경상자
가 발생하였다. 이로부터 이제까지 진지하고 간절하던 분위기는 일변하여 서의현 집단의 폭력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공권력의 방조와 비호에 대한 분노와 폭력 깡패들을 물리쳤다는 승리감이 팽배하였다. 준비된 세미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대정부 성토와 규탄, 총무원 집행부 타도를 위한 총궐기의 투쟁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했던 해인사 승가대학 등 지방 학인들과 산발적이지만 선방의 수좌들이 속속 참여하였고 정우와 영담스님 등 종회의원의 양심선언과 기자회견이 있었다. 재가불자 교수 둥 서른일곱 명의 기자회견이 이어졌고 서의현이 동원한 일부 승려와의 세 차례 이상의 공방이 하루 내내 조계사 경내에서 벌어졌고 사태는 급기야 전 언론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다루어졌다. 투쟁은 이미 가열되
어 총무원 청사에 남아 있는 집행부를 힘으로라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한결 같은 생각이었다. 범종추 지도부는 오후다섯 시 삼십 분쯤 청사 접수를 결정하였고 즉각 실행에 옮겼다. 이후 호법부를 중심으로 한 학인들의 맹렬한 접수투쟁이 있었다. 이층, 삼층을 노도 와 같이 밀고 들어간 선봉조는 철문으로 철통같이 막아 놓은 정문을 열고 오후다섯 시 사분 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이백여 명 이상의 대중들을 일층 불교회관으로 맞아들였다.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쯤 공권력은 구 총무원 집행부와 결탁하여 조계사 삼면을 침략하듯이 밀고 들어와 조계사 경내를 가득 메우고 청사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밖에서 농성 법회를 계속하던 대중들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경찰들의 난입에 대하여 일면 불안과 공포심에 떨리기도 하고, 일면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대한 격렬하게 저항하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몸으로 맞섰지만 물리력에 밀릴 수 밖에 없었고 대오는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청사에 선발대로 진입한 대중들은 삼층에서 철문, 철창, 철봉으로 막아 놓은 장벽 앞에 더 이상 사, 오층 구 집행부 저항세력들을 내몰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와중에 해인지 편집장 도각스님은 오층에서 던진 벽돌에 맞아 의식불명의 상태로 부상당하였고 그밖에도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회관 일층에 진입한 지도부 등 이백여 스님들은 현관 앞에서 완강하게 맞서서 지키는 이백여스님과 재가 불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오를 정비하고 종단개혁안 초안을 중심으로 토론회를 조직하는 여유를 가질수 있었다. 청사에 진입한 호법부 소속 스님들과 지도부 등 대중들, 현관 앞의 이백여 투쟁 대중들은 청사 마당을 장악한 전경들에 의해서 격리되었고 나머지 대중들은 조계사 법당 안, 밖, 축대위 등으로 산개하여 “폭력 경찰 물러가라”, “서의현을 타도하자”, “최형우는 자폭하라”, “김영삼은 퇴진하라” 등의 구호와 기도로써 투쟁하였다. 간병조, 보급조, 홍보조 둥을 비상 가동하였고 재가 외호조 또한 눈코 뜰새 없는 활동에 들어갔다. 저녁 여덟 시쯤에는 청사에 백골단들이 난입하기 시작하여 이삼층 스님들 오십여 명 이상올 무자비하게 폭행하여 끌어냈고 사무실 집기 유리창 등을 파괴하고 불교신문사, 카메라, 컴퓨터 등 기물들을 닥치는대로 훔쳐가고 훼손했었다. 피해 규모는 아
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엄청나다. 사무실 집기와 기물 파괴는 경찰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사진 등 증거 자료가 너무나 많다. 청사 안과 밖에서는 토론회와 항의 집회가 계속되었고, 이윽고 30일 영 시 이십 분쯤 청사 앞 등에서 투쟁하던 대중들은 끌
려가기 시작하였고 청사에 있던 나머지 백여 명의 지도부와 대중들은 30일 경 서울 시내 열여넓 개 경찰서에 분산 격리되었다. 30일 종회는 열 시에 그들의 예정대로 폐허나 전쟁터 같은 청사에서 열어 오십아홉 명의 종회의원이 참석하여 거수로 선출하였다. 조계사 안팎에
서는 경찰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지나가던 스님들까지 잡아들이고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에서는 스님들 사백칠십여섯 명이 격리 분산된 상태에서 ‘계엄종회” 가 열리고, 정부권력은 서의현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이후 4월 6일 공권력 규탄대회와 4.10 승려대회-이 승려대회 진행 상황과 법난 과정은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략 알고 있으리라 보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를 거쳐, 4월 13일 3.29,4.10 법난 규탄과 종단 개혁 범 불교도대회, 4월 15일 개혁회의 출범과 4월18일 원로회의 인준 등의 과정은 1600년 한국불교사 속에서 유례없는 파동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발단과 과정은 더 많은 지연과 고증, 검증,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모든 언론이 약 이십여
일에 걸쳐 매달리다시피 하여 국민들의 눈과 귀가 모아졌던 것만으로 보아서도 이는 단순한 친서체제와 반서 체제의 쟁투이거나 종권을 둘러싼 양상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단순한 의미에서의 수구 보수와 진보 세력간의 이념대립의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분명 한국 불교의 사회적 국민적, 위치가 다시금 확인된 바라 할 수 있겠고, 불교종단의 단순한 제도나 구조변화만이 아닌 불교집단의 전면적 쇄신과 체질 개선이 요구되는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