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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문제연구원 만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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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4년 05월 147호
봄볕으로 녹녹해진 대지에 하늬바람 배시시 기지개 켜면 연두빛 녹음이 온통 코끝까지
묻어날 듯하다. 이미 만개의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성장의 물뿌리를 힘차게 뻗어 내는 백목련은 푸른잎새들을 서로 조아리며 한 뼘만한 그늘을 얽어 놓고 있다.
봄은 여민 옷깃을 풀며 새로운 무언가를 내 줄 것 같은 몸짓을 한다. 내내 잊혀지고 무더져 버린 대지에 설레임이 가득히 차오르는 것이리라. 인연 맺은 모든 것을 흙으로 묻어 버리고 그들의 정연한이치로 사위어 갈 때 우리는 습관처럼 허무해지고 스산한 미음에 허둥댄다. 하지만 새롭게 단장하는 이맘때가 되면 새롭게 호흡한다. 작아진 어깨가 파랗게 높아가는 하늘로 쑥쑥 커 간다. 집착하고 연연해 하는 우리네 습이 깊은 탓에 어쩌면 그들의 윤회하는 이치가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올 봄기운이 강했던 탓인지 아니면 그 또한 순리였는지 우리 도량에 개혁의 물결이 굽어굽어 여울지기 시작했다. 순리를 분별하는 자체가 우리 세간삶의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이기에 자연의 지혜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손쉬운 나름의 순리를 열심히 쫓는 이들에게 침묵을 종용당해 온 불교내부의 들썩임이 결코 한순간에 배태되고 분출된 것은 아니리라. 자업자득, 자승자박 등의 어눌한 단어들이 새삼스레 가슴에 박혀 숨결 하나까지도 새롭게 단장하는 이즈음에 눈빛 한번 반짝이지도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이기에 봄날의 싱그러움처럼 우리 불교도 새롭게 불법의 기치를 다지게될 것을 믿는다. 지금의 어 새로움도 세월의 세파에 마모되면 또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서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변화하는 상황을 경계하기보다는 불교인으로서의 오롯한 입지를 튼실히 함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1600년 불교 역사를 자랑스레 말하면서도 세상사에는 너무 무관심합니다. 그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온 민족종교인 불교를 “우리 불교만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현스님의 말씀이다.
불교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각인 시키는 지적이다. 종교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은 피폐해지는 현실 속에서 반드시 부여잡아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 저마다 사는곳이 달라도 자신의 자리를 철저하게 책임지고 살아가는 이가 참으로 소중한 때이기에. 남현스님은 지금 ‘한일문제 연구원”으로 명칭이 바뀐 ‘일제 36년 연구소’ 의 소장으로 계신다. 선릉역 근처에 있는 사무실은 스님의 모습만큼이나 정갈하기 그지없다. 벽을 끼고 뱅그르 둘러친 책장에는 파일이 빽빽하게 꽃혀 있다. 스님이 일본 현지를 답사하면서 채록한 것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일제시대에 우리 인구가 이천만 명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칠백만이 강제 징용되었습니다. 결국 노약자와 어린이를 빼고 나면 삼분의 이가 강제징용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 일본에 방치된 유골은 삼십만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번호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335, 214 이렇게요. 광복 오십 년을 한 해 앞두고 있는 오늘까지도 그토록 한스러운 땅에서 넋을 달래고 있는 것이죠. 새로운 한 세기를 맞아하기 전에 우리 민족의 상처는 하루 빨리 치유되어야 합니다.” 체험으로 얻어진 것이든, 후손으로서 어쩔 수 없이 안아들인 것이든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실 남현 스님이 하시는 일은 불교제도권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숙원을 풀어 내는일 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불교계에서보다는 밖에서 더 격려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불교계 안에서도 남현 스님은 또 다른 이유로 유명 (?)하다. 스님은 “월간법회” 지의 창간자로 기억되고 있다. “1981년 조계사에서 포교 활동을 했는데, 당시 운영 방법이나 법회 내용들이 너무 산만하고 체계적이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때 불교교육 개발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절감했지요. 그리고 그 생각이 84년
‘월간법회”라는 책자를 만들게 된 밑바탕이 되었어요. 스님의 특성이나 경향에 따라 법문이
모두 다르게 전달되어 불자님들이 공부하는 데 얼마쯤 혼란스러워 해요.
그래 ‘월간볍회” 라는 책자를 통해 불교 교육의 기초와 체계를 다져서 전국 포교원에서 같은 내용의 교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일원성 획득과 포교의 효과를 증대시키려는 의도였지요?“ ‘월간볍회”에는 한 달에 네 번 있는 법회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불자들을 위해 상세한 설명도 함께 실었다. 정말 불교 공부 하나는 야무지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들 만큼 알차 보였다. 그러나 88년 “월간법회” 는 만 사 년 만에 마지막 호를 내게 되었다.
남현 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당시 교계에서 포교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해 부득이
그리 되었단다. 포교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요즘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남현 스님과 일본의 인연은 이 무렵에 맺어졌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일본 포교원인 ‘고려사’ 가 있었습니다. 무슨 인연인지 그 곳의 포교원인 “한문화연구소‘ 의소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을 만나고 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일제 침략사 문제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저는 놀라운 현실과 맞닥뜨렸습니다.
납골당과 계곡에 한국인 유골들이 그야말로 내팽개쳐져 있다시피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왜 지금까지 그렇게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 이야기도 듣고 사진 수집하는 일로 그 첫걸음을 하였구요.” 수행자로서 민족적인 감정을 운운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인 울분과 분노를 가슴에서 벗어 놓기가 어렵더라는 스님의 말씀이 그대로 사무친다. 모양새나 크기가 바둑통과 흡사한 단지에는 분명 우리와 한 핏줄인 이들의 주검이 담겨 있다. 때로는 번호표를 달고, 때로는 불명이라는 또 다론 이름을 달고 서로 부대끼며 쌓여 있다. 상고머리나 바가지 머리를 하고 뜻없이 살풋 웃음 물고 있는 나이 어린 소녀들의 모습, 열다섯 살도 채 못되어 보이는 동안인데 그들은 어떻게 살다 갔을까. 팬티 차림으로 천장이 납작한 탄광에 들어가 채광하는 이들, 상처로 뼈가 들여다 보이는 등을 검시관에게 보이며 꼿꼿이 서 있는 그들의 두려움과 분노가 스님의 사무실에 커다랗게 스크랩되어 있다.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와 지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 앞에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 몫이지 그들 몫이 아닙니다. 스님은 일본이 은폐하고 있는 태평양전쟁 때의 그들의 만행을 자료화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삼십만의 유골 가운데에서 이미 십육만의 신원을 확보했는데 앞으로도 더 밝혀 낼 계획이라고 한다. 실증자료를 제시하고 일본의 분명한 자기 반성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 동안 몇 번 천황의 사죄가 있었지만 말뿐이었지 실질적으로 얻어 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정신적, 물질적 보장까지도 정당하게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수주의가 얼마나 반민주주의인지를 인식토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입증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야겠지요.” 스님은 이 일의 회향을 불교인 모두가 함께 이루어 냈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씀을 한다. “시작은 제가 했지만 마무리는 우리 민족종교인 불교가 여법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내년이 광복 오십 년이니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어야지요.” 인연이 닿아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상황만 여여해지면 바로 불교계 안으로 들어오시리라 한다. 무엇보다도 “월간법회” 의 연장선인 포교의 일선에서 뜻을 펴고자 한다. 포교에 관한 스님의 의견은 구체적이고 남다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해요. 곧 21 세기가 됩니다. 천 년의 정신문화권이 우리 앞에 도래합니다.
우리 불교는 진정으로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떠한 위상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떠한 사상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이를 충족시켜 줄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각박해지는 앞으로의 세계를 두려움 없이 진실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일상생활부터 더 나아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니 사후까지도
함께 생활하고 좀더 나은 미래를 예시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포교의 영역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스님이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한다. 전국 총림 사찰의 장대한 시설과 공간이 아깝다며 온 국민의 정선 수련 도량으로
개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한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부처님의 넉넉한 도량으로 들어와 생활을 새롭게 다진다면 좋지 않겠어요. 일주문을 활짝 열고 갓 태어난 생명에게 삼귀의를 해 주는 일부터 죽음에 이른 이들의 임종 법문까지 지속적으로 행하여 이를 관행화 한다면 우리 모든 이들의 삶이 얼마나 넉넉 하겠습니까? 스님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라며 웃는다.
“앞으로 포교의 영역은 독립되어야 합니다. 종단에 구속되다 보니 이것저것에 치여 포교는
늘 뒷전입니다. 이번 개혁을 계기로 포교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그래야 종단차원의 문제가 생기고 제도적 변화가 오더라도 포교원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자님 들에게 올바른 불법을 계속전할 수 있지요. 그러고 포교사도법맥이 있어서 뜻 있는 이들이 원력을 갖고 수행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님은, 교시는 포교사가 하고 선시는 방장 스님이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산이 좋아서, 산에서 살고 싶어서 스님이 되었다는 남현스님은
십여 년이 넘도록 이 도심 한복판에 살고 있다.
“종단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어 뜻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불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후배들은 산에 들어가 아무것에도 끄달림 없이 자기 공부만 지어 나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언젠가는 스님도 마음에 꼭 찍어 둔 산사에 자그마한 몸 쉬어 갈 때가 오리라. 5월 중순, 여름으로 들어서는 숨소리가 거칠어질 무렵 스님은 일본으로 떠나실 것이란다. 자료를 확언, 첨가하고 현장 체험을 기사화 하려는 여행이다. 내년에 조성할 평화의 종을 현실로 이루어내려는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한강 고수부지에서 일본까지 온 국민의 하나 된 염원으로 이끌어 올린 평화의 종이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걸림돌을 부식시키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음성으로 울릴 것입니다.
환희심 나는 일 아닙니까“
스님의 표정은 기쁨과 긴장으로 한층 들떠 보인다. 일본에 대한 감정 , 가슴과 이성 사이에서 교차하는 미묘한 찌꺼기를 툴툴 털어 내야 하리라. 그래야 온전한 나로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해 보여 준 것은 한없는 세월 동안 고행을 했기에 가능 할 수 있었고, 중생들이 화택문에서 윤회를 해야
하는 것은 한없는 세월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의 경구이다. 스님은 이번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당연한 인과 아닙니까“ 하며 일축한다. 이토록 찬연히 피어나는 봄날, 발원해 본다. 생과 사, 개화와 낙화의 이치에 담담할줄 알고 그 때를 알아 행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