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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의 선종적 변용 선원 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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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이야기 - 원철 1994년 05월 147호
청정한 규칙
지난 삼월 하순 강원에서 새 식구를 받았다. 어느 해보다 많은 학인 스님들이 공부를 하려고 찾아왔다. 면접 때에 “어떻게 해인총림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은사스님이 보내서 왔다”는 대답을 하는 스님이 뜻밖에 많았다. 곧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승에게 등을 떠밀려서 왔다는 것이다. 은사 스님들이 상좌를 해인사로 보내는 까닭은 아직까지 청규가 서슬 시퍼렇게 살아 있는 도량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 속에서 대중생활을 배우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청규淸規란 청정한 규칙이다. 곧 만들어 놓은 규칙이 능히 대중을 청정케 한다는 뜻이다. 해서 청규가 무너지면 그건 이미 수행 대중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규는 수행 대중을 수행 대중답게 하는 밑바탕이다.

율조의 성립
중국 불교의 초창기에 커다란 활약을 한 불도징佛道澄(232~348)은 그 무렵 산발적 ,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전하는 율장 가운데서 일부를 바로 잡은 바 있다.
그 뒤 제자 도안道安(312~384)이 계율의 정비와 연구에 뜻을 두어 ‘승니규범(僧尼規範)‘ 을 저술하였다. 교단의 엄한 계행 생활을 “스승과 제자가 서로 숙연히 공경하며 한량없이 계율의 규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훌륭한 교단을 본 적이 없습니다.(고승전 권5)“ 는 표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 (334~410)은 율장을 늘 열람하고 확인하면서 생활화하였다. 불도징과 도안 그리고 혜원 법사의 율장 존중에 힘입어 초창기 교단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율장은 십송률 十頌律(설일체유부의율장)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무렵 율장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번역이었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고 난해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승려의 생활규범과 승단의 운영이라고 하는 현실에 대처하려면 율장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는 요청에 따라 5세기 초엽 동진 시대 각 부파의 네 가지 율장을 모두 번역하였다. 혜원 법사가 보급한 십송률은 남북조시대에는 성했으나, 수나라와 당나라시대에는 사분율四分律(법장부의 율장)에 그 자리를 내어 주었다.
북위의 효문제(471~499) 시대에 오대산 법총 法聰이 사분율을 연구하여 사분율종의 기초를 세웠고, 혜광慧光(468~537)이 율종을 더욱 성하게 하였으며. 여기에 힘입어 그 뒤 도선道宣(596~667)의 남산종, 법려 法礪(569~635)의 상부종 相部宗, 회소懷素(624~697)
의 동탑종東塔宗이 성립되어 함께 사분 율종의 보급에 힘썼다. 이 세 종파 가운데 상부종과 동탑종은 사라지고 오직 도선의 남산 율종만이 번성하여 송대까지 이어졌다.
중국 선종의 초기 승려들은 대개가 율원에서 율종 승려들과 함께 지내는 까닭에 계율을 존중하는 율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선종의 규칙인 청규 구성의 기준은 “내가 기본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대소숭의 계율에 국한하지 않고. 또한 대 소승의 계율과 다른 것도
아니다. 마땅히 두루 섭렵하고 절충하여 올바른 규법을 제정하여 수행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백장 선사께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사분율행사초 四分律行事抄‘ 등의 도선 율사의 남산율에 의지한 바가 크며, 도안과 혜원 법사가 제정한 승제 借制, 천태 지
의의 일상 법도와 제도, 위의와 규봉 종밀 宗密(780~841)의 규정 규칙, 각 선사 어록에 나타난 일용사 日用事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 각 사원의 전통적인 관행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청규와 선원의 독립.
중국선종사의 실제적 형성은 마조馬祖(709~788)와 그 제자들에 의한 것으로, 종파적 전통의 확립과 선원의 독립 그리고 어록의 발생이라는 세가지 측면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보림전 寶林傳으로 전동법계傳燈法系.곧, 정통성의 확립, 백장청규 白丈淸規로 선종 독자 율장 완성, 독자경전인 각종어록의 편집이 그것이다. 이상 세 가지의 성립으로 선종이 명실상부하게 확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종이라는 호칭도 스스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법이 전래된 뒤 이백오십 년 동안 선종의 승려들은 율종의 사찰에서 거주하였다. 마조의 제자 백장百文(720~814) 선사가 선승들의 전문 수도 도량인 총림을 창설하고 선숭의 수도 생활에 알맞고 현실적인 청규를 창안하였다. 걸식 생활에서 집단거주생활로 바뀌면서 율장에서 금하는 비구의 노동제도를 신설하고, 각자의 소임을 정하며,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벌칙을 강화한 것이 전통 율장과 조금 다른 중국 선종 총림의 독특한 모습이다. 그러
나 백장 청규는 일찍이 없어져 내용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의 요약으로 보이는”선문규식 禪門規式 이 경덕전등록 권6 백장편의 부록으로 실려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백장이 입적한 뒤 이백오십 년이 지날 무렵 송나라의 자각 종색(1009~1092) 선사는 ‘선원청규 禪苑靑規’를 찬술하여, 침체된 선종을 활성화시키고자 백장청규를 되살리려 하였다. 수계와 같은 계율에 관한 것, 법문에 관한 것, 축원법, 소임자 선임 방법 및 소임 사는 법, 차에 관계되는 예절과 절차, 대장경 열람법, 편지 쓰는 법, 회장실 이용법, 다비법, 어른 예우법, 사미 가르치는 방법 등이다. 그리고 원나라때 덕휘 화상이 1325년에 ‘칙수백장청규 勅修百丈淸規‘ 를 다시 찬술하여 국왕과 국가를 위한 축원과 기도의식,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제사 및 추모의식 그리고 각종의식의 절차, 결제, 해제 기타 명절에 하는 염송의식 순서와 의의, 종鍾 판板등의 법물의 사용방법 등을 보충하였다.


평상심이 도道.
청규의 제정은 수행관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곧 총림에서 노동을 포함한 모든 생활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좌선은 물론 예불, 공양, 울력, 일상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 자체를 소흘히 할 수 없다는 독특한 가풍으로 굳어졌다.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차별 없이 총림을 운영해 가는 데 필요한 직책을 대중들이 각각 고루 나누어 맡아 번갈아 하도록 하였다. 일상 생활에 필표한 물품들은 대중 울력을 통하여 자급자족토록 하여 승가 생활의 정신과 행태를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야말로 마조스님의 ‘평상심이 도”백장스님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마조와 백장스님의 정신은 치문경훈 緇門警訓 으로 재구성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승가에 맞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