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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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만우(시인)
1994년 05월 147호
며칠 전 풍란을 한 분 들여 놓았소.
도반의 부친이 절에 들렀다가 뜨락에 피어 있는 천리향의 내음에 반해서 그 꽃 향기 참 좋더라고 연신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천리향을 구하러 화원에 들렀다가 천리향은 구하지 못하고 난만 한 분 들고 왔소. 꽃대가 한 뼘쯤 옆으로 뻗어 나온 것이 조금 있으면 훈향을 아
침 저녁으로 뽐낼 것 같소. 평소 난의 자태와 향을 다정으로 곁 하였지만 선뜻 가까이 두지 않음은, 키우기도 쉽지 않지만 며칠만 자리를 비워도 마음에 걸리어 오히려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또 하나는 땅을 떠나 분으로 삶의 영역이 축소되어 길들여진 난의 모습이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놓여나는 출가의 의미에 반하는 것 같아 애지중지 할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 또한 가벼운 게 아니었소.
사실 난을 키우는 최선의 비결은 환경을 자생지와 최대한 비슷하게 하는데 있소.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겠지만 난 고유의 생리에 맞게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언제든 스스로의 생명을 거두는 비정함도 있소. 결코 변화된환경이나 주변 여건에 타협하지 않음이오.
따라서 난을 잘 키운다는 것의 이면에는 일정한 속박, 편애, 생육조건에 대한 왜곡 등 본성을 거스리는 행위에 조금은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소. 이러한 까다로움을 감내하면서 난을 기르는 까닭은 어디에 있겠소. 바로 변치않는 푸르름과 곧음, 그리고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빼어난 향 때문이오. 얼마쯤의 아부와 굴종 그리고 희생을 강요당하더라도 보상받는 게 그 이상이면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세계를 바로 보려 했던 옛 성현들의 행위와 겨룸을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흔히 난의 품성을 두고 심산유곡 고결한 은자나 무소유의 청정한 수행자에 비유하곤 하오 도를 찾는 사람의 모습이 대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바른 지견으로 바르게 행동했을 난처럼 향기로운 존재로 자리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오.
꽃들이 향기로 벌과 나비를 모으듯 수행자는 바른 견해와 바른 행동의 향기로 사람을 모아야 비로소 주변인이 아닌 세상의 중심으로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고 생각하오. 좋은 계절이요. 기억 저편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포함해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한껏 열어 가고 있소. 어디를 둘러봐도 지천으로 피어 있는 봄꽃과 그 향에 사람들은 그저 숨죽여 가슴벅찬 이 한때를 지켜 볼 따름이오. 어찌해볼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순정한 이 때 부끄러움으로 숨죽여 가슴벅찬(?) 현란한 몸짓을 그대도 알 것이오. 우리는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 후대에 물려줄 수많은 유산 가운데 저 잡초나 미물에게도 질책당할 악취 나는 역사를 이 봄에 남기고 말았소. 난의 향기, 그 고고함에 견주던 수행자의 모습이 어떤 악취와도 비교될 수 없는 부패한 부류의 모습으로 전락해 오히려 부패하고 부정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말았소. 스님들도 저러는데 우리야 뭐ꡓ 하는 비웃음도 포함해서.
물론 이번 사태는 과거 종권을 두고 벌인 상황과는 많이 다르고, 결과 또한 매우 고무적인 것만은 분명하오. 그렇지만 사건의 발단은 우리와 똑같은 체발염의의 출가자들에 의해 일어났고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반의 상식을 거스르는 비열함과 치졸함으로 일관해, 불교를 통해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초발심자 들을 더 큰 고통의 물결 속에 휩쓸리게 한 것이 더 큰 상처라 생각하오 다시 출가를 이야기하고 무소유의 의미에 대해 논해야 하는지 . 필요하면 서산스님의 언어를 빌려 이야기해 볼까 하오
출가하여 중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서 뛰어나 중생을 건지기 위함이다.
금번 사태의 전모는 종권을 쥐고 있던 몇몇 권력승과 이와 유착한 현 정권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획책한 벼리가 빌미가 되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내부적으로 출가인의 삶을 저버렸을 때 그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하겠소. 서산스님이 말씀하신 출가의 의미가 평범하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한 언어의 나열이 이니라, 실천적인 삶에서 부단한 노력과 피나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소. 나고 죽음을 면하는 길이, 번뇌를
끊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으며, 삼계에 뛰어나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소. 치열한 수행을 통해 출가자 본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말할 것도 없지만, 뭇이라도 늘 새기고 산다면 이번 사태에서 몇몇 스님들이 보여 준 추태는 다시는 없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송하 松夏.
이 봄밤, 두견새 맑게 우는 산사의 달밤에 삼천 년 전 부처님이 출가하면서 폐기 처분한 세속적인 욕망의 포대를 헤집어 명리나 폭력 따위의 말소된 언어들을 주제로 담론해야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소. 정녕 말법시대 인가. 운서 주굉스님의 「죽장수팔」을 보면 말법에 대해 논해 놓은 구절이 있오ꡐ말법에는 출가 비구의 신심이 재가거사만 못하고, 재가 거사의 신심이 재가 여인만 못하다. 二퍼나 불교를 배우는 자 많으나 성취하는 자는 적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옛 스님의 지적이 미래를 예견한 듯 날카롭기만 하오 그대가 재가 거사이기 때문에 이번 사태를 보는 눈이 나와는 또 다를 것이오. 오히려 더 많은 분노와 좌절로 몸살을 했을거라 짐작하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이 종지나 사상의 차이에서 오는 법난 法難이 아니라, 상식과 양심의 굴절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오 정말로 과거에 비해 불교를 배우는 지는 많으나 성취하는 지는 적음이 뼈저리게 통감되는 사건이었소.
다행히 폭력과공권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부대중의 희생으로 사건의 일단락이 바라는 대로 맺어졌오 금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몇 가지 상황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소.
첫째. 정권의 속성이 그 하나요. 문민정부라는 화려한 현수막을 내걸고 출범한 현 정권이 과거 군사정권의 사생아임이 분명해졌다는 것이오 개혁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민주화라는 명
패를 달았지만 오히려 더욱 광폭한 경비견을 사육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개들을 풀어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참회의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파렴치함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오 군사정권 이래에서는 무식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스스로 문치시대라 일컫는 현 정권이 불을 보듯 명명백백한 사건을 오도와 거짓으로 일관하는 작태를 보면 가증스러울 따름이오.
둘째, 중진 스님들의 행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오 이번 사태의 문제 제기와 행동 그리고 개혁으로의 성과는 소장 승려들의 주동으로 이루어졌음을 익히 이는 바일 것이오 이른바 본사급 주지스님들과 종회의원들이 한 개인의 노리개가 되어 상황이 여기까지 오도록 일조한 것에 대한 각고의 참회가 있어야 할 것이오 머리 깎고 절 집에서 몇 십 년 산 스님들이 어떻게 거수기 노릇이나 하고 허수아비처럼 행동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가오 허수아비는 새라도 쫓지 오히려 새를 불러 들여 집안을 망치려 했으니 참담할 따름이오.
셋째는 개혁의 의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이번 사태의 본질을 들여다 보면 제도나 법령의 불미함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났소. 문중, 파벌, 명리 둥 세속적인 싸움의 명분아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대상이라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오.
의식이 바르게 정립되면 좋은 제도는 그림자처럼 뒤따를 것이오 바른 견해야말로 바른 생활을 담보해 내는 첫 출발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팔정도에서 정견을 가장 먼저 주창하였던 것이오 의식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개혁 조건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소.
송하 松夏.
이제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오 이번 초파일은 난향에 부끄럽지 않는 수도자의 향키가 이 예토에 가득하기를 벌어마지 않소. 비 캔 뒤의 땅이 더욱 단단한 것처럼 이번 사태를 계기로 누워있는 돌부처를 일찍 세우는 생동력있고 무게 있는 승가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