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이 은세계로 바뀌어 버리니
이 몸이 수정궁에 머문 듯하여라.
그 누가 화서몽에 오래 잠겼던가
바람이 대 흔들고 해는 한낮인 걸.
大地變成銀世界 渾身住在水精宮
誰能久作華胥夢 風感琅玕日已中
한 밤에 방울방울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온 세상을 하얗게 뒤 덮은 눈을 보면서 앞에 있는 대중에게 불법을 시현한 게송이다. 청량감마저 지니는 빗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말씀을 가까이 하여 증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다. 아울러 외물과 내적 자아의 불일치를 말하면서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선정神定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진각국사는 설경조차도 법 자체로 보고 있다. 허망한 꿈을 깨고 무념무심의 청정한 도량을 갖추어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원감圓鑑 국사國師 충지沖止의 〈작야우송시동인作野牛頌示同人〉과 〈시인示人〉 역시 ‘인물因物’의 표현 형태를 지닌 시법시의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들소의 천성은 본래 길들이기 어려워
풀밭에서 제멋대로 뛰노는 몸이로다.
어쩌다 코끝에 평생 고삐를 두고서
온통 사람에게 끌려오고 끌려가는지.
野牛天性本難馴 草細平田自在身
何意鼻서終有索 牽來牽去摠由人
심우당 그 앞의 천지가 드넓다 하고
유선침 위의 그 세월이 길다고 했지.
나그네 길이 오히려 즐겁기는 하지만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감만 같으리.
審雨堂前天地關 遊仙枕上歲年長
縱然客路猶堪樂 爭似催裝返故鄕
들소를 인간의 어리석음에 비유하고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해 무명無明의 고통 속에서 헤매이며, 자재自在의 정각正覺을 두지 못해 평생 동안 미혹 속에서 끌려 다니는 우매한 인간성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심우당審雨堂은 고사 가운데 남가일몽南何一夢에 나오는 순우분淳于芬의 집이고, 유선침遊仙枕은 당나라 현종이 이 베개를 베고 자면 십주十州 삼도三島, 오호五湖의 온 세상을 노닐게 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짧은 인생이란 한 순간의 꿈과 같아서 무상한 것인데도 속세의 인간들은 그저 쾌락을 즐기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돌아 볼 줄 모른다. 따라서 허망한 꿈에서 깨이듯이 무명과 미혹에서 벗어나 안락한 고향과도 같은 진여眞如, 불법의 세계로 돌아가야 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생들이란 그야말로 들소처럼 물질의 고삐에 억매여 자성自性을 잃고 번뇌의 욕계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대각大覺 국사國師 의천義天의 〈송문인낙진대사귀봉선사送門人樂眞大師歸奉先寺〉에 나오는 ‘옛집’ 역시 위에서 나온 고향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쪽나라 강산을 다시 찾아가기 귀찮지만
옛집에 돌아가면 깊은 구름 속에 박히겠지.
우리 도를 떨쳐 빛낼 일 그대에게 달렸으니
중생을 바로 잡고 법을 지키길 잊지 말아라.
吳越江山懶重尋 舊栖歸隱白雲深
光揚吾道知君在 莫忘扶顚護法心
비록 찾아가기 쉽잖지만 안락한 옛집, 고향으로 돌아가야 함은 그 곳이 바로 진여, 불법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법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여 법을 지켜야 함을 말하였다.
다음의 태고太古 국사國師 보우普愚의 〈시문선인示文禪人>은 위의 게송과 달리 ‘직설적’인 표현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대는 이미 그릇됨을 알아 명리를 떠났으니
이 생에선 모름지기 불조의 은혜를 갚아야 하리.
만약 오늘 세 번, 내일 네 번 나누어 미룬다면
어느 때에나 무명의 뿌리를 알아 끊으리오
그대는 지금 장부의 뜻을 이미 펼치면서
때때로 다시 날카로운 취모검을 뽑아 들고
언제나 이 같은 모습을 지녀 장차 나아간다면
어느 누구인들 그 도리를 어지럽히리오.
곧장 막다른 길에 이르러 철벽과 맞선다 해도
반연攀緣의 사려와 망념이 모두 영원히 없어지고
공덕 이 물 속을 비추이는 달빛과 같으리라.
점차 깨임과 삼매에 들어 일여의 경지에 이르면
번뇌는 장차 없어지고 빛은 장차 드러나리니
이에 이르면 슬픔, 기쁨, 싫어함을 내지 말고
또한 깨달음을 알았다는 마음을 내지도 말라.
깨달음을 알았다는 마음을 내면 공력을 잃으리니
똑바로 떨쳐 일어나 눈으로 또렷히 살펴 깨달으며
반복해서 깊고 넓은 그 어떤 모양인들 살펴서
홀연히 불조의 관문關門을 붙잡아 넘어뜨리고
다만 한바탕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고 나서
그 뒤에 마땅히 본색을 찾아 참구參究하면서
요체를 결택한다면 저 불조佛祖와 같아지리라.
君旣知非去名利 此注須報佛祖恩
若也今日三明日四 幾時了斷無明根
君今已發丈夫志 時復提起吹毛利
常特如是做將去 有甚麽外亂其理
直到路窮當鐵壁 緣慮妄念都永寂
功如透水歸月華 漸至窹寐一如域
塵將息而光將發 到此莫生悲悅懌
亦莫生知覺心才 生知覺 失功力
但但提撕眼惺惺 反復看渠渠何形
忽然捉敗佛祖關 只消得箇一笑聲
向後宜尋參本色 決懌巴鼻兮同條生
더욱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무명無明을 끊고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제자인 문선인
에게 화두를 듣고 참선을 통해 오묘한 불조佛祖의 관문을 넘어야 함을 격려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끊는 것이다. 집착도 끊고 망념도 끊고 욕정도 끊는 것이다. 번뇌가 사라지고 쌓은 공덕이 투명한 월화月華와 같이 빛날 것이다. 여기서 머물지 말고 더욱 본색을 참구하고 요체를 결택한다면 저 불조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지는 다음의 백운선사白雲禪師 경한景閔의 〈우작십이송정사又作十二煩呈似〉 기운데 세번째 작품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옛 사람들이 증득했던 자리에선
불법이 그리 대단치도 않았으리.
바로 분별심을 끊을 수만 있다면
당장에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 걸
古人契證處 佛法無多子
正要絶情量 當陽便承當
진정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법이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자성自性이 진여眞如요, 또 불성佛性이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필요했던 것인 만큼 이제는 내 앞의 만상萬相이 여여如如한 법인데 구태여 법, 법에 억매일 필요가 있을까. 지극한 도는 언제나 언어문자 밖에 있는 것이다. 강은 강이요, 산은 산인 것을.
편양당鞭羊堂 언기彦機는 〈차동림운次東林韻>에서 이 세상의 만상이 여여한 법이 아님이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구름은 가는데 하늘은 그대로
배는 떠가도 언덕은 그 자리라.
본디부터 한 물건도 없었는데
어디서 기쁨 슬픔이 일어나리.
雲走天無動 舟行岸不移
本是無一物 何處起歡悲
하늘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고 언덕 역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여여한 법인데 분별심과 집착을 끊지 못하고 욕정에 이끌려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니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옹懶翁 왕사王師 혜근惠動도 이러한 번뇌의 근원을 끊고 노력하여 수행하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세상의 중생, 불도들을 경계하며 부른 다음의 〈경세警世〉 한편은 바로 직설적인 시법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인생 백 년이 다만 잠깐 사이일 뿐이니
이 짧은 세월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라.
노력하여 수행하면 부처 되기 쉬우며
이 생에서 잘못하면 업보 벗기 어려워.
무상한 죽음이 닥칠 때 누굴 대신하리
자기 부채는 원래 스스로 돌아가는 법
만약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오로지 조사들의 관문을 깊이 깨달아야.
百年只是暫時間 莫把光陰當等閑
努力修行成佛易 今生差過出頭難
無常忽到敎誰替 有償元來用自還
若要不經閻老案 直須參透祖師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참된 이치를 말하고 있다. 무상한 우리의 인생, 그러나 힘써 수행하여 이 생의 업보를 저 생에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벽사僻邪와 적공積功의 이치를 중생들에게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역시 깨달음으로 무명無明의 업보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바람에 물결 일고 물결에 거품 일어
부끄럽게 맑고 넓은 바다 위에 푼다.
오늘 갑자기 풍랑이 고요하기만 하니
가을 강은 원래 한결같이 맑고 밝아라.
仍風起浪浪生漚 慙愧淸平海上浮
今日忽然風浪息 澄明元是一江秋
이는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시부상인示膚上人〉으로서 인간의 자성自性이야 가을의 강물처럼 맑고도 밝은 것인데 망상妄想의 물결이 쉼 없이 일고 거품과 같은 욕정의 집착을 버리지 못해 끝없이 번뇌의 바다위를 떠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취미翠微 대사大師 수초守初가 〈시김처사示金處士〉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번뇌의 바다에서 벗어나서 청명한 선정을 통하여 진여眞如를 지킨다면 무욕무념, 자유자재로운 삶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보았다.
뜬구름에 닿는 생각 한가로이 걷고 펴며
진여를 지키려 항상 초가에 누웠어라.
까닭없이 소나무 창가 단꿈을 불러 깨우는
봄비 그친 저 산자락 외마디 새 울음소리.
意在浮雲閑卷舒 守眞常自臥芧盧
無端喚起松窓夢 山鳥一聲春雨餘
“산에 사는 스님들은 바깥 물욕이 없고, 오직 변함없는 백년의 마음이 있을 뿐(山僧無外物 惟有百年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