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협력자들의 전후 모습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별기고 - 이정
1994년 04월 146호
어둘 녘 사이공 강의 선상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강 건너 편에는 일본회사의 네온사인 간판들이 번쩍이며 현란하게 여기저기 서 있다. 만만한 이웃집에서 뜻밖에도 먼저 와 있는 경쟁자를 발견한 것처럼 한순간 당혹과 허탈이 스며든다. ‘장사가 된다면 자신의 쓸개라도 빼줄 사람들ꡑ 이라는 일본 사람들에 대한 세평이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악단에게 아리랑의 연주를 부탁했다. 필자 일행은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고 연주에 맞추어 아리랑을 열창했다. 많은 베트남인들이 우리들의 노래 소리에 장단을 맞추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6.25 전쟁을 통해 지금의 경제적 도약을 이룬 기반을-다졌다면,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그 기반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트남에서 상당한 피의 댓가를 치룬 점이 일본과 다르다. 우리나라는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팔년 동안 삼십이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이 땅에서 우리의 젊은이들 이 무려 사천육백명이나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본보다 베트남에서 ꡐ우월적 지위ꡑ를 누려야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사정은 여의치 못하다. 무릇 경제 교류는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문화 교류가 밑받침될 때 튼튼해진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문화교류의 가장 튼튼한 끈이 바로 불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같은 불교권인 이 곳에서 전쟁중에는 우리 법사들이 대민활동을 깊이 있게 폈다. 필자는 베트남의 이 곳 저곳에서 그러한 단초를 발견하고, 시급히 끊어진 끈 잇기를 서둘러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닌호아의 텐보사(天寶寺) 주지 틱한하이 스님(81)은 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계 인사였다. 그는 한월 친선에 앞장서서 이 지역 안의 반한 인사들을 설득하여 백마부대에 협력하게 했으며, 또한 한월친선합동법회 따위도 자주 주관했다. 그래서 73년 백마부대는 철수하면서 백마부대의 절 백마사를 그에게 인계했으나, 75년 통일이 되자 월맹군이 들어와 백마사를 폐쇄했다. 그는 이 때 불상만을 모시고 쫓겨 나와 재교육이라는 이름의 사상 전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수행에 따르는 품계를 귀중히 여기는 전통을 갖고 있는 이 나라에서 그는 아직도 전쟁 당시의 품계인 대덕大德에 머물러 있다.
그는 필자 일행과 마주 앉아서도 자신의 험난했던 지난 세월의 경험을 감추지 못한다. 옆에 비밀 경찰이 있는데도 ‘갈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함께 서울로 가겠다ꡑ하며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었다. 한국군에 동조하여 한월 친선계 앞장섰던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더 큰 곤욕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물과 주름에서 짐작할 뿐이다.
그는 지금도 백마사에서 갖고 나온 한국불상을 자신의 암자에 모시고 산다. 이 불상은 69년에 백마부대 권오현 법사(대한불교진홍원 사무국장)가 조계종 총무원의 후원으로 고국에서 모셔온 석고불이다. 한하이 스님은 우리를 이 불상이 봉안된 쭝쾅사로 안내했다. 텐보사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십 분, 농로를 따라 걸으면 삼십 분쯤의 거리인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한눈에도 한국적 양식이 뚜렷하게 돋보이는 불상이 정갈하게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삼 년 전에 베트남식으로 새로 개금을 하여 옷은 금색으로, 옷밖에 드러난 몸은 살색으로 단장하였으며, 얼굴에는 수염도 그리지 않았다.
우리는 한하이 스님과 이 절을 지키는 노비구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부처님 잎에 엎드려 예배했다. 베트남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한국 불장이다. 우리가 잊어 버린 과거를 소중히 지키고 있는 베트남인의 의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닌호아에서 우리는 아주 귀중한 또 한 사람을 만났다. 전쟁 당시 백마사의 부설 유치원에서 교사로 있던 피 선생60)이다. 우리 일행이 69년 6월부터 71년 10월까지 백마사에서 법사로 일했던 법타스님(조국평회통일불교인협의회 부회장)과 함께 그의 집에 예고도 없이 방문하자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소녀처럼 스님을 맞았다. 글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의 몸짓이었고, 반가움의 외침이었다.
구차한 생활이 뚜렷한 안방에 안내되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물두살에 남편이 유복자를 남긴채 죽자, 그는 백마사 유치원에 취직하여 이 지역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한국군 고급 장교들을 영접하는 따위의 심부름도 했다. ꡒ제 일생에 그 때 삼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배급도 최소한으로 밖에 나오지 않았고, 이웃 사람들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또 이웃집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이기쁨을 표현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요“ 우리는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스물아홉살 된 그녀의 아들도 출신 성분이 나빠 대학을 다닐 수 없으며, 취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오빠집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트랑의 롱손시-전에는 보데사라고 했다-에는 중부 베트남의 대표적인 불교지도자 틱찌암 스님(84)이 살고 있다. 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군종활동을 벌이던 법사들에게는 이 절과 찌암스님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그만큼 한국군과 관계가 돈독했다. 찌암스님의 제자이며 주지인 틱찌틴 스님(73)이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는 반가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얼른 법당의 주존불 앞에 있는 촛대부터 들어 보인다 거기에는 ‘증 백마사단장 소장 정규한, 1970년 1월 1 일‘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십삼년의 세월이 흘러 공산화된 지금까지도 한국군 장군의 이름이 이 절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시현된 적에 대한 자비일까? 속인의 눈에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실이신 찌암 스님은 모기가 많은 절 뒷편 밀림 속 토굴에 계셨다. 법타스님을 친자식 대하듯 자애롭게 맞이한다. ꡐ전쟁 때 자네가 자주 왔지. 언제나 올 때마다 이 절을 자네 집처럼 여겼지ꡑ그의 인자한 풍모와 자비로운 언행이 우리를 정말 내 집처럼 편안하게 했다. ꡒ한국과 베트남 거리는 멀지만,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이미 우리는 하나ꡓ라고 그는 강조하며, 당시의 군종 법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며 안부를 묻는다.
그는 전쟁 뒤에 아무런 고초를 겪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 초연한 청정한 수행승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인간적 갈둥이 심하고, 사상적 차별이 뚜렷할 때에도 그는 큰스님으로서의 사회적 대우를 무난히 지켜냈다. 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국민들과 신자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단다. 불교 이외의 어떤 사상도 한 스님의 고매한 인품을 훼손하지는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몸소 입증해 낸 것이다. 또한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대결 구도로만 파악하기보다는 외세와 민족주의 노선과의 대결로 파악하는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옳음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나트랑의 십자성 부대에 터에 있는 전승기념탑에는 ꡐ장병들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쓰여 있다. 하노이 공대 출신의 엘리트 팝탄쭝 (29)씨는 ꡒ우리는 전쟁을 잊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왜 비싼돈을 들여 이런 기념탑을 세우는지 그 의미만은 잊지 않고자 한다ꡑ는 매우 정치적인 말로 이 기념비를 설명한다. 설혹 우리나라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더라도 베트남 사람들은 구태여 들추어 내려고 하지 않는단다. 전쟁 당시 남부 베트남을 지지했던 어떤 사람은 ꡒ우리는 전쟁 당시보다 지금 더 한국사람을 좋아한다ꡓ고 말한다. 피를 흘리며 도와 줄 때보다도 지금이 더 좋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참전의 의미보다는 불교라는 전통적인 끈으로 한월간의 끊어진 다리를 이어야 할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베트남과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
다. 그래야만 한하이 스님과 피 선생의 눈물을 멈추게 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