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의 파괴 현장
이 좋은봄 날에, 저 유명한 통일신라 말구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터전을 마련한 철감 선사 도윤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한, 전라남도 화순군의 쌍봉사를 찾아 나선다. 들려오는 소문은 껄끄럽기만 하다. 중창 불사를 하면서 천년도 훨씬 넘은 옛 절터와 연못을 중장비로 깔아 뭉개고, 기름 보일러의 요사채를 짓고 돌담장도 둘렀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니 연지를 발굴하고 주변 지표 조사를 한답시고 야단이나. 정녕 사지산문의 근본 도량인 이 오지의 쌍봉사에도 과시적인 구조물을 지으려는 성과주의가 만연하다니 참으로 개탄 스럽다.
ꡒ옛 절터를 발굴해서 어찌 한다는 말인가. 숟가락 부스러기와 기왓장 밖에 뭐가 더 나오겠냐.ꡓ ꡒ나의 권한으로 이런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 배짱은 전직이 체육 교사여서 그런지 아니면 순수한 종교적 열망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런 논란은 최근에 장홍 보림사에서 벌어진,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문화재 파괴 현장에서 장홍군청 문화공보실 담당자가 내뱉는 말이다. 잘 알다시피 보림사 또한 통일 신라말 구산선문-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의 도량으로 재작연대가 새겨진 국보철불과 두개의 삼층석탑, 석등 등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한데도 정화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깡그리 옛 절터를 헤집어 걸리적 거리는 초석이나 축대를 빼내 버리고, 이를 질책하는 신문 기자나 문화재 위원에게 항변하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종교의 역사를 외형적인 교세 불리기와 바꾸는 사형들이 즐비한 불교가 내가 그토록 갈망하며, 환갑까지는 세상에 살면서 평생을 공부하기로 하산까지 하며 서원을 세웠던 종교의 실상이란. 하루빨리 찾아가서 더 파괴되기 전에 현재의 모습이라도 남겨 놓아야하겠기에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고맙게도 광주직할시청의 이계표선생과 국립광주박물관 정선종 선생이 이번 답사에 함께하여 주었다.
쌍봉사 가는길
시원하게 뚫린 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십 년 전 어렵사리 쌍봉사를 찾아가던 기억들이 새롭다. 기차를 이용하던 시절, 도림역에서 내려 쌍봉마을을 돌아서 사농마을까지 걸어가던 그 좁은 길, 그저 그대로 운치도 정겨움도 가득하였다. 지금은 광주에서 너릿재 터널 속을 빠져 나오면 화순읍이 보이고 왼편으로 접어들면 도곡 평야에 자리잡은 옛 농성현의 중심지인 능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능주의 오른편으로 접어 들면 그 유명한 천불천탑의 도량 운주사로 가는길이고, 왼편으로 빠지면 이양면 소재지가 나오고 이양교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학포 양팽손의 동네인 다라실 쌍봉 마을에다다른다.
고목과 기와지붕이 즐비하여 제법 뼈대 있는 동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도로가 잘 포장
되어 있으나 쌍봉 마을에서 부터 사동마을까지는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예전에는 관광버스조차 돌릴 수 없을 만큼 옹색한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을 포크레인으로 뭉개버리고 요사채와 담장을 번듯하게 지어 아연하기 그지없다.
증조산 쌍봉사
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서쪽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절 집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 이다. 요즈음 절에 서 가지산 쌍봉사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가지산문 개창조인 징효 절중의 스승 철감 선사의 열반지로서 사자산문의 쌍봉사로 이름한 것으로 여겨지나, 사자 산문은 쌍봉사가 아니고 영월 흥녕사興寧寺이다. 그리고 청구도 나 대동여지도 같은 옛 지도나 여러 지리서 에도 중조산中條山이라 표기하고 있으니 고쳐쓰기 바란다. 다만 현재의 지도에는 계당산桂棠山이라 하는데 중조산이 언제부터 계당산으로 변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쌍봉사 문헌기록
쌍봉사에 대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자면 먼저 「동국여지승람」이나 「범우고」에는 ꡐ재전라남도능성在全羅南遭奏城(卽綾州今入和順郡中條山)이라는 정도의 기록과 「가람고」에는 “재주동서십육리在州東西十六里“ 「태고사사법」에는 .“재화순군이양면중조산在和順郡梨陽面中條山 대본산대흥사말사 大本山大興寺末寺ꡑ라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지금은 송광사의 말사 이지만 예전에는 대홍사에 소속된 절임을 알 수 있고 산 이름도 중조산 임이 고증된다.
쌍봉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무주몽리산대만사적인선사비송병서」(872년)에 몽리산문의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스님이 신무왕 원년(839) 2월에 귀국하여 처음으로 하안거를 지내던 곳이 무주(지금의 광주) 관내 쌍봉사라 하였으니 적어도 839년 이전에 이미 쌍봉사에 풍경소리가 울리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철갑선사 도윤의 숨결이 스민곳
그 뒤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이 곳에 주석하면서 쌍봉산문의 이름은 만방에 드높아진다. 철감선사의 행적을 적은 탑비에 비신이 없어져 선사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다행이도 이 비문의 초록으로 보이는 글이 현존최고의 선종사서인 「조당집」 권17에 수록되어 있고 최지헌이 지은 「대당신라국고봉암산사교시지중대사적조지탑비비명병서」(924)에도 쌍봉운 이라 언급한 글이 발견된다. 또 철감선사의 법손으로 사자산문을 연 정효대사 절중(826-900)의 탑비가 홍녕사(홍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에,
철감선사의 맏제자 훈종장로의 법손인 법경대사 경유의 탑비는 오룡사(오룡사법경대사보조혜광탑비)에서있다. 징효 절중과 법경 경유에 대해서는「조선금석총람」에 그 탑비 의 전문이 실려있으니 좀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분은 찾아보기 바란다. 선사들의 법열이 느껴지는 그런 명문들이 즐비하다. 절중과 경유의 탑비에는 다행히 승의 행적을 적어 놓아 아쉬운 데로 철감 도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수 있다.
철감 도윤은 호가 쌍봉이며 휘가 도윤, 성은 박, 한주 휴암인이라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서울 출신이고 누대의 고조가 사환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육두품 이하의 향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16개월 만에 선사를 낳았고 18세에 김제 귀신사로 출가하여 화엄경을 듣고 .‘원돈圓頓의 교인들 어찌 심인心印 같으랴ꡑ 생각하고 825년(헌덕왕 17)에 사신 행차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건너 갔다고 한다. 선사는 마조 도일의 제자로 육조대사의 법증손에 해당되는 지주 남천 보원 선사 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는데 남천선사는 ꡒ우리 종의 법인이 동국으로 돌아가는 구나ꡑ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스승의 열반 뒤 13년 동안이나 당 나라에 머물다가 회창 5년의 법난을 겪고 회창 7년인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여 금강산에 주석했는데, 사방에서 서 학도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경문왕의 숭앙을 받았던 그는 다시 쌍봉사(전남 능주)로 가서 종풍을 크게 떨쳤으므로 여기서 쌍봉이라는 별호가 생긴 듯하다. 868년(경문왕8) 4월 18일 나이 71세, 법랍 53년으로 입적했다. 시호는 철감이며 탑호는 징소이다. 돌아가실때 오색 광명이 입에서 나와 공중에 상서로운 상이 퍼져나갔다 하여 서기만 천철 감국사 라고도 한다.
혜소국사와 만전(최항)
그 뒤 쌍봉사는 소성연간(1094-1097)에 혜조 국사가 중창하였다는 사적비가 절의 동편에 있다. 또 「고려사」 권42 최충헌 전에 따르면 최씨 정권 제3대 집정인 최항이 송광사 2대 사주인 진각국사의 제자가 되어 쌍봉사에 주석하면서 무뢰승도를 모아 문도로 삼고 세도를 이용하여 재산증식에 혈안이 되었다 한
다. 이러한 대여취식을 일삼는 식화의 증식은 무인정권 유지와 무슨 관련이 있을법한데 확증이 없다. 다만 진주 단속사에는 최우의 장자 만종을, 이 쌍봉사에는 차자 만전―뒷날 무신정권의 최고 집정자가 되는 최향―을 주석케 하였다는 기록은 또 어떤 뜻인지...
학포 양팽손이 뛰놀고 공부한 절집
쌍봉사 아랫 마을 다라실은 기묘명현 중하나인 학포 양팽손(1480~1545)이 태어난 동네이다. 학포는 능주로 귀향 와서 사사되는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선후사를 정리하여 일약 국충명현이 되니 쌍봉사는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더욱 피폐해 간다. 결국 조광조와 양팽손 등 유현의 위패를 배양한 죽수서원竹樹劃完의 예속 사찰로 전락하여 겨우 명맥을 잇게 된다. 그러나 정조10년(1786) 이조판서 김종수가 사적비를 쓸 때까지만 하여도 전각, 누암, 방료가 모두 400여 칸이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절터로 보아 고증할 길이 없다.
부처님오신 날에 부처님 집을 태우는 이들
절에 다가가자니 예전에 못보던 일주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광주 무등산 중심사의 총무 소임을 보는 혜광스님이 이 곳 주지로 부임하셨다기에 일부러 연락을 취하였으나, 아무도 마중 나오는 이 없고 공양간 보살님 만이 주지 스님의 잘 모시라는 당부를 기억해 낸다. 바쁘기 바쁜 절인가보다. 염불하는 주지 스님 한 분만 보이고 고시 공부하는 젊은이 몇 명만이 새로 지은 요사 주변에서 운력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절을 요사만 늘려서 무얼 한다는 말인가.
쌍봉사 대웅전 하면 어처구니 없는 화재로 유명하다. 1984년 4월 3일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던 사찰측의 부주의로―당시 주지 스님은 켜 두었던 춧대를 고양이가 지나가다 넘어 뜨려서 불이 났다고 변명하지만―스텐레스 촛대가 넘어져 그만 불이 대웅전 전각 천정에 가득 달아둔 종이 연등에 옮겨 붙어 우리나라에서 현존 유일의 삼층 목탑식 전각인 대웅전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다 당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이 곳에 와서 탄식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그나마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목조건축물인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쉽게도 1986년 말 복원을 완료한 이 대웅전은 화재 이전의 모습과 달라 어색하다. 전에는 삼층 지붕이 팔작지붕 모양이었는데 복원하면서 사모지붕 양식으로 바꾸고 석반을 얹어 상륜부를 보완하였는데 아무리 1962년 10월에 실시된 해체 수리 때에 본디의 모습이 사모지붕으로 확인되었다고는 하나, 탑이 아닌 대웅전이라는 전각의 용도로 고쳐 쓰기 위해 일부러 팔작지붕 모양으로 개조한 그 선인들의 지혜를 쫓기엔 우리의 소견이 모자라는 듯 하다. 실측도 하나 남기지 못하는 문화재 행정의 안목으로 복원하여 놓았으니 참으로 가관이다.
그 가운데 정말 다행한 것은 화재의 와중에서도 석가삼존불(석가, 가섭, 아난)과 동국진체풍인 단정한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셔 내었다 하니 미운 맘이 좀 가시는 듯하다.
1962년 해체 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을 기록한 상량문의 전문이 신영훈 씨에 의해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고고미술」 29호) 대웅전 문을 가만히 닫고 돌아서 나오니 그 앞에 10여 미터 넘게 벌어진 괘불지주가 눈에 들어 온다. 지금남아 있는 패불 가운데 너비가 이만큼 넓은 것이 없어 마당에 잔디를 입힐 때 마음대로 넓힌 것인지 찬찬히 고증해 볼 일이다. 더욱이나 쌍봉사 어디에도 쾌불함 조차 보이지 않는다.
선의 경자를 형상으로 보여 준 이름 모를 조각가
마음이 바쁘다. 얼른 철감 도윤스님의 묘탑을 뵈어야겠다는 조바심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절 왼편을 종종 걸음으로 돌아 한 오분쯤 올라가니 예전에 무성하던 대밭은 베어지고 훨씬 넓은 평지가 눈에 가득 들어 온다. 묘탑과 탑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용도는 아닌 듯한 넓고 높은 축대, 그 뒤에 초석으로 쓰였
음직한 돌들이 자리를 잃고 흩어진 채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하다. 분명 영당같은 전각이 부도 뒷편에 세워졌을 것인데, 아마도 조선 후기인 정조 10년 (1786)쯤에 이조판서 김종수가 사적비를 쓸 때 대대적인 수리로 원상이 바뀐 듯하다.
지금의 모습은 일제 이후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무참히 쓰러뜨린 것을 1957년에 재건해 놓은 것이라 옥개석 여기저기에 흠집이 적지 않다. 이 부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선의 경지를 형상으로 보여 주려는 듯, 각 면의 모서리에 안 오금을 주어 날렵한 선 맛을 낸 당대 최고 조각가의 신묘한 솜씨로 이루어진 역작이다. 우리는 그 어떤 언어로도 이 묘탑의 절묘한 조형 감각을 설명해 낼 재간을 가지질 못한다. 아무리 바라다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를 한참...
“이 늙은 중같이 작은 그릇에게는 이 곳이 머무르기 마땅치 않고, 그대가 여기에 와준다면 딱 들어 맞을 것 같네. 제발 부탁하니 우리 절에 와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