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고 붓을 잡고 보니 망망 대해에서 지푸라기 하나 잡은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께서 꽃 한송이 들고서 염화미소 지으신 것은 언어가 아닌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수많은 대중 가운데서 가섭존자 한 분만이 알고 답하였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삭발염의한 수도자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대중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대중과 함께할 수 있음은 강원에서 경전을 보고 절집에서 기도를 하고 문고리를 만지려고 선원에서 정진한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선禪의 뜨락에서 풍기는 황금빛 향기는 세속의 금, 은 보화나 향기로운 꽃내음보다 더 우아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굳건하고 아름답지만 인연이 다하면 결국에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선의 뜨락에서 풍기는 수행 빛의 결정체는 영겁의 인연이 다하더라도 다함이 없습니다. 뉘라 알까요. 그림의 향기 또한 이와 같지요. 세속인과 수행인의 작품을 견주어 보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쬐그만 틈이 우주 밖으로 나갔을 때는 십만팔천리로 나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의 표현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꽃, 인물, 풍경 또는 알 수 없는 추상화 따위를 그려 본들 결국은 자기의 생각이나 세월의 차이에서 오는 선線의 아름다움과 색의 대비라는 한계에 이르고 맙니다. 이러한 한계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예술가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수행인이 세속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그 자체가 우스운 것이고, 분별하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흔히들 수행자의 그림을 선화 禪畵 라고 하지만 선화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이들의 표현 방법을 관념적으로 선화니 선
서禪書 니 하면서 규정지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수행하는 이가 길을 걷다 냇가에 이르러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는것 자체가 행위예술이 될 수 있고, 막대기로 허공을 한번 휘저어 본 것이 그림도 되고 글씨도 되는 것이지요.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세계를 보면 정상적인 사람의 삶이 아닌 비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여 작품화하였지요. 그러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 사물을 보는직관력이 부족할지라도 정상적인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만들어 줍니다. 바로 사고의 직관으로서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보는 이마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림 이야기는 아니지만 간혹 기도나 수행중에 또는 어떤 충격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스런 환영들이 나타납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것을 그릇된 것이라 해서 되새기지 않지만, 눈 밝은 스승을 모시지 못한 일반 사람이 그러한 경계에 접하면 간혹 미치는 경우도 있고 신神으로부터 불가사의한 능력을 얻었다는 환영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달리는 표현, 형상화하였지요.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을지라도 미쳐 버린다는 것처럼 슬픈일은 없겠지요. 각각의 예술가들 자기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추상화니 구상이니 구분하지만, 감상자가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서 그 본 뜻을 알았다면 개인적인 삶도 더불어 살아가는 참삶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작품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그 결정체를 그려서 표현했을때, 그 작품을 보고서 어떤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혼자만의 수행이 아닌 더불어 깨침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현대는 전문화 된 세상이라 각각 자기의 빛깔대로 살아들 갑니다. 나로서는 그 특정을 종교와 예술이라는 분야로 국한시켰습니다. 나의 특성으로 여러 많은 대중들과 함께 탁마하고 어울려 가며 살아갈 따름입니다. 어린 시절에 생각하지 못한 승려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지금으로서는 붓 하나로 물 흐르듯 쉬임없이 정진하여 세상 천지에 꽃향기 가득차게 하여야겠습니다.
느껴지는
그대의 영혼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대 영혼까지 저 멀리
이 마음 다한 곳
언덕 너머에
아련히 피어나는
연꽃 한 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