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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종이를 도반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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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영담 1994년 04월 146호
어느날 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갔습니다. 법문을 마친 스님이 종이 만드는 나를 알아보고 불러 세우셨습니다.ꡐ영담스님, 스님이 아무리 종이를 잘 만들고 종이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고 전통 한지의 맥을 잇는다는 대외 명분이 좋더라도 그것은 다 망상이요. 그러니 공부하시오ꡓ그 스님의 충고는 진지하였지만 내게는 느닷없이 들렸습니다. 그렇지만 후학을 염려하여 한 얘기려니 생각하고 그 충고를 고맙게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망상으로 보자면 망상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망상을 여의고 어찌 한 발자국인들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종이 만드는 것이 망상이라면 망상인 줄 알면 그만이지요.
종이를 만들다보니 사람들에게는 저 보다 종이가 먼저 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오나가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종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심지어는 나의 안부는 온데 간데 없고 종이 근황부터 먼저 묻습니다. 요즈음도 종이를 만드느냐, 왜 종이를 만드느냐, 어떻게 종이를 만들게 되었느냐 따위를...사실 제 마음속에는 종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새삼스럽습니다.
내가 종이를 만들게 된 동기는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 만 먼 전생에 연유한 것 같고, 처음에는 심심해서 시작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종이를 만들게 되었고, 만들다 보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경제를 내가 해결하여 시물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수행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종이를 오래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는 불교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종이는 사람의 정신과 문화 예술적 소양을 표현하고 담는 그릇입니다. 특히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인출하고 유포하는 데 또는 불화를 그리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요긴한 물건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하나하나 필사筆寫하여 경전을 모시는 사경이 일종의 종교 의식이나 수행 방법으로까지 승화되었으며 사경을 하려고 종이를 만드는 데에 온갖 정성과 지극한 불심을 다하였습니다. 이 때 만든 종이는 자연히 질이 좋고 뛰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불교의 문화유산 가운데에 종이를 기반으로 하는수 많은 문화재들은 비록 이러한 불심의 소산인 까닭으로 수백 년을 넘어 천 년 세월을 버티며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국보 제196호로 지정된 신라 백지죽서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1370여년 전인 신라 경순왕 대 연기법사 스님이 제작한 두루마리 사경본으로 책 표지는 짙은 감색물을 들인 매우 질 좋은 닥종이 입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를 만들었다는「직지심경」도 절집에서 스님들이 만든 종이에 인쇄한 책입니다. 이렇듯이 우리나라의 제지술과 인쇄술의 발달에는 불교 정신과 스님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물과 불에 가장 약한 한장의 종이가 쇠나 돌과 나무로 된 문화재 못지 않게 천년풍상을 견디며 면면히 불교 정신을 이어 주고 있음은 참으로 놀랍고 예찬하지 않을 수 없는 종이의 공덕입니다.
닥종이는 수명이 길고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통풍과 보온이 좋고 투명하여 예로부터 창호지나 벽지로 애용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먹물의 번짐이 단아하여 문필용으로 으뜸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 종이를 노끈처럼 꼬고 덧붙이고 기름 먹여서 갖가지 종이 세간품을 만들었습니다. 절집에서는 불상, 걸망, 가사, 방석, 북,꽃, 연둥, 소반 둥 실로 종이를 이용한 세간품과 사물이 다양하였습니다.
옛날 스님네들은 불사를 할 때 필요 한 물품올 직접 만들어 쓰는 자급자족 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자급자족의 정신과 노력 속에서 절집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이 꽃필 수 있었으며, 속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생활의 여유와 기품이 있었습니다. 종이만 해도 인경 불사를 하거나 불화를 조성할 때 종이에 가지가지 공을 들이고 자연 염색으로 멋스럽게 장엄한 극치의 수준을 우리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합니다. 옛 스님들의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멋은 아마도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는 이사합일理事合-의 구도적 삶에서 성사 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옛 스님들의 가풍과 구도적 삶의 정신이 오늘날 절집에서 차츰 퇴색되어 가는 듯한 안타까움은 나만의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겨 한 장의 종이를 만들면서 천년을 생각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열 번 스무번이라도 다시 만든 옛 종이의 품격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이런 정신으로 만들어진 종이가 다행히 나라에서 하는 국보급 불경책의 영인 사업에 쓰이고 선인들의 묵혼을 보수 보존하는데 쓰이며, 스님과 신도님들의 사경 용지와 불서화 종이로 쓰여서 보람을 느낍니다. 비록 종이 만드는 일이 육체적으로 고단하더라도 마음에는 고생한 자취가 없으므로 텅빈 종이처럼 언제나 한가한 마음입니다. “대해일장지사무량법문大海一張擬寫無量法門“ 이라는 게송이 있지요. 아무리 형상의 종이를 잘 만들어도 저 푸른 바다, 저 허공 한 자락을 뚝 떼어서 무량한 법문을 쓸 줄 아는 내 마음종이 만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든 진짜 나의 종이는 접으면 속눈썹 한터럭 속에 감춰지고 펼치면 시방세계가 굴러 다닙니다.
오늘도 닥종이를 도반삼아 지작불紙作佛, 불작지 佛作祗 놀이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