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광으로서의 절과 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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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최일남
1994년 04월 146호
생각하면 어지간히 산깨나 헤맸다. 어려서는 집이 바로 산밑이라서 싫든 좋든 그 자락 안에서 자란 셈이다. 전주라는 괜찮은 도시의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완산칠봉 아랫녘이다. 중턱에 칠성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고 봉우리를 넘으면 여승들이 사는 안행사가 있다. 따로 등산할 필요가 없었다. 앉으나 서나 산의 품안이며 산의 너그러움과 근엄함을 아울러 일깨워 주는 곳이 절이었다.
절이 왜 산에 있는지에 대한 깊은 내력을 떠나 산과 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의어률 이룬다는 것이 내 나름의 파악이다. 산 없는 절이 없고 절 없는 산이 있을 수 없는, 정신적 등가물 이라는 인식은 어른이 된 이후 생활의 일부가 되다시피 한 등산에서 더욱 굳어졌다. 명산대찰의 크나큰 경지를 말해 무엇
하랴. 작은 산과 작은 절은 그것대로 절묘한 구도를 이룬다. 열이면 열 죄다 그렇다. 산 아래서도 가물가물 모습을 볼수 있는 절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다 느닷없이 나타난 절의 경의로움 을 때때로 경험한다. 이런 곳에는 절이 없겠지 지레 짐작하다가 갑자기 만나는 신문의 반가움은 그럴수록 크다. 그 순간 놀라고 탄복한다. 산세로 미루어 절을 세울 만한 여지가 없겠거니 넘겨짚었다가, 절 마당에 서면 그게 아니었구나 싶다. 탁트인 시야가 과연 기막히다는 생각과 함께 “절마다 명당“의 감탄을 새삼 되 뇌이지 않을 수 없다. 높기로 치면 설악산 대청봉 밑의 봉정암이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운길산(경기도 양주군) 수종사의 조망은 시원하다 못해 마음을 낚아 내는 기분이다. 발아래 펼쳐진 두만강과 북한강에 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따로따로 흘려온 수수백리 노독을 풀며 다정하게 물을 섞는 양수리를 두다리가 가로지른다. 쉴 새 없이 자동차가 오가고 이따금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사람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에서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는지를 떠올린다. 생자필멸生者必滅회자정리會者定離 법리를 어설프게 되새김질 한다. 금오산 약사암도 좋다. 오대산 적멸보궁의 그 아늑함도 잊지 못한다.
이런 묘사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절에 대한 감각은 단순한 과객에 머물러 있다. 정작 마음을 기울여야 할 부처님의 말씀에는 가까이 가지 않은 채절을 정신적 차경借景으로 인식하는 수준이다. 철철이 몰려다니는 등산객이나 관광객 또래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토족으로 정갈한 경내를 어지럽히는 귀찮은 무리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절에 닿을 때마다 무위적정 無爲寂靜의 홀가분한 의식에 젖는 걸 즐긴다. 공으로 경치를 취하고 아무 때나 들러도 막는 사람이 없는 열린공간에 빠져드는 편이다. 맞다. 불교를 입에 올리는 것은 무종교인의 신분으로 참람僭濫하다. 다만 절이 지닌 미덕의 하나는 그 누구도 거역하지 않는 열린 품성에도 있다고 믿는다. 하얗게 바랜 햇빛이 알맞게 사이를 두고 늘어선 가람에 눈부시게 반사되는 한여름은 어떤가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의 매운 정적은 또 어떤가 온다는 기별을 미리 띄울 것도 없고 간다는 인사를 날릴 것도 없이 왔다가는 손 아닌 손의 자유로움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기에 한결 넉넉하다. 산에 절이 있는건지 절에 산이 있는 건지 모를 경지 아니든가 하기야 절도 이미 옛 절이 아니다. 담장이라든지 철조망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이제는 그런 금줄을 쳐야 할 필요에 몰린다. 경계를 분명히 하거나 미관을 위해 두를 수 있다.
법으로 정한 입장료를 거두기 위해서도 사면팔방 열어 둘 수는 없다.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이유가 없는 한적한 절에서마저 어떤 이가 지적한 것처럼 ꡐ한인물입閔入勿入ꡑ 의 팻말은 좀 뜨악하다. 수련을 쌓는 기간이라면 모를까, 잡인 출입이 싫어 그랬다면 절의 품안도 어느덧 사람을 가리는가
싶다.
시도 때도없이 드나드는 ꡐ잡인ꡑ은 아닌 게 아니라 귀찮을 터이다. 맑은 물로 갈증을 달래 줄 뿐더러 이름 한번 해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우소” 까지 선선히 빌려 주는 마당에 허접 쓰레기 따위를 흘리고 다니는 속인들이 반가울 리 없다. 그렇다고 절이 사람을 막으면 어쩐다지? 선남선녀는 물론 ꡐ잡것ꡑ들도 아우르는 산속에 절이 있을 바에야 절 또 한산의 이치를 닮아 나쁠것이 없겠다. 아무려나 절과 산의 조화는 이렇게 한데 어울려 내 마음 안에 지리잡고 있다. 절이 시정 거리에 나 앉는 것도 마다 않지만, 절과 연관된 내 상상의 시작과 끄트머리는 언제나 산과 더불어 살아 있다. 요즘은 시간에 쫓기고 힘에 부쳐 큰 산은 엄두를 못낸다. 동네에서 가까운 야산이나 얼쩡거리는 형편인데, 어느 일요일 모처럼 산에 갔다가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곳 스님께서, 오는 사람마다 점심을 먹이는게 아닌가. 그때 절밥에 대한 기억들이 슬며시 떠올랐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더니, 고작 풍광으로서 맴돌다가 기껏 먹성으로 돌아가는 일이 멋 적다. 부처님 근처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려는 신심 대신 속되디 속된 공리의 눈으로 절을 바라보는 중생이야말로 무엇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꼴이다. 그러나 절에 얽힌 친화력을 그렇게 펴는 시간도 있다는 측면에서 내친 김에 더 나아가자 . 맨 처음 절 밥을 먹은 것은 아주 어린시절 식구들을 따라 누군가의 사십구재를 치룬날인데 지금은 잔영조차 가물가물하다. 절 밥을 제대로 음미한 것은 해인사 금강굴에서 였다. 1971년 겨울, 그 곳에서 열린 전국 일간지 문화부장 들의 세미나에 동아일보 문화부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주제 발표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잠은 사하촌 홍도여관에서 자고, 이틀에 걸친 세미나 기간동안 계속 절 밥을 먹었다. 호텔이 아닌 암자에서 신문 문화면 제작 책임자들이 모여회의를 진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선운치가 넘쳤다. 시종 절 밥을 먹는 재미또한 색다른 체험 이였다.
그런데 곧 물리고 말았다. 첫날은 맛이 다소 씁쓸한 나물무침이며 튀각 들이 오른 상차림이 반가워 허겁지겁 수저를 놀렸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씻고, 겨우살이를 하느라ꡐ동안거ꡑ 에 들어간 격인 자연의 쓸쓸한 아름다움이 뜨내기 객식구들의 식욕을 한층 돋구었다. 하지만 끼니를 계속 이
어나가면서 슬슬 딴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매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비슷한 채식 투성이 밥상에서 그새를 못 참고 고개 드는 소증素症을 어이하리. 안 먹으면 육징肉徵이 일만큼 어육류를 즐기는 식성도 아닌데 그랬다. 속진에 절은 어이없는 한계가 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눈치 빠르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기자들로서도 새우젓 꼬리 하나 건지지 못했다.
그 뒤로도 절 밥을 대할 기회는 적지 않았다. 그 때마다 고맙고 맛있게 얻어 먹었는데 이번에는 같잖게 웃자란 생각을 하며 먹었다. 끝내 절 가장자리만을 배회하는 듯한 우세 사기 알맞을 말일는지 모르나, 종교적 금욕의 발단은 필경 무얼 먹냐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느낌을 품은 것이다. 호의好衣를 물리친
수도 생활은 먹는 행위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치고, 초식 일색의 악식 단련 과정이 초장엔 무척 힘들 터이다. 길들여지면 그것도 호식好食으로 바뀌는 문리를 체득하게 되겠지만 그게 그리 쉬울라구. 눈을 돌려 일본의 \'쇼오징요리“(精進科理)“ 를 본다. ꡐ용맹정진ꡑ 이나 “정진결제” 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진이라는 말에 대한 양국간의 두 가지 용례는 같다. 선행을 닦는다는 해석에 곁들인 채식의 뜻이 그것인데, 일본에서는 이 음식이 옛 부터 상업화되었다. 특히 사찰 도시 교오토(京都) 일원에는 정진요리 전문집이 적잖다. 절은 절이로되 이 점 에서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그쪽에선 종교의 우루과이 라운드식 개방이 일찌감치 이루어진 푼수인데, 나중에는 차츰 그들 특유의 ‘짬뽕’ 이 진전 되었다. 이른바 신도와 불교의 구분도 애매하다. 결혼은 신도식이고 장례는 불교식으로 거행하는 사례가 이런 종교 환경을 대변한다. 그런 추세가 절 음식까지 상품화한 셈이다. 남의 나라 불교의 이상한 환골탈태는 여하간에, 한국의 절은 변함없이 조식하며 불교 본디의 모습을 가장 잘 지킨다고 여긴다. 산이 깊어 더욱 장엄하고 수려하게 비친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결 같은 고행을 통해 중생들에게 말없는 교훈을 주는 공덕이 이어진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이런 무소유의 극치와 유무상통으로 조합될 때 더 빛난다는 이치를 여기서 확보할 수 있을까. 산도 말이 없고 절도 말이 없는 가운데, 나그네는 마침내 그렇게 믿고 싶은 담배 씨만도 못한 어떤 깨우침의 순간이나마 얻고자 산을 오르내리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