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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에 앞장선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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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이정 1994년 03월 145호
호치민시-옛 사이공-의 번화가인 카이망탕 8번가-옛 판딩풍가-사거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승탑이 우뚝 서있다. 향로에는 아직도 향불이 타오르고, 소담한 남국의 꽃들이 기단 위에 놓여 있다. 오고 가는 수많은 시민들이 승탑의 주인공에게 예경을 드리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또 호치민시에 있는 국립불교대학 회의실 중앙벽에는 불길에 휩싸인 한 승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대학의 심장부에 번듯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학교나 학생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그림인 것이 분명하다. 승탑과 그림의 주연공은 바로 틱쾅둑 스님이다. 틱쾅둑 스님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외세에 기반올 두고 불교도를 탄압한 고딘디엠 정권에 항거하여 63년 6월 11일 당시 판딘풍가 사거리에서 분신 자살한 분이다. 분신 자살한 자리에 타다 남은 그 분의 심장을 모신 승탑을 건립하였으며, 분신 자살 장면이 지금 국립불교대학 회의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그 분의 위법망구 爲法亡軀의 정신이 아직도 국민과 학생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베트남의 불교도들은 카톨릭을 베트남 정복을 위한 프랑스의 ‘집게발’ 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무농장 주인과 식민지의 행정가, 프랑스제빵, 붉은 포도주 이런 것들과 함께 프랑스는 카톨릭 사제들을 데리고 베트남에 와서 식민지 경영올 시작하였다. 국민의 팔십 퍼센트나 되는 신자를 거느린 불교는 거기에 맞는 우월한 국가적 지원과 특권의 위치에 더 이상 머물수 없었다. 프랑스 통치자들은 승려의 수를 제한했고 새로운 불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밖의 권리도 억압해나갔다.
이 틈에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불교조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결국 불교도들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그 뒤 연합군과의 전쟁에 베트남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승려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 그룹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미 외세와 독재의 투쟁으로 자신들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히고 많은 신도와 국민들의 여론을 확보하였다.
62년 가을, 한 승려가 미국의 「라이프」지 기자에게 호소했다. ꡐ고딘디엠 대통령은 카톨릭 블럭으로 나라를 통일하기를 원하며, 모든 종파를 개종시켜 카톨릭으로 만들려 한다. 베트남의 성당은 정부의 대변인이다. 만일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고위 장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카톨릭교도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고딘디엠의 독재 정부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높아 갔고. 민족주의자로서 국민적 신뢰를 갖고 있던 불교도들의 누증된 원한
은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급진전하였다.
63년 5월 7일 부처님 오신 날의 하루전날, 고딘디엠은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불교기의 게양을 금지시켰고, 급기야 후에에서는 경찰이 절에서 불교기를 철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수천 명의 불교도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그러자 정부는 탱크를 앞세우고 군중의 머리 위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아홉명이 탱크나 무장차의 바퀴에 깔려 죽었다. 이어 수백 명의 승려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적인 단식 투쟁을 하였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종교적 차별과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에 합류했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군사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 해 6월 11 일, 틱광둑 스님은 마침내 외세와 결탁한 독재정권의 추방을 주장하며 분신 자살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딘디엠 대통령의 동쟁 고딘누는 틱광둑 스님의 자살을 ‘한 불교도의 바비큐’ 라고 망발했을 뿐, 정부의 반응은 조금도 미덥지 못했다. 또한 이에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은 틱쾅둑 스님의 타다 남은 심장에 대해 ꡒ화장-분신 자살 뒤 화장을 했다-전에 이미 심장이 제거되었다” , ꡒ불에 구어진 동물의 심장과 바꿔치기 했다”는 둥의 냉소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틱찌쾅 스님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에서는 이에 조금도 굴함 없이 불교기 게양을 금지한 대통령령의 취소, 불교와 카톨릭의 법적 평등, 불교도 체포의 중지, 불교의식 거행과 포교의 자유, 학살의 희생자 배상과 책임자 처벌 따위를 요구했다.
결국 베트남에서 불교도 항쟁의 촉매제가 된 이 분신 자살-사건은 그 뒤 후에에서 아홉 명의 스님이 잇따라 분신하는 등 모두 열두 명의 스님이 분신 자살하여 불교도를 중심으로 한민족주의 노선의 대동단결과 대규모 시위를 유발했고, 마침내 고딘디엠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 뒤에도 이들은 민족적 위기와 종교적 편파를 이겨 내려는 집요하고 가열찬 싸움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이 뒤로는 승리만 있을 뿐 패배는 없었다.
75년 통일을 이룩한 뒤에도 불교도들의 이러한 민족주의 노선과 국가적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카톨릭은 왜소화했지만 불교는 칠천만 인구의 팔십 퍼센트를 차지하는 부동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 당시의 불교 지도자들이 아직도 베트남 불교계에 건재해 있다. 대부분 칠십을 넘긴 노스님들이지만, 교계의 원로로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틱찌광 스님은 당시 불교계의 재야 지도자로서, 반 독재운동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분이다. 전쟁 때에 그 분이 살던 호치민의 안광사는 때때로 몇 겹의 철조망이 쳐졌고, 군인들이 지켰다. 이러한 가운데에 그 분은 장기간의 연금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분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여든 고개를 넘어선 연로한 나이 탓으로 활동은 다소 무디어진 인상이다. 그 분이 칩거한 안광사를 방문 했을때 그 분은 나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시자는 “정부 일로 바쁘시며, 지난 칠 년 동안 공식적으로 외국인을 만나신 적이 없다” 고 거절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대신 이 절에 사는 동명의 틱찌쾅 스님을 만났다. 60,70년대에 데모대의 일원으로 뛰었던 그는 지금 불교청년연맹 청년부장이며, 베트남불교승가중앙위원회의 호법국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전쟁 때에 국토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어도 불교신자로서 우리 국민들은 하나였다”고 강조한다. 특히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제삼국을 통해 남북 불교도들은 서로 은밀하게 교류를 지속해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교류가 통일 뒤 남북 불교계의 통일과 국민 의식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단다.
나트랑의 롱손사는 중부 베트남의 대표적인 절이다. 이 절에는 63년에 분신 자살한 열두 분의 스님이 기단에 부조되어 있는 대불이 있다. 대불의 기단을 십이 등분하고, 그 각각에 최초의 분신 자살자 틱쾅둑 스님을 중심으로하여 한분 한분의 부조상을 새겼다. 이 분들은 지금 베트남 불교계에서는 최고의 품계인 보뜩(보살)이라 불리고 있다. 나트랑의 시가지와 푸르디 푸른 남국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산 위에 있는 이 대불은 베트남 불교계의 민족주의 전통을 한껏 발양하고 있는 것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지금 베트남 불교계의 앞날은 밝다고 본다. 통일 뒤 사회주의의 기반 다지기에서 입은 불교의 훼손이 간간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들은 남북 불교계의 재통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또한 남북의 이질적 국민 감정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해 냈다. 베트남 불교계의 최고 조직인 베트남 불교승가중앙위원회의 회장이신 틱찌틴 스님(76)은 「불교계의 열 개 종파가 80년에 통합을 이룬뒤로 지금은 종파간의 불협화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과거 민족주의자들로서의 정신이 아직도 불교 내부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불교계는 새로운 의미 있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과도기의 투쟁적 구호보다는 불교 본디의 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올 곳곳에서 자주 목격한다. 독재정권 시대의 활동가들이 고령으로 퇴장하고 있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ꡐ근본불교로 돌아가자‘ 는 불교계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도하는 거대한 흐름이 기지개를 켜면서 베트남불교계의 내일을 열어 가고있다.